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프루너 박사라는 서양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종말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자였습니다. 종말론에 의하면 세상이 종말할 시기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선과 악을 심판하시고 신천지를 연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도둑처럼 몰래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프루너 박사는 당시의 어지러운 세상의 상황을 보고 절대자 하느님이 혹시 벌써 왔다 가신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종교를 살펴보고 연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서양의 종교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하느님이 오셨다면 서양이 아닌 동양으로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여러 종교를 탐문하였지만 종교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아래에서는 설령 하느님이 오셨다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펼쳐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 일본의 여러 종교를 연구 조사하였지만 그곳에서도 하느님이 오셨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직 하느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독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지인의 권유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한국을 방문하였던 그는 한국에 여러 신종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오셨다면 기존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로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유대교 밖에서 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신흥종교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대순진리회의 구천상제님이신 강증산 성사님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느님이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는 도전님을 뵙고 『전경』을 연구하면서 대순진리에 크게 감화되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것에 너무나 기뻤던 그는 그 후 본국에 돌아가서 대순진리와 관련된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에게 한국 땅에 하느님이 강림하셨음을 열정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당시 이 교화 내용을 상당히 재미있게 들었다. 정작 한국인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에 하느님이신 구천상제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문데 벽안의 외국인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무나 엄청난 진리를 가깝게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외국의 전문 지식을 갖춘 학자는 이렇게 대순진리에 감화가 되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색안경을 끼고 볼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아마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편견 그리고 어설피 아는 얄팍한 지식때문이라는 해답을 스스로 얻기도 하였다. 제대로 아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 앎의 과정이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일수록 도의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도 가끔 교화나 도담에서 프루너 박사와 관련하여 위와 유사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교무부 연구위원이 된 후 연구를 하던 중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의 저서인 『서양인의 한국 종교 연구』에서 그의 정확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김교수는 프루너가 한국 신종교 전반에 걸쳐 다양한 글을 썼으며 주로 한국 사회에서 신종교가 어떻게 발전해 왔고 그 신종교들이 현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떤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01 실제 그가 쓴 몇 편의 논문들을 확인하였고 서울대 도서관을 검색하여 읽어볼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쓰인 것이라 비록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대순진리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프루너의 삶과 대순진리에 대한 연구
게르노트 프루너(Gernot Prunner)는 1935년 8월 2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02 비엔나대학교에서 중국어,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하였다. 1961년에 그는 국립대만대학교의 인류학과 고고학 센터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독일의 마인츠대학교에서 인류학과 중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에는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의 큐레이터 및 동양부장(東洋部長)이 되었다.
그의 다방면에 방대한 지식을 갖춘 호기심 많고 열정으로 가득 찬 학자였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일본과 중국의 종교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앞에서 언급한 교화에서처럼 1965년 그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종교와 예술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일본에 하느님이 오심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의 종교를 연구하였는지는 그의 생애에 대한 자료에서는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겠다. 다음 해인 1966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소수민족과 민간신앙에 대해 연구하였고 이듬해에 그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즈음 그는 전 세계에서 신흥종교가 활발하게 생성되고 있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디에선가 아마 적어도 또 다른 한 사람의 예언자가 참된 메시지를 받았다고 확신해서 또 다른 종교가 태어나고 있다고 하였다.03 1976년에 프루너는 독일 폴크스바겐재단의 후원을 받고 한국의 신흥종교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가 대순진리회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바로 이때쯤인 것 같다. 이 해에 도주님 탄강치성에 대해 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논문의 영어 제목은 「The birthday of God: a sacrificial service of Ch?ngsan’gyo」04이며 코리아저널(Korea Journal)05에 실렸다.
