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이 내금강 만폭동으로 길을 떠났을 때이다. 무더운 여름인지라 땀도 식히고 다리도 쉴 겸 해서 만폭동 입구에 자리 잡은 표훈사(表訓寺)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가 표훈사 앞의 다리에 들어서서 보니 절 입구인 능파루에 갓을 쓴 선비들이 모여 법석이고 있었다. 때마침 마주 오던 스님에게 물어보니 글깨나 한다는 양반들이 둘러앉아 한창 글짓기 내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능파루에서 잠깐 쉬었다 가려고 하던 차에 이곳에서 양반들이 글짓기 내기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부쩍 호기심이 동하였다. 이내 능파루의 시원한 2층 다락에 오른 삿갓은 한쪽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들의 글 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천하명산 금강산을 노래한다는 그들의 시(詩)가 모두 기백이 없고 공허한 데다가 앞뒤 글귀도 맞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하는 모양새도 가관이었다.
한 양반은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현명한 척 침묵을 지키고 다른 양반은 마치 대가(大家)인양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겼는가 하면, 또 어떤 양반은 남이 지은 글귀를 따서 제 것처럼 둘러맞추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시에 무지한 어느 양반은 금강산의 자연미를 모독하는 글까지 지어 읊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의 노는 꼴이 하도 가소로워 침을 탁 뱉고는 다락에서 내려가며 즉흥시 한 수를 큰소리로 읊었다.
나는 청산을 향해 가는데(我向靑山去)
녹수야 너는 어이하여 나오느냐.(綠水爾何來)
그의 범상치 않은 시를 새겨들은 한 양반이 김삿갓에게 “보아하니 길손도 시를 즐기는 것 같은데 우리와 함께 시 짓기 내기를 해보지 않겠소?”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삿갓은 그의 청에 못 이기는 척하며 되돌아서 다락 위에 올랐다.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으나 방금 읊조린 삿갓의 시에 충격을 받았던지라 양반들은 예의를 차려 그를 맞이하였다. 자리가 정돈되자 구석 쪽에 앉은 한 양반이 그가 시를 지을 줄 아는지 물었다.
“시를 지을 줄을 모르고 부를 줄만 알지요.”
“시를 부를 줄만 안다? 거 참 묘한 말이로군. 그럼 어디 한 수 불러보시오.”
그 양반이 붓을 들고 김삿갓을 쳐다보자 그는 곧 그 양반에게 소나무를 가리키는 글자가 있는지 물어보고는 그 두 자를 나란히 쓰라고 하였다.
“자, 두 자를 썼으니 또 부르게나.”
그러자 이번에는 잣나무를 가리키는 글자가 있으면 그 옆에 또 두 자를 쓰라고 했다. 그 양반은 삿갓이 시키는 대로 썼다. 이어 그는 바위를 가리키는 글자가 있으면 두 자를 더 쓰라 하고 그 곁에 돌아간다는 글자를 한 자 덧붙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줄을 바꾸어서 같은 방법으로 산과 물, 처소를 가리키는 글자를 각각 두 자씩 쓰게 하고 거기에 기이하다는 글자를 덧붙이라고 하였다. 영문도 모르고 여기까지 받아쓴 양반은 그만 붓을 획 집어던지며 버럭 화를 냈다.
“여보시오. 내가 시를 부르라고 했지 언제 이 따위 글자나 부르라고 했소?”
김삿갓은 잔뜩 골이 난 그 양반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그러기에 나는 시를 부를 줄만 안다고 하지 않았소. 한 자(字) 시에 능한 양반이 지어놓은 글귀의 뜻도 모르고 화부터 내니 이거 너무하는 것 같소이다.”
“뭐라고!”
“자, 나는 아무래도 글 잘하는 양반님네들과는 상대가 못되는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소.”
김삿갓은 이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쩍 일어나 다락을 내려갔다. 그의 도도한 태도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양반들은 삿갓이 떠나자 이내 그가 써놓은 글자들을 읽으며 음미해 나갔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드니
(松松栢栢岩岩廻)
산과 산, 물과 물 가는 곳마다 기이하구나.
(山山水水處處奇)
“어허, 이것이야말로 걸작이로구나!” 양반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에 비해 유치한 자신들의 시를 두고 낯이 뜨거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김삿갓이 표훈사 능파루에서 금강산의 경치를 단 몇 마디의 글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두 편의 즉흥시는 이때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마하연(摩訶衍)에서의 글짓기 내기
금강산 천지가 온통 단풍에 붉게 타던 어느 해 가을이었다. 김삿갓은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내금강의 한 스님을 찾아갔다. 유점사의 말사(末寺)인 마하연에 살고 있는 그 스님은 금강산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금강산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당대의 일류 문장가들과 어깨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대사의 명성을 익히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소원이 성취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청컨대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바라나이다.”
