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하면 사람들은 0.1초도 기다리지 않고 ‘성악설’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이 기계적인 연상이 순자의 사상을 정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그가 그토록 고심하며 고안했고 세심하게 생각했던 수많은 사유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를 순자에게 덧 씌어진 ‘성악설의 굴레’, ‘성악설의 원죄’라고 본다. ‘성악설’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순자의 사상을 보다 더 풍부하고 깊게 이해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사실 성악설은 『순자』 32편 중에서 다른 곳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오로지 제23편 「성악」에만 보인다.01 어떤 사상가가 자신의 대표 학설이라고 하면 곳곳에서 자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주장이 바로 그 핵심 학설에서 연역되기 때문이다. 생각과 달리 성악이 『순자』에서 자주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짜 순자의 주장이 아닐 수 있고 순자의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중요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후자로 보고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무리 두뇌의 용량이 적더라도 순자를 이해하려면 성악을 옆에 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을 한두 번 만나면 벌써 “저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이네.”라는 판단을 내린다. 다른 날 그 사람이 외향적인 취향을 보이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 사람 오늘 무슨 일이 있나!”라며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상대의 변화에 의아해한다. 이처럼 사태를 선입견과 흑백논리로 환원해서 바라보게 되면 진상보다는 가상 또는 허상에 이르기 쉽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철학사에서도 순자를 성악의 굴레에 가두었기 때문에 동아시아가 ‘근대’에 지각했을 정도이다. 급할 것 없이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순자를 들여다보자. 풍부한 사상을 가진 순자를 성악의 침대에 맞추려고 그의 손과 발을 자르는 살상의 어리석은 짓을 피해야겠다.(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 ‘순자=성악설’의 도식이 절대 진리인 양 입에서 귀로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성악설의 굴레와 지연된 근대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는 다양한 지평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에 초점을 둔다면 전근대에서는 이념적 초월적 추상적 보편적 인간을 말하고 근대에서는 주로 현실적 현상적 구체적 개별적 인간을 말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각각 물질과 무의식에 초점을 두었지만 둘 다 현실의 인간이 실제로 영향 받아서 움직여 가는 동선에 주목을 했다. 반면 플라톤과 주희는 각각 세계의 본질을 이데아(idea)와 리(理)로 달리 말했지만 둘은 똑같이 현실의 사람은 늘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이념을 닮아야 한다고 보았다.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학파와 사상가가 있었지만 인간을 두고 논점을 축약한다면 둘로 나눌 수 있다. 1)사람이 현실에서 나쁜 짓을 할지라도 그것은 착각, 욕망, 감정 등 비본질적 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자기 통제를 잃은 상태일 뿐이고 때 묻지 않고 타자와 잘 어울리는 원래성을 가지고 있다. 2)사람은 일차적으로 물질적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므로 특히 부족의 상황에서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할 수 있지만 그게 치유할 수 없을 절대 악에 근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1)을 맹자의 성선설로 2)를 순자의 성악설로 연결시킨다. 중요한 것은 연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1)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배고프면 밥부터 찾는 사람의 현실적 욕망을 부차적이고 천박한 것으로 보고 그것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은 늘 현실을 넘어선 순수하고 진실한 본원 ―예컨대 유일신의 뜻, 하늘의 명령, 성(性), 전통 등― 에 도달하려고 기도하고 수양해야 한다. 현실의 문제는 전적으로 본원을 돌보지 않는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2)를 주장하게 되면 사람은 구체적인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초역사적 실체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뒷짐 지지 않고 앞으로 나서서 가지려고 다투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의 현실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근대가 유교 사회라고 하고 맹자식의 인간 이해가 주류였다고 한다면, 사람은 각자 전통 규범, 성인 모델, 초역사적 본성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좁혀지는 거리만큼 인간은 완성되어갔던 것이다. 인간이 완성되어가는 만큼 절대주의를 부정하는 근대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멀어지는 만큼 근대는 지연되었던 것이다.
만약 순자식의 인간 이해가 주류적인 시대정신이 되었더라면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킨 마키아벨리(1469~1527)도 나오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을 말한 홉스(1588~1679)도 나오고 아예 사회와 역사를 소유 관계의 혁명으로 보는 마르크스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순자를 비롯해서 그들과 비슷한 점이 있는 선진시대의 상앙(商⋅), 한비와 송나라 진량과 섭적, 명말청초의 황종희(1610~1695), 조선 후기의 정약용 등이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여서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없었다. 그만큼 전통의 위력이 강했고 절대주의의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맹자의 후예보다 순자의 후예가 많이 나오고 그들이 순자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냈더라면 하고 상상해본다.