프루너 박사는 이 논문에서 당시 한국에 300개가 넘는 신흥종단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 58개가 상제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큰 단체가 대순진리회라고 밝히고 있으며 상제님의 강세와 생애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또한 도주님의 감오득도, 무극도의 창도와 화천 그리고 도전님의 종통계승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대순진리회의 교리, 의례 및 체계, 영대의 15신위, 치성일과 치성의 의미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논문의 중반에서는 도주님 탄강치성의 절차와 각 절차의 의미에 대해서 사진 자료를 곁들여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그는 양력으로 1976년 1월 4일에 치성에 참석하였으며 당시 500명의 도인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사진 자료가 흐려서 명확한 분별은 어렵지만 진설, 분향, 고유, 음복에 관한 4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분향과 고유를 하시는 분은 도전님이신 듯하다. 이렇게 도장에서 치성 모시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허락이 있으셨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논문의 결론에서 프루너 박사는 대순진리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요인에 대해 자신의 시각에서 주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대순진리회의 특질이자 장점은 민족주의(emphasis on nativism), 메시아적 개념(messianic ideas), 현세지향적(concentration on the present), 도술에 대한 믿음(belief in magic), 도통 개념(concept of enlightment), 조직의 효율성(efficiency of organization), 위계적 구조(hierarchical structure), 정교한 의례(elaborate ritual), 관용적 태도(attitude of tolerance) 등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공한 종교는 시작, 발전, 분열, 팽창의 단계를 거치는데 대순진리회가 이 단계를 잘 지났고 양적인 성장을 위해 그리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교리의 정교화, 지식인층 신자의 확보, 현대사회의 변화 흐름에 적응 등의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는 권고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해에 『세대』라는 잡지에 「신흥종교는 사교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인들이 불교, 기독교는 보편종교로 인정하고 그 외의 신흥종교는 사교나 사이비로 보는 편견이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정말로 혹세무민하는 사교가 있을 수 있지만 불교나 기독교가 아니라고 무조건 사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06 2년 뒤인 1978년에는 『증산사상연구 제4집』에 「세계 신흥종교 동향과 증산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상제님의 가르침은 현대 문명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 특질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음 해인 1979년에 제1회 한국학 국제학회(The 1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studies)에서 「The new religions in Korean society(한국의 신종교)」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세계 학계에 한국의 신종교를 알렸다.
1980년 그는 독일로 돌아가 함부르크 박물관에서 다시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다. 짧았던 한국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는지, 그는 박물관 내에 한국 신종교 자료센터를 세워 운영하였다. 그가 논문의 제목에서 ‘한국 신종교’라는 명칭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내용을 보면 대순진리회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신종교 자료센터라는 것도 대순진리회를 소개하는 것이 주가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학계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본국에 돌아가 박물관 내에 따로 상설 부스를 마련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그의 행적을 보면 분명 앞서 언급한 교화에서처럼 대순진리에 깊게 감화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그 후 그는 한국의 민속과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많은 연구 성과를 냈다. 이것은 아마 대순진리에 감화되었던 그가 점차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루너 박사는 1980년까지 왕성한 학문 활동을 벌이다 이듬해에 병을 앓고 다리를 절단하게 되는 불운을 겪는다. 비록 휠체어 신세가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자료를 모아 개인 도서관을 소유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2002년, 뛰어난 인류학자이자 동양학자이며 대순진리에 감화되었고 한국을 사랑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적지 않은 세월동안 전 세계의 종교현황을 살피며 하느님의 강림하심을 살피다 마침내 한국 땅에 내려오심을 확신하고 세계 학계에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박물관까지 열었던 프루너 박사의 열정과 노력! 그의 바람대로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우리도 열(烈)과 성(誠)을 다하여야겠다.
01 김종서, 『서양인의 한국 종교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pp.77~78.
04 이 논문의 제목을 번역하면 ‘신의 생일: 증산교의 희생 의례’가 된다. 프루노 박사가 논문의 제목에 증산교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 논문의 내용은 대순진리회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은 도주님을 ‘생일(birthday)’은 도주님의 탄강일을 의미하고 있다.
05 1961년 9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창간한 한국학 영문 학술지. 한국학의 전 세계적 보급과 한국학 연구 진흥을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1991년부터 계간지로 전환하여 전문 학술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998년부터는 기존의 전통적인 한국학 연구에서 탈피하여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한국학 저널로서의 위상을 세우고 있다. 전 세계 180여 개 국가의 한국학 관련 연구기관과 대학 및 유네스코 관련 기관에 배포되고 있다.
06 이와 관련하여 전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교수는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이라는 연구서를 펴냈다. 이 책에서 윤이흠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을 훼손하기 위해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마침내 말살시켰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한국의 종교를 종교와 유사종교의 이분법으로 구분하였으며 민족종교에게 유사종교, 즉 사이비종교라는 굴레를 씌우고 낙인을 찍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이 해방이후에도 지속되어 한국인의 종교 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