“원, 과찬의 말씀이시오.” 김삿갓의 인사말에 스님은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제가 듣건대 대사께서는 시에 관해 이 금강산에서 당할 자가 없다 하온데 대사와 함께 금강산에 대한 시 짓기를 겨루는 것으로 한때를 즐긴다면 다시없는 영광이겠소이다.”
뜻밖의 청에 놀란 스님은 “내가 시를 잘 짓는다는 것은 필시 사람들이 헛소문을 돌린 것이오. 나는 이 산속에서 오십여 생을 살아오면서도 아직 금강산에 알맞은 글귀 하나 찾지 못하였소. 헌데 그대는 얼마만 한 글재주를 지녔기에 감히 금강산에 대한 시 짓기 내기를 하자고 청하시오?”라고 물었다.
그 스님의 말에 호탕하게 웃고 난 삿갓은 “금강산은 천하명산이니 생긴 그대로 읊으면 시 또한 천하명시가 될 것이 아니오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난 스님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좋소이다. 그대가 진다면 유치한 글귀로 저 신성한 금강산을 모독한 벌로 그대의 이빨을 뽑겠소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진다면 그대에게 숙식을 무한정 제공하겠소.”
삿갓은 스님의 내기 조건에 흔쾌히 응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리 글재주가 뛰어난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을 수야 있겠소이까. 다만 저는 대사께서 금강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고 저 역시 금강산을 보면 볼수록 정(情)이 깊어지니, 이 두 마음을 합쳐 글을 짓는다면 혹시 좋은 시가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외다.”
그의 말에서 단순한 경쟁심에서 나온 청이 아님을 직감한 스님은 두말없이 글짓기 내기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금강산을 잘 아는 스님이 먼저 읊고 김삿갓이 대구를 다는 식으로 글짓기 내기가 시작되었다.
僧 :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 일고(朝登立石雲生足)
笠 : 저녁에 황천샘의 물을 마시니 달 그림자 입술에 걸렸도다.(暮飮黃泉月掛脣)
僧 : 사람의 그림자는 물 속에 잠기어도 옷은 젖지 않고(影浸綠水衣無濕)
笠 : 꿈속에 청산을 올라가도 다리는 아프지 않다.(夢踏靑山脚不苦)
僧 : 산 위의 돌은 천년이나 굴러야 땅에 닿을 듯하고 (石轉千年方倒地)
笠 : 봉우리 한 자만 더 높았더라면 하늘에 닿았을 것을.(峰高一尺敢摩天)
僧 : 만리나 뻗은 가을 구름은 고기의 흰 비늘 같고(秋雲萬里魚鱗白)
笠 : 천년이나 묵은 고목은 사슴뿔처럼 높구나.(枯木千年鹿角高)
스님이 연이어 시구를 불러도 삿갓은 거침없이 대구를 달았는데 모든 구절이 앞뒤가 꼭 맞아 절묘한 대구를 이루었다. 마침내 스님은 글짓기 내기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끼던 시구를 마지막으로 띄웠다. 그러자 삿갓은 곧장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이에 응수하였다.
僧: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천지가 모두 희네.(月白雪白天地白)
笠: 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 시름도 깊네.(山深夜深客愁深)
스님은 김삿갓의 마지막 시구에 감동하여 그만 입을 벌린 채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삿갓이 빙긋이 웃으며 “왜 쳐다보기만 하십니까. 이빨을 뽑기엔 아직 이르지 않소이까?” 하고 너스레를 떠니, 스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신고?”
“김삿갓이올시다.”
“오라, 김삿갓! 소문에도 시에 귀신이라 하더니 이제 보니 과연 시선(詩仙)일세그려. 내 이 절에서 한평생을 지내면서 시 짓는 문객들을 수없이 맞이하였으나 언제 한번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그대를 만나보니 정말 즐겁기 그지없소그려.”
두 사람은 이 뜻깊은 상봉을 계기로 좋은 글벗이 되었는데, 김삿갓은 금강산을 찾을 때마다 그 스님과 함께 지내면서 금강산의 산천을 노래한 많은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낸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
- 금강산경(金剛山景)01-
若捨金剛景(만일 금강산 경치를 빼놓는다면)
靑山皆骨餘(푸른 산은 모두 앙상한 뼈만 남으리라)
其後騎驢客(그 뒤에 나귀 탄 나그네는)
無興但躊躇(흥취가 없어 다만 머뭇거릴 뿐이네)
01 김삿갓이 쓴 이 시는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외워 주신 시와 거의 같은데, 다만 첫 구절에 ‘약사(若捨)’ 대신 ‘보습(步拾)’이 쓰인 것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