철학사의 지식이 조금만 있으면 맹자의 성선이 장구히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은 전국시대에 변방에 있었고 당시나 한제국의 동중서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이론으로 비판받았다.02 주희가 맹자의 성선과 순자의 성악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종합하면서 성악의 자립 기반이 급속하게 붕괴되어갔다. 즉 성악(기질지성)은 결국 성선(본연지성)에 종속되어 그것에 투항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03 그 뒤로 주희의 종합 테제에 부분 보수를 주장했지만 성악의 자립설을 강하게 끌고나가지 못했다.
⋅전국시대 최고의 인식론자이자 심리학자
우리는 순자를 성악론자로 아는 것이 전부이다(?). 『순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순자가 성악만이 아니라 정악(情惡)과 정선(情善)을 다 말하고 있다. 강고한 선입견으로 인해 『순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순자는 한자(한비자)와 함께 전국시대의 끝자락에 활동한 인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총결하는 태도를 나타낸다.04 단순히 뒤에 있는 자가 앞에 있었던 것을 한 곳에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명확한 기준에 따라 체계를 부여하고 있다. 여러 가지 중에 제21편 「해폐(解蔽)」를 보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공정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순 없는 지식의 축적은 가능한가⋅”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나는 처음 「해폐」를 읽고서 충격을 받았다. 엄격한 논증에 의해서 정당한 인식 문제를 다루는데 서양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순자는 장자와 주장이 극명하게 갈린다. 장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통의 규범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사람은 감각(몸)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또는 번갈아 나타나는 것을 개인의 선입견에 따라 자유롭게(극단적으로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판단한다.05 분명한 것은 사람이 선입관에 따라 달리 경험하지만 경우에 따라 사람끼리 엇물리기도 하고 맞물리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맞물리기를 규제할 수 없는 우연적인 사태일 뿐이다.
장자는 우연적인 맞물림의 경험을 병적으로 보거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우연적인 맞물림을 고정적 대응 관계나 선험적 형식으로 규제하려는 시도 자체를 병적으로 본다. 이에 장자는 우연적 맞물림을 다음처럼 부연 설명했다. “소위 인식 주체로서 마음이 명예, 술수, 사업, 지식을 추구하고 소유하는 센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경계를 터득하고 무형식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하면서 소유(축적)에 응하지 않고 공허(무의미)하게 할 뿐이다. 이른 사람은 거울처럼 마음을 쓰면서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 않고 호응하지만 쌓아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태를 제대로 짊어지면서 다치지 않는다.”06
장자는 대상을 주관의 욕망 아래에 재편하지도 보편 형식에 범주화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대상을 주관의 의미 있는 형식에 호출한다는 맥락에서 인식을 부정하고 오히려 대상과 주관이 얽혀서 의미(意味)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바로 양자는 서로로부터 무한히 멀어져간다. 다시 얽매이는 상황을 배제하지 않지만 이전의 사태는 이후의 사태에 어떠한 규정성을 남기지 않고 그 상황에서 또 새로운 의미의 불꽃을 일으킨다. 예컨대 기술자가 전동 그라인더로 쇠를 갈 때 둘이 부딪히는 불꽃이 튀지만 연쇄적인 불꽃은 제각각이고 그라인더가 쇠에서 떨어지면 불꽃은 일지 않고 다시 부딪히면 불꽃이 인다. 이 불꽃은 쇠에 대한 앎보다 재미(흥미)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장자의 주장대로 하면 인식의 정당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규범적 인식이 성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공자의 도덕, 즉 “사람은 반드시 주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익이 정당한지 검토해야 한다.”와 같은 주장이 불가능해진다. 도덕이 옳다는 것을 논증할 수도 없고 옳다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순자 입상 / 중국
순자는 장자의 공격 앞에 넋 놓고 있을 수도 없고 그의 할 일이 참으로 막중해진다. 순자는 먼저 사설과 진리, 편견과 지식의 구별과 정당화된 지식의 문제에 정면으로 다가갔다. “사람의 문제는 한 부분에 가리어져서 큰 이치에 어두운 데에 있다. … 무엇 때문에 가리어질까⋅ 바람과 싫음, 처음과 끝, 멂과 가까움, 넓음과 좁음, 옛날과 지금 때문에 가리어진다. 사람이 만나는 사태는 제각각 다르므로 서로 가리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식의 공통된 문제가 된다.”07 순자는 장자의 주장을 그대로 맞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맞장구를 치고 있다. “그래, 맞아. 사람은 이런 10가지 이유로 공정한 인식을 하지 못하지.” 평소에는 실수 없이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더라도 처음이면 당황하고 떨려서 실수하고 끝이면 덤벙대고 서두르다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순자는 사람의 편견,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장자처럼 규범적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허일이정(虛壹而靜)’하기만 하면 장자의 우려와 달리 규범적 인식과 축적된 지식의 정당화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허는 이미 쌓여 있는 것이 앞으로 받아들일 것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일은 저 쪽 하나가 이 쪽 하나를 해치지 않는 것이다. 