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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 『금강산 이야기』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3. 4. 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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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74)

보덕암(普德庵) 전설 (II)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보덕암(普德庵)은 내금강의 만폭동 구역에서 법기봉(法起峰)으로 올라가는 중턱의 아슬아슬한 절벽에 위치한 암자이다. 20m가 넘는 절벽에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받쳐 짓고, 쇠줄로 바위에 붙잡아 매어놓았다. 최초의 건물은 고구려 시대인 627년에 보덕화상이 수도하기 위해 자연굴을 이용해 지었고, 고려시대인 1115년에는 회정(懷正)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중창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다시 재건되었다.
  이 암자는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해 바위벽에 붙어 있는데,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하면서도 매달려 있는 모습이 절묘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누가 구상하고 설계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묘하게 지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본전인 관음전(觀音殿)에 들어서면 흔들거리는 마루가 있고 그 밑을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가 보인다. 여기서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백색의 관음상을 안치한 자연굴이 있는데 이 관음상은 금강산에서 가장 영험 있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보덕암과 관련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7세기 고구려 때의 일이다. 보덕(普德)화상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 금강산의 중향성으로 향했다. 길이 만폭동 골짜기를 거치게 되어 있어서 그가 만폭동 입구로 들어서는데 나이 18세쯤 된 흰옷 입은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스님, 어디로 가려고 하시나이까?” 하고 묻기에, “법기보살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법기보살님을 만나러 간다면서 어찌하여 이곳에 살고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만나 인사할 줄을 모르십니까?” 하면서 보덕을 인도하여 어느 산골짜기로 나아갔다. 보덕이 그녀를 따라가다가 어느 굴이 있는 절벽에 이르렀을 때 앞서가던 처녀는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이는 필시 여기서 기다리란 뜻일 게야.’라고 생각한 보덕은 그 굴속에 3년 동안 거처하면서 불법을 공부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자 그의 정성에 감동한 법기보살과 관음보살이 세 번씩이나 자신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이적이 있었다. 이후 보덕은 자신이 거처하던 곳에 암자를 세우고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그가 금강산을 떠날 때도 그 처녀가 나타나 만폭동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금강산의 보덕암뿐만 아니라 충주의 보덕사, 문경의 보덕암 모두 그가 거처하면서 세운 절이다.
  금강산의 보덕암이 세워진 후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12세기 중엽의 일이다. 회정(懷正)이란 스님이 금강산 송라암(松蘿庵)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봄부터 시작해서 관음보살을 지극한 정성으로 부르면서 한번 친견(親見)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만 3년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에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양구고을 방산이란 곳에 가면 몰골옹(沒骨翁)과 해명방(解明方)이 살고 있을 터이니 마땅히 그곳으로 가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회정은 잠에서 깨어났으나 꿈속에서 들었던 이름이 너무도 생생했다. 그래서 이것은 틀림없는 부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 그는, 다음 날 아침 행장을 꾸려서 양구고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회정이 양구고을 방산에 가서 두루 돌아다니며 몰골옹과 해명방을 찾다가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새끼줄로 만든 관(冠)을 쓴 노인이 눈물, 콧물로 옷깃을 다 적신 채 앉아있었다.
  회정은 그나마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서 노인에게 절을 하며 “혹시 몰골옹이란 분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그는 우습기도 하고 맹랑하기도 했지만 혹시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을까 해서 하룻밤을 그 집에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밥상을 차려주는 것을 보니 멥쌀로 지은 조밥에다가 마늘과 채소를 된장에 아무렇게나 찍어먹는데 더럽기도 하고 냄새도 고약했다. 그가 사양하는데도 노인은 막무가내로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회정은 “해명방이란 분도 이 근처에 사십니까?” 하고 물으니, 노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소.”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는 노인에게 해명방의 집이 있는 곳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 이르니 나이 열여섯 살쯤 된 소녀가 옷을 빨아서 널고 있었다. 
  “해명방 어른 계십니까?”
  “저희 아버지는 조만간 돌아오실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당부드릴 게 있어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실테니 꼭 참고 견디며 받아들이셔야 해요.”
  얼마 후 키가 9척이나 되는 늙은 중 한 사람이 나뭇단을 지고 들어왔다. 그는 손님을 보더니 “웬 놈이냐?” 하고는 작대기를 들고 내리칠 기세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회정은 여러 차례 쫓겨났다가 꾹 참고 다시 들어갔지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분한 생각 같아서는 당장 돌아가고 싶었으나 꿈에 본 할머니의 말씀과 그 소녀의 당부도 생각나서 한참 동안 밖에 서 있다가 다시 해명방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러자 노인은 “이놈이 담이 큰 놈이구나!” 하더니, “네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내 사위가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회정은 “불도를 닦는 중이 어찌 장가를 들겠소이까?” 하고 사양하였다. 해명방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면서 결혼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다시 소녀의 말이 생각나서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회정과 해명방의 딸은 화촉을 밝히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날부터 해명방이 불법을 강론하는데 그냥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 소녀가 매번 다시 설명을 해주곤 하였다. 이렇게 어느덧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회정은 승려의 신분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부모님을 만나 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억지로 말미를 얻어 집을 나섰다.
  회정이 돌아가는 길에 몰골옹의 집에 잠깐 들렀더니 그가 “너 보현(普賢)과 관음(觀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비로소 뭔가 깨달은 그는 다시 해명방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던 집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전과 다름없는 것은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몰골옹의 집으로 다시 찾아갔더니 그곳도 역시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회정은 그제야 보살들의 조화는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닫고 종신토록 그들 곁에서 섬기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가 송라암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도를 닦으며 수양하고 있는데 흰옷을 입은 할머니가 다시 꿈에 나타나 타이르기를 “너의 전신(前身)은 보덕이라는 비구로서 만폭동 골짜기 안에서 도를 닦던 사람이다. 거기에 옛터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어째서 찾아가 보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잠에서 깬 회정은 다시 만폭동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따라 가던 그는 해명방의 딸이 개울가에서 수건을 씻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녀가 누구임을 잊고 전날의 옛정만을 생각하며 뛰어가면서 말을 걸어보았으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가더니 어느 다리를 지난 후에는 자취마저 감추었다.
  맥이 빠진 그는 너럭바위 위에 앉아서 또다시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아래쪽 소(沼)에 여인의 그림자와 함께 어떤 굴의 입구가 완연히 비치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소에 비친 것과 똑같은 굴이 절벽 위에 있었다. 그가 다시 기운을 내서 넝쿨을 붙잡고 절벽을 기어 올라갔더니, 과연 해명방의 딸이 굴에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방산에서 맺은 인연으로 말하자면 억만년이 지나도록 다시 맺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중하시고 번거롭게 굴지 마시라. 지난날 만난 몰골옹은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고 해명방은 보현보살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구려 때의 고승 보덕의 후신이요, 나는 관음보살인데 늘 이 굴에 살면서 인연이 되면 종종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지요.” 그녀는 말을 끝맺더니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회정은 보살들의 조화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고 탄식하며 바위벽에 “관음보살이 늘 거처하는 보덕굴”이라고 써 붙였다. 그리고는 절벽 위에 초막암자를 짓고 300일간 머물며 관음기도를 지극정성으로 드려 마침내 부처의 대자대비한 정신세계에 통달할 수 있었다. 그의 기도와 함께 많은 이적들이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관음기도 도량으로 삼아 참배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지 구조물을 첨가하여 절을 중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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