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낳고 만물을 생산하는 천신(天神)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극한 정성으로 표출했던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인류 보편의 종교행위이자, 우리 한민족의 정서(情緖)와 신앙을 형성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그 의식은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에 하강하여 신시(神市)를 열고 제(祭)를 올렸던 것을 필두로, 점차 온 나라 백성들이 거국적으로 모여 함께하는 제의(祭儀)인 국중대회(國中大會)의 형식으로 계승되었다. 곧 부여(夫餘)의 ‘영고(迎鼓)’나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신라의 ‘신궁제사(神宮祭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은 당시 정치·문화 현상의 존재양태와도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고려시대 이래 점차 약화·소멸되어갔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제한되고 위축된 제천의식의 흔적을 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때는 국중대회는커녕 유교적 질서와 명분에 따라 고려 때까지 거행되었던 원구단(圜丘壇)의 제천의식마저도 지속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측면에서 음사(淫祀)01로 규정되어 그 어떤 제천의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왜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이 음사로 규정되어 자신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가 큰 영향을 끼쳤다.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여러 나라의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해 조선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군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나, 통일신라가 당(唐)나라라는 외세에 의존해서 스스로를 중국의 제후(諸侯)의 위상으로 한정한 뒤부터 우리의 사전(祀典: 국가적인 규모의 제사에 관한 절차와 의식)체제는 유교식 예법을 따르기 시작한다. 더욱이 고구려 말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이 새롭게 대두되고, 명(明)나라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천자의 예제(禮制)를 강요하기에 이른다.02 여기에는 오직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만이 지낼 수 있는 천제(天祭)를 제후국인 고려가 거행할 수 없는 음사임을 지적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성리학적 시각을 가진 호족들의 세력도 고려의 제천의식을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중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승로(崔承老, 927∼989)이다. 『논어(論語)』·『좌전(左傳)』·『예기(禮記)』 등 유교의 경전을 빌어 유교의례와 맞지 않는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그래도 고려 초기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려는 우리의 제천의식을 계승하거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측면이 있었다. 문제는 고려 말부터,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천의례 자체가 아예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유교의 이념이 모든 영역에 철저하게 적용되고 나아가 중화주의체제에 완전하게 편입되었음을 의미했다.03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성리학이 국시(國是)가 되면서 유교의 의례는 확고부동한 위상을 갖게 되었고, 길례(吉禮)04의 서열적, 수직적 성향도 더욱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고려 성종(成宗, 960~997) 이전부터 시행되어 온 원구단[圜丘壇, 혹은 환구단(圜丘壇)]이었다. 전형적인 원구는 유교에 입각한 국왕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드러내며 여기에 현실적인 기곡(祈穀)·기우(祈雨)의 기능까지도 부가된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 제후국은 천제를 올릴 수 없다는 유교의 원칙론에 따라 조선 초 무렵 한재(旱災) 시에 부정기적으로 거행되는 기우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의미가 축소된 것이 세종(世宗, 1397∼1450) 때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바탕한 본격적인 유교식 예법 정비과정에서 원구는 참례(僭禮: 지나친 예의)라는 인식이 커졌고 결국 세종 20년(1438)을 즈음하여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단적인 예를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천신에 제사하는 제례가 있어서 원단의 의식을 세우고 여러 해 동안 제사를 거행하다가, 제후국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그만두고 시행하지 아니한 지 이미 여러 해이옵니다(我朝曾有祀天之禮 立圓壇之儀 累歲行事 乃以偉候度之故止而不行 已有年矣 唯此風雲雷雨之壇).”
