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은 본래 『예기(禮記)』에 속해 있던 편명인데 송대(宋代)에 주자(朱子, 1130~1200)에 의해 따로 편찬된 사서(四書) 중의 하나이다. 『중용』에서 나타난 ‘중용’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일반명사처럼 쓰이면서 그 의미가 통용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일이 한쪽으로 치우쳐 공정하지 못하게 되면 “중용을 지켜라”고 말하는데 이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라”는 것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서양철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윤리적 덕목으로서 몇 가지 선(善)의 덕(德)을 제시하면서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는 적절한 중간 상태의 덕성을 얘기하고 있다.01 그러나 『중용』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용’의 개념은 좀 더 다양한 측면을 내포한다. 김용옥은 ‘중용’의 개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처럼 구체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지혜 그 자체가 원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02 또한 신정근은 ‘중용’의 개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중간의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기우뚱한 균형”이라고 표현하면서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을 넘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03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양극적 흐름 속에서 ‘중용’의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제시해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용』은 유학의 사상으로 주자의 해석에서 많은 철학적 논의들을 만들었다. 특히 ‘중(中)’이라는 개념을 핵심 키워드로 하여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내용들이 숨어 있고 마음과 관련된 중요한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성리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마음에 대한 부분을 중심으로 ‘성(性)’과 ‘정(情)’이 ‘중’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살펴보고 이것이 대순진리회에서 마음에 관한 논의로서 ‘안심(安心)’과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성리학(性理學)
중국의 유학은 크게 진(秦)나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진나라 이전은 유학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기본 문헌과 사상이 완성된 시기로 본다. 진나라 이후 한(漢)나라는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수립하였다. 수(隋)와 당(唐)나라를 거치면서 유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송(宋)나라 때 주자에 의해서 새롭게 정립된다. 남송시대의 유학자 주자가 북송시대에 흥기한 새로운 유학사상을 총정리하여 체계화한 이론체계로서 성리학이 나온 것이다. 이후 중국과 한국의 유학은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전개되며, 17세기 일본에 전래됨으로써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04
주자철학의 특징은 리(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만물을 이해하는 데 있다. 북송의 주렴계(周濂溪, 1017~1073), 장횡거(張橫渠, 1020~1077), 정이천(程伊川, 1033 ~ 1107)은 주자의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타난 우주의 원리와 생성 법칙은 이기론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정(靜)해지고, 고요해져 음(陰)을 낳는다. 고요함이 극한에 이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이 서로 간에 뿌리가 된다.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져 양의(兩儀)가 정립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화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가 생겨나고, 오기(五氣)가 순조롭게 펴져서 사계절이 운행한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05
『태극도설』에는 무극과 태극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無極而太極’이라는 첫 구절은 여주본부도장 포정문(布正門)의 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06 이러한 구절의 한문해석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접속사 ‘而’는 역접, 순접, 인과, 병렬관계 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주어를 상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자가 무극과 태극의 개념에서 ‘리’를, 음양과 오행의 개념에서 ‘기’를 생각했다는 것이다.07 주자는 세계를 운동하고 변화하는 현상계와, 그 형이상학적 근거가 되는 원리의 세계라는 이중 구조로 파악하였다. 마음의 작용과 천체의 운동을 관찰하고 역법(曆法)에 관한 문헌들을 연구하여 이와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근거를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순환적으로 운동하여 변화하는 현상계를 ‘기’로, 그 근거를 ‘리’로 규정하였다.08 ‘리’와 ‘기’의 개념은 사실과 가치의 측면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데, ‘리’는 사실적 측면에서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며 가치적 측면에서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당위적 근거가 된다. 성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이기론의 관점으로 마음을 해석하고자 하며, 마음을 ‘성’과 ‘정’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보는데 이를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 한다. 마음이 ‘성’과 ‘정’을 통합하고 있다는 뜻이다.09 여기서 ‘성’은 마음의 본체가 되며,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선천적인 이치로서 ‘리’와 같다고 봄으로써 ‘성즉리(性卽理)’라는 성리학의 명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2. 성(性)
하늘(天)이 명령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의 절차를 마름질 한 것을 가르침(敎)이라 이른다.10
하늘(天)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만들어낼 때에, 기(氣)로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또 부여하니, 명령을 함과 같다. 이렇게 되어 사람과 사물의 생겨남이, 각기 그 부여한 이치를 얻음에 따라 건(健) 순(順) 오상(五常)의 덕(德)으로 삼으니, 이것이 이른바 성(性)이다.11 유가경전에서 하늘(天)은 최고의 존재론적 개념으로 쓰인다. 하늘이 존재론적으로 만물을 만들어 내면서 음양(陰陽)이 생기고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화(火), 목(木), 수(水), 금(金)이 생긴다. 토(土)는 음과 양의 중(中)으로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니 오행(五行)을 구성하게 된다. 가치적 측면에서 ‘천’의 선(善)한 가치는 괘덕(掛德)12의 건(健)과 순(順)으로 나타나게 되고, 다시 건은 예(禮)와 인(仁)으로 순은 지(智)와 의(義)로 나타나게 된다. 신(信)은 중의 개념에서 나오면서 오상(五常)의 덕을 구성하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오상의 덕은 인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데 이를 ‘성’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은 순선한 하늘의 덕을 갖고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순선한 가치성에 대해 양심(良心), 천성(天性), 본심(本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13
