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주거 문화에는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있다. 사랑방은 찾아온 손님을 정성으로 맞이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청하는 훈훈한 인정이 깃든 방이다. 사랑방은 이렇듯 ‘손님을 대하는 마땅한 예(禮)’로서의 도리(道理)를 담은 우리네 정서의 품격을 엿보게 한다. 여기에서 ‘마땅한 예로써 대한다.’는 의미의 우리말은 다름 아닌 ‘대접(待接)’이다. 사랑방이라는 하나의 예를 볼 때도, 우리 정서 속의 사람에 대한 예는 표면적인 의미의 접대(接待)를 넘어 사람에 대한 도리, 타자에 대한 정(情)과 덕(德)이라는 깊은 성품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접의 대상이 단지 인간에게 국한되지 않고 신(神)과 만물(萬物) 전체로 그 의미가 닿아 있는 광의의 의미로서의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면면히 이어온 대접은 『전경』에서 ‘음식 대접’, ‘말 대접’, ‘마음 대접’, ‘신명 대접’ 등과 같이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상제님께서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교법 3장 22절)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대접에는 우리의 정서적 의미를 넘어 어떤 특별한 의의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경』에 나타난 대접의 의미를 유형별로 나눠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접은 정성껏 음식을 차려 손님을 대함이나, 상대를 극진히 모시고 배려하는 마음가짐, 혹은 마땅한 예로써 손님을 대함으로 표현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서 대한다는 것이 주요한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가 깃든 대접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식대접이다. 예로부터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의식주 문제가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큰 문제였고, 그중 음식[食]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내 집에 이웃 마을이나 이웃집에서 찾아오는 손님, 심지어 날아 들어온 새라도 끼니를 걸러 보내지 않는다는 미덕이 있을 만큼, 손님맞이의 기본은 음식대접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국서(國書)를 지니고 온 사신을 맞을 때 정중한 예와 함께 후한 음식대접을 시작으로 의전행사가 진행될 정도이니 말이다. 『전경』에도 몇몇 종도들이 상제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01 음식의 공양을 통해 마땅한 도리로서 잘 모신다는 의미의 대접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행록 4장 36절02은 한 종도의 아내가 찾아오신 상제님께 마땅히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로서의 대접을 하지 못함에 따라 빚어진 부정적인 결과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손님맞이를 할 때 음식에 정성을 담아 대접하는 것을 집주인의 인덕(人德)이라 받아들였고, 심지어 대접할 쌀 한 톨 없을 시에는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스럽게 내놓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여겼다. 이러한 도리, 그것도 삼계대권을 주재하시는 상제님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이 여인은 저버렸던 것이다. 도리란 도전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바른 길”03이며, 이는 곧 덕(德)의 발현을 뜻한다. 덕의 발현은 남을 잘 되게 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즉,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 덕(德)을 쌓는 바탕이 되며, 도타운 덕은 대접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접은 말[言]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말은 마음과 감정, 생각과 의사를 서로 나누고 조절하는 수단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를 깊게 하고, 서로 협조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소통의 매개체다. 즉, 인간관계를 더욱 잘 되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을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내왕(來往)하는 손님에게 마땅한 예를 갖추면서도 후덕한 말로써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것을 도리라 여겼다. 그것도 언제나 덕을 붙여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 손님을 올바르게 대접하는 큰 덕목이었다. 이는 곧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오랜 벗처럼 편안하면서도 진실하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덕을 붙여 말대접을 잘 하는 것이다. 언덕(言德)에 관해 상제님께서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교법 1장 11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남을 좋게 말하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덕무이명(德懋耳鳴)”04이라 하셨듯이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덕을 행하려는 즉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대한다는 대접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공사 2장 4절)고 하신 것은 이러한 언덕의 한 측면을 나타내신 것이라 여겨진다. 