세조(世祖) 1457년에 이르러 원구는 다시 복구된다. 혁명을 통해 집권했던 세조가 천명을 빌어 집권을 정당화하고 왕권을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원구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식층이라는 사대부들이 제후의 예가 아니라는 명분을 들먹이면서 거듭 폐지를 주장한다. 결국 조선의 각종 의식 절차와 예법이 기록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조차 원구가 배제되고,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극한 정성으로 표출했던 제천의식은 세조 말에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렇다면 세조 이후 제천의식은 공백기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천신께 드렸던 관성(款誠, 극진한 정성)의 정서와 그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국가적인 차원에서 원구단의 제천의식은 아니지만 그에 준한 행위가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었다. 가령 길례(吉禮)의 하나인 중사(中祀)에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05의 제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고신인 천신에 대한 제천의식이 아니라 풍운뢰우와 같이 천신의 범주와 계열에 속하는 기능신을 제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제한적인 행사였다. 하지만 민간차원에서는 산신제(山神祭) 성격의 마을신앙에서 천신의 제사가 간접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태곳적 ‘단군신화(檀君神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壇樹)에 강림한 것과 천손(天孫)인 단군이 사후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어 후대인들에게 숭배되어 산신화(山神化)된 것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은 가신(家神)의 으뜸인 상량(上樑)06처럼, 하늘을 대리하는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산신은 소우주화된 천신으로 간주되었다. 이때 제주(祭主)는 천군의 뒤를 이은 무당이었다. 국가차원의 천제를 왕이 주관했다면, 민중차원의 천제는 무당이 주관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간에서 거행된 산신제라 하더라도 그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의례적인 반란행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민간의 천제는 늘 감시와 탄압의 대상으로서 철저하게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올수록 민간에서 사적으로 행해졌던 천제가 반왕조적인 거사모의나 변란 획책의 구심점에 놓인다. 이들은 거사에 앞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자신들의 과업이 천의(天意)에 부응하는 신성한 일임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07 특히 반왕조적인 성격을 띤 데에는 당시 『정감록(鄭鑑錄)』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과 ‘십승지지설(十勝之地說)’ 출현도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유교의례가 도입되면서 천제에 지극한 정성을 드렸던 우리의 제천의식은 폐지 혹은 은닉되거나, 그 성격을 점차 달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패러다임을 바꾸는 개혁이 1897년 고종(高宗, 1863∼1907) 때 이루어진다. 그는 자주 독립에 대한 염원을 이룩하고자 중화사상에서 벗어난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이 깃든 원구단을 복원시키고, 나아가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왕을 황제라 부르고 국명조차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개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러·일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쇠한 조선을 노리고 있던 시기였기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몸부림은 허세가 되고 말았다. 한편 원구단 복원과 함께 당시 건재하던 유교사회의 통합력과 통제력마저 상실되면서, 산간(山間)의 천제뿐만 아니라 민족종교 교단의 제천의식이 공공연히 행해지기 시작한 점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곧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도들의 산간 제천의식이 그러한 것을 방증한다. 뿐만 아니라 동학운동을 비롯하여 시련에 빠진 민족의 구원을 추구하려는 여러 운동들의 활성화는 앞으로 다가올 후천선경(後天仙境)의 이상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그 주역을 담당하고, 한반도가 그 중심이 된다는 민족종교(民族宗敎)의 숨결을 태동시켰다. 민족종교는 이 땅에 배달겨레 의식이 나타나서 천신신앙을 표출한 순간부터 민족과 함께했고, 상고시대부터 제천의식이 이루어졌기에 민족종교의 원류는 태고에서 비롯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민족종교는 천신신앙의 정서와 망국의 위협에 휘말리던 19세기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종교적 실천이상의 맥락과도 상통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에 인간성 회복과 중화주의인 사대(事大)사상에 대한 주체성 확립에도 기여하였다. 이상 고조선 이래로 우리 고유의 천신신앙 속의 의례인 제천의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제천의식은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과 세계관의 바탕을 형성해 왔고, 온 나라 백성이 거국적으로 모두 함께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의 형식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면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식 제천의식이 들어오면서 더욱 약화되어 갔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가 지배종교이자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은 음사로 배척받아 폐지되고, 중화주의체제에 따라 우리의 주체성과 자주성마저도 상실하고 만다.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의 도전 속에서 스스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난다. 