대순진리회 회보
대순진리회 - 『28수(宿) 신명』
벼리맘1
2024. 3. 27. 13:44
두(斗) 별을 관장하는 두무(杜茂) 신명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두수(斗宿)
두수(斗宿)는 28수 가운데 여덟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다음의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첫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6개로 동물은 해태(獬豸)이다.01 해태는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판단(判斷)한다는 상상(想像)의 동물로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동방 청룡 칠수 별자리의 이름은 용의 형상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연재될 북방 현무 칠수와 남방(南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의 경우에는 관련 동물의 형상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지 않다.
두수는 별자리의 형태가 두(斗)와 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북두칠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남두(南斗)로 불렀다. 두수를 의인화 할 때 북방두목해성군(北方斗木獬星君)이라 하면서도 그 모습은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형상인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북두(北斗)는 사(死)를 주관하고 남두(南斗)는 생(生)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남두성군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생사부(生死簿)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옛 사람들은 남두성군의 생사부에는 모든 생령(生靈)의 수명이 기록된 것이라 믿었다. 이 믿음에서 비롯된 설화는 한국과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남두성군을 잘 대접하여 그에게 수명 연장을 청원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02
후한의 창업공신 두무
두(斗) 별을 관장하는 두무[杜茂(?-43)]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자(字)는 제공(諸公)으로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현재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서북] 사람이다. 두무는 경시제가 유수를 행대사마(行大司馬)로 삼아 하북 평정을 명령한 이후부터 그를 따른 인물로 중견장군(中堅將軍)에 임명되었다. 유수가 정벌에 나설 때면 두무는 언제나 그를 수행하였다. 두무처럼 처음부터 광무제를 보필한 장수는 드물었다. 후한 창업에 대공을 세운 중흥 28장들은 주로 하북 평정 과정에 편입된 장수들이 많았다.
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즉위한 후 두무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낙향후(樂鄕侯)에 봉했다. 두무는 북쪽으로 오교(五校)를 진정(眞定)에서 공격하고 나아가 광평(廣平)을 평정하였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두무를 다시 고형후(苦陘侯)에 봉했다. 두무는 중랑장(中郞將) 왕양[王梁, 방(房) 별을 관장]과 함께 위군(魏郡), 청하(淸河), 동군(東郡)에서 오교를 공격하여 그들의 군영과 보루를 무너뜨렸다. 자신들의 근거를 상실한 오교의 자칭 대장군이나 지절대장(持節大將) 30명은 두무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무의 활약으로 세 개 군의 도적들이 소탕되었다. 이렇게 도적들이 소탕되자 이들의 준동(蠢動)으로 끊어졌던 도로가 다시 연결되어 사람과 물자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이듬해인 27(건무 3)년 광무제는 두무를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하고 패군(沛郡)을 공격케 하니, 그는 망현(芒縣)을 점령하였다. 이때 서방(西方)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서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교강(佼彊)03을 맞아들였다. 29(건무 5)년 봄 두무는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를 이끌고 서방으로 진공하여 수개월 만에 그곳을 함락시키니 교강은 동헌(董憲)에게로 도망쳤다.
두무의 활약으로 동쪽이 평정되자 광무제는 31(건무 7)년 조서를 내려 병사를 이끌고 진양(晉陽), 광무(廣武, 太原郡에 속함)로 가서 흉노의 노략질을 대비하도록 했다. 33(건무 9)년 두무는 안문(雁門) 태수인 곽량(郭涼)04과 함께 노방(盧芳)05의 장수 윤유(尹由)를 번치(繁畤)에서 공격하였다. 윤유가 공격당하자 가람(賈覽)이 호(胡)의 기병(騎兵) 만여 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하러 왔다. 두무가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루번성(樓煩城)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노방은 고류(高柳, 산서성 陽高縣)를 근거지로 삼고 흉노와 연합하여 자주 변방을 노략질하였다. 광무제는 노방 공략을 위해 수차례 군대를 파견했지만, 북방의 군사대국인 흉노의 지원을 받고 있는 노방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36(건무 12)년 광무제는 단충(段忠)을 보내 여러 군(郡)의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두무에게 배속케 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두무는 변방의 사졸을 징발하여 초소를 짓고 봉화를 수리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각종 군수품과 생필품을 모아서 군사들에게 공급하고 변방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주니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두무는 또한 둔전(屯田)06을 경작하여 수레로 식량을 운반, 공급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유가 안문에 침입하여 가단(賈丹), 곽광(霍匡), 해승(解勝)을 사로잡고 이들을 장수로 삼아 함께 평성(平城)을 수비하였다. 그런데 가단 등이 공모하여 윤유를 죽이고 안문태수 곽량에게 출두했다. 곽량은 즉시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는 그들 모두 열후(列侯)에 봉하고, 군수물자, 비단, 옷감을 두무와 곽량의 군대 및 평성의 백성들에게 하사토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노방의 성읍들이 점점 항복해 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곽량이 순씨(郇氏)에게 아부했던 세력을 몰아내고 한 달여 만에 안문은 안정을 찾았다. 계속해서 세력이 꺾인 노방은 드디어 흉노에게 도망갔다. 광무제는 곽량의 아들을 발탁하여 중랑(中郞)으로 삼고 자신의 곁에서 보위토록 하였다.
37(건무 13)년 광무제는 두무의 식읍을 늘려주고 수후(脩侯)에 다시 봉했다.
39(건무 15)년 두무는 참거향후(參蘧鄕侯)로 봉해졌다.
43(건무 19)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