정은 꿈을 꾸거나 의식이 작용하더라도 지각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08 순자는 분명 허(虛), 일(壹), 정(靜)이라는 장자의 용어를 차용하면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쓰고 있다. 장자는 이 용어를 실제로 축적의 부정, 지식과 권력 욕망의 배제 등을 말했다. 순자는 장자가 선험적 범주, 인식의 보편적 형식 그리고 사회적 합의[약정성속(約定成俗)]의 가능성을 몰랐기 때문에 “모든 인식은 편견이므로 보편타당한 지식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순자는 예(禮)나 도(道)와 같은 선험적 형식과 범주를 인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데이터는 기존의 지식과 충돌되지 않고 더 합리적인 지식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장자』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떨어졌던 인의(仁義)의 도덕은 순자에 의해서 정당화 가능한 도덕 가치로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설계
알게 모르게 주희가 각본을 썼던 도통설道統說의 영향으로 공자의 적통이 맹자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실 맹자도 자기 책의 제일 뒤에 공자를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진심」하 38) 맹자의 연결은 그의 주장일 뿐 당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순자도 공자의 적통을 이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을 보면 제1편이 「권학(勸學)」이고 제32편 「요문(堯問)」이다. 『논어』의 경우 제1편이 「학이(學而)」이고 제20편이 「요왈(堯曰)」이다. 『논어』와 『순자』 사이의 일치는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흡사해서 의도의 개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순자가 직접 책의 순서를 편집했건 그의 후학이 했건 간에 그 또는 그들은 공자와 순자 사이의 연결을 강하게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순자가 뛰어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유학사에 배척되었는데, 그 이유로 순자가 법가 인물 한비와 이사의 스승이었다는 점을 말하곤 한다. 이는 유학이 학술의 정통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스승 순자는 제자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해 진나라에서 유학이 탄압을 받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순자 당시에 유학은 주류적인 학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의 사상가들은 서로 비판하면서 학파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넘나들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순자는 학문적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물을 받아들인 자유주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더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선진시대에 있지도 않았던 학파의 도식을 거꾸로 적용해서 제자백가를 서로 배제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순자가 성악을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정론으로 말하지 않았다. 성악이더라도 얼마든지 치유, 회생 등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즉 악이 선과 화합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두고 극단적으로 대결로 치닫는 사악한 악마와 사탄을 가리키지 않고 거칠고 길들어지지 않은 야생마나 길을 찾지 못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뜨거운 감자’의 사춘기 청소년(예컨대 겁 없는 중2병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순자』의 핵심은 사람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과 제도의 마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자신의 소임을 알았기 때문에 제9편 「왕제」를 써서 앞으로 등장할 제국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공약의 발굴과 아젠다의 형성을 위해 선거 기획자가 각광을 받는다. 또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당선자는 인수위원회를 조직해서 앞으로 풀어갈 정책 과제를 개발하곤 한다. 「왕제」도 그와 비슷하게 지금은 없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진정한 왕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왕제」는 훗날 『예기』의 편찬 작업을 위한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는 또 다가올 미래가 왕정의 형태를 띨 거라 예상하고서 그 정치 체제의 핵심을 구성하는 군주(리더)와 신하(전문가)가 주의하고 따라할 길을 예비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이전의 역사적 경험을 종합해서 새 길을 제시한 제12편의 「군도(君道)」와 제13편의 「신도(臣道)」이다. 오늘날로 하면 정치학, 행정학 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그린 제국의 청사진은 진한 제국의 통치 근간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필자소개
신정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01 번역서로 이운구 옮김, 『순자』 전2책, 한길사, 2006; 김학주 옮김, 『순자』, 을유문화사, 2008 등이 있다.
04 제6편 「비십이자非十二子」는 순자가 자신의 선배 또는 동시대의 학자의 사상을 다소 극단화시켜서 비판하는 글이다. 그는 이편에서 ‘짧은 선진철학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핵심을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공자를 제7편 「중니仲尼」에서 다루고 있다. 이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다른 제자백가와 공자의 제자를 ‘열전’에서 다루고 공자를 제후에 해당되는 ‘세가’에서 다룬 것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순자는 공자를 제자백가와 같은 부류에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