고종 무렵 원구단의 복원과 함께 민족주체성과 보국안민의 이념을 내세운 민족종교 교단의 활성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상제님께서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공사 3장 18절)고 하신 말씀처럼, 중국은 우리나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조공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보은(報恩)의 결과로 우리나라가 대중화가 됨을 시사한 것이 아닐까 사료된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천손(天孫)의식은 민족혼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실한 생명력과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최고의 신격이자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여겨 정성과 예로써 보은하려는 순수한 의지를 제천의식을 통해 발현했기 때문이다. 곧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교법 3장 22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은 거짓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의지에 대한 말씀이라 여겨진다. 그러한 의지가 바로 민족종단으로서의 대순진리의 사상 속에 이어져 온 것이라 하겠다. 단순한 신종교가 아닌 태곳적 민족혼이 깃들어 오늘날 다시 빛을 바라는 민족의 얼 그것으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만수도인들이 오늘도 그렇게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제님의 품 안에서 하늘을 믿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김용환,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와 신종교』, 신종교연구, 2012. 박미라, 『삼국 · 고려시대의 제천의례와 문제』, 선도문화, 2010. 신익철, 『대사, 중사, 소사의 실증적 연구 - 천제와 산천제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 이지영, 『한국의 신화 이야기』, 사군자, 2003. 전영배, 『땅 끝 하늘 끝의 의미 』2, 한글한자문화, 2006 정경희, 『한국의 제천 전통에서 바라본 정조대 천제 기능의 회복』, 조선시대사학보, 2005. 최종성, 『숨은 천제, 조선후기 산간제천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종교학회, 2008. 황패강, 『한국신화와 천신』, 단국대학교 어문논집, 1998. 『한국민속대사전』, 민족문화사, 1993. 『한국민속의 세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7.
01 제사 드려서 안 되는 제사를 음사라고 한다. 이는 귀신에게도 제사를 드릴 정당한 임자가 정해져 있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종묘사직, 명산대천의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주체는 오직 그 나라의 국왕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제사는 국왕이나 국왕의 대리자만이 지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지내지 못한다. 일반인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그 직계 자손만이 지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지내지 못한다. 이는 다른 사람이 제사지낼 수 있는 귀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가 제사지낼 귀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제사를 지낸다면 이는 음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02 ‘천자(天子)’라는 칭호가 보여주듯 예로부터 중국도 천제(天帝)의 아들이 천제의 명령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고방식이 철저했다. 더욱이 천제가 우주의 중심에 있듯, ‘천자’ 역시 천하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화(中華) 이외에는 모두 이적(夷狄)이라 구분하고, 중국의 ‘천자’가 모든 이민족을 교화하여 세상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제후국에 정착시킨다. 당시 강대국이던 명나라 역시 그런 세계관을 토대로 고려를 한 나라가 아닌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예속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03 “자기가 섬길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논어』), “귀신은 자기 족속이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좌전』), “음사는 복을 받지 못한다.”(『예기』) 등의 구절을 근거로 제시했다. 04 오례(五禮)의 하나.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와 관련된 것이나 혼례 등 경사와 관련된 의례가 속한다. 05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국가 길례(吉禮)의 하나인 중사(中祀)로, 매년 춘추 중월(春秋仲月) 상순에 정1품관의 주관으로 제사하는 단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세조, 중종, 숙종, 영조, 고종 등의 역대 임금이 가뭄이 극심하던 때에 친히 이 단에 치제(致祭)를 행했다고 한다.
06 성조(成造) 혹은 마룻대에 존재한다고 해서 상량(上樑)이라고도 하는데, 가신(家神) 중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택의 본채를 담당하여 지키는 신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집의 건물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모든 운수를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그 가정을 총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가장 즉 대주(大主: 세대주)를 상징하고 그 수명과 운수까지를 담당한다. 그러기에 성주신은 집안에서 가장 신성시되고 최고 상위가 되는 상량에 봉안되어 있다. 07 인조 24년(1629) 역모의 괴수로 지목되었던 김승인(金承仁)이 “흉서를 만들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지냈다.”라는 혐의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숙종과 경종 때에도 수차례 거사모의를 한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