이처럼 말대접은 남을 잘 되게 하는 중요한 한 측면이나, 그에 못지않게 마음 대접이 역시 남을 잘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인 만큼 남에게 덕을 베푸는 근본은 마음이 되며, 언덕을 베풀기 위해 우선 갖추어야 할 요건이 바른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요.”(교법 2장 10절)라고 하시고, 전봉준은 남을 잘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 잘 되어 조선명부가 되었다고 하시었으며(교법 1장 2절), “…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예시 43절)고 하신 말씀을 볼 때, 이것은 모두 남에게 덕을 베푸는 근본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대접과 연관지어 생각할 부분이 신명에 대한 대접이다. 신명은 전지전능의 권능과 최고의 위격을 가진 상제님을 중심으로 삼계(三界)에 널리 실재하는 성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전경』에는 귀신(鬼神), 조왕(竈王), 상량(上樑) 등의 신적 존재가 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중에 전승되는 미지의 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외경심(畏敬心)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바위 등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신명이 깃든 모든 것을 마땅한 예로써 정성껏 대접하려는 하나의 신명 대접을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 집지킴이 고사(告祀)에서 그러한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집을 짓기 위해 집터에 고사를 지내는 행위에서부터 집이 지어진 후 이루어지는 집들이까지 일련의 과정 속에서 행해지는 의례를 가리킨다. 곧 ‘날받이’, ‘텃고사’, ‘상량(上樑)고사’, ‘집들이[입택(入宅)]고사’가 그것으로, 이들을 섬기는 데 이만저만 정성을 기울였던 게 아니었다. “삼대(三代)를 이어 음덕(陰德)을 쌓아야 좋은 집터가 나온다.”는 말이 있듯 집을 지어나가는 첫 관문인 집터 선택에서부터 시작하여 땅의 기운을 알아보고 집이 들어서기에 적당하면 이 땅을 지키고 있는 땅의 신에게 정성껏 마련한 제주(祭酒)와 제물(祭物)로 고사하며, 그런 다음 기둥이 세워지면 집의 중추인 상량대에 고사하고, 마지막에는 집이 모두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집 주인은 고사를 드린 후 마을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안방에 아이를 점지하여 주는 삼신(三神), 부엌의 불을 맡고 있는 조왕신(竈王神), 마당에는 터주신, 뒤꼍 장독대에는 천룡신(天龍神), 우물에는 용왕신, 뒷간에는 측신(廁神), 문간에는 문간신, 광에는 업신 등 집안 곳곳에 깃든 신에게도 빠짐없이 고사를 지냈다.05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나아가서는 신과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집짓기에 있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겼다.
이상에서 우리는 『전경』에 나타난 대접의 의미를 유형별로 나눠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마땅한 예(禮),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써 손님을 대한다는 것이 대접의 의의였다. 그 전제조건은 후덕한 마음으로 남을 잘 되게 하려는 것과, 덕을 붙인 말인 언덕으로써 남에게 좋게 대하는 것인데, 이처럼 남에게 덕을 베푸는 근본은 진실하고 올바른 마음을 간직하는 데서 찾아졌다. 더욱이 우리 선조들은 어디든지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사람이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로써 신에게 정성껏 대접하려는 정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상제님께서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고 하셨듯이, 대순사상에서 대접은 남 잘 되게 하는 적극적인 실천수행의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대접의 의의를 통해 남을 잘 되게 하는 데 있어서 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나의 덕을 몰라주더라도 괘의치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06 “덕은 음덕이 크니라.”,07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08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처럼 남이 알아주는 것에 대해 괘의치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먼저 나의 마음을 참답게 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참되게 하고, 먼저 내 몸을 공경함으로써 남도 몸을 공경하게 되며, 먼저 나의 일을 신의로써 하면 남들이 신의를 본받게 된다.”09고 하신 도전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덕을 쌓고 언행을 일치시키며 수도의 삼요체(三要諦)인 성(誠)·경(敬)·신(信)을 갖추면서 솔선수범(率先垂範)해 나가는 것이 바른 도리일 것이다.
01 행록 1장 28절; 행록 4장 49절; 공사 2장 3절 참조. 02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상제께서 김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던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 03 《대순회보》 5호, 「도전님 훈시」. 04 교법 3장 47절 - 흔히 이명증(耳鳴症)이라 해서 환자 자신에게만 어떤 종류의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세가 있다. 이처럼 이명(耳鳴)은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덕무이명’은 ‘자신만 알고 상대방은 모르게 덕을 베푸는 데 힘쓰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대순회보》 80호, 「청계탑 - 덕무이명(德懋耳鳴)」 참조) 05 《대순회보》 122호, 「민간신앙 - 자동차고사」; 《대순회보》 131호, 「민간신앙 - 상량고사」; 《대순회보》 149호, 「민간신앙 - 집지킴이고사」 참조. 06 교법 3장 11절. 07 교법 2장 18절. 08 교법 1장 2절. 09 『대순지침』,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