그러나 ‘성’은 순선한 ‘리’ 자체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선한 정도가 모두 다르며 선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성’은 ‘리’와 ‘기’의 결합인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기’와 분리될 수 없다. 주자는 일단 ‘리’가 ‘기’와 결합하여야만 현실적인 사물의 본성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리’가 ‘기’와 결합하면, ‘기’의 맑고 탁한 정도에 따라 그 선함이 구현될 수도 있고 가려질 수도 있다. ‘리’가 인간 사물이라는 기질(氣質)에 부여되면서 ‘성’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기’에 의하여 한정을 받는 ‘리’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부른다.14 그래서 ‘성’은 ‘기’에 의해 가려진 ‘기질지성’과 ‘기’를 배제한 ‘리’ 자체인 순선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구분되는 것이다.15 여기서 기질지성은 사심(私心)의 개념과는 좀 다르다. 이러한 ‘성’의 차이에 대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좀 더 세밀하게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람의 본성과 타 존재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를 다룬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나 보통사람들의 마음과 성인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같으냐 다르냐를 다룬 ‘성범심동이논쟁(聖凡心同異論爭)’, 본래 사람들의 마음에 선과 악이 동시적으로 같이 있다고 보아야 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미발심체순선논쟁(未發心體純善論爭)’ 등이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는 ‘정’의 문제였다. 성리학적 틀에서 인간의 ‘정’에 대한 세밀한 논의는 중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3. 정(情)
성리학에서 ‘정’에 대한 논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독창적인 이론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통해서 정립되기 시작한다. ‘사단’과 ‘칠정’이라는 용어는 『맹자(孟子)』와 『예기(禮記)』에 나오며, 주자가 ‘사단’과 ‘칠정’을 함께 언급한 대목도 있지만 이를 하나의 학설로서 체계화한 경우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단’의 개념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이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본성이 발현된 정감으로 측은(惻隱)·시비(是非)·사양(辭讓)·수오(羞惡)의 마음으로 본다. ‘칠정’은 『예기』「예운(禮運)」편에 나오는 기쁨, 분노, 사랑, 두려움, 슬픔, 싫어함, 욕구(喜怒愛懼哀惡欲) 등 인간의 일반적인 정감 일곱 가지를 말한다. 그러나 ‘사단칠정론’에서 ‘칠정’은 『중용』에 나타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네 가지 감정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칠정’ 자체가 감정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 명사로서 숫자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사단’은 본성이 나타난 것으로서 순수하게 선한 ‘정’이고 ‘칠정’은 아직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정감이라는 점에서 양자가 구별된다.16 ‘사단칠정론’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이라는 ‘정’, 특히 ‘사단’을 이기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주자는 마음의 본체인 ‘성’을 이기론으로 설명하여 ‘성즉리’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학설을 정립하였으나, ‘정’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17 이에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은 직접적으로 ‘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퇴계는 고봉(高峯, 1527~1572)과 주고받은 논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단(四端)은 정(情)이고 칠정(七情)도 정이니 똑같이 정이다. … 자사가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다”라고 말한 성(性)과, 맹자가 “성은 선하다”라고 말한 성은 ‘가리켜 말한바’가 어디에 있는가? 리(理)와 기(氣)가 부여되어 있는 가운데 나아가 이 리의 근원과 본연의 자리를 가리킨 것이다. 그 가리키는 바가 리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선하여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기를 겸해 말하고자 한다면 이미 성의 본연이 아니다. 기와 섞어서 성을 말한다면 성이 본래 선함을 볼 수가 없다. … 내가 정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성에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18 퇴계는 ‘리’와 ‘기’는 본래 어느 경우에나 함께 있어서 구별해 말하기 어렵지만 말하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리’와 ‘기’의 구분이 있는 것이고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개의 다른 명칭이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에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있는 것처럼 ‘정’에도 순수하게 ‘리’를 근원으로 부여된 ‘사단’과 ‘기’가 섞여 있는 ‘칠정’이 있게 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단(四端)의 정(情)은 리(理)가 발(發)함에 기(氣)가 따른 것으로 본래 순선(純善)하고 악(惡)이 없으니, 반드시 리가 발하여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려진 뒤에야 흘러가서 불선(不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칠정(七情)의 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탄 것으로 이것 역시 불선함이 없으나 만약 기가 발하여 절도에 맞지 않아서 리를 멸하게 되면 방종하여 악이 된다.19 퇴계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리’가 아니라 ‘사단’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순수선성(純粹善性)의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는 일이 과제였다. 이발설은 ‘리’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제시된 명제였던 것이다. 즉, ‘사단’의 순수선의 논거를 절대선인 ‘리=성’에 정초시키기 위해 ‘사단’을 이발(理發)로 규정한 것이다.20 이와 같이 퇴계의 ‘사단칠정론’의 핵심은 ‘리’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있다. 그러나 율곡은 이를 정면에서 비판한다.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는 이유는 리(理)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리가 아니면 발하는 바가 없다. … 만약 보내온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기(理氣)가 서로 발한다”고 한다면 두 개의 존재가 되어서 각각 가슴 속에 뿌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 “혹 근원한다”고 하는 것은 리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요, “혹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기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지 당초에 이기의 두 묘맥이 있는 것이 아니다.21 ‘리’와 ‘기’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며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근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율곡의 주장이다. 이것을 그는 ‘이기불상리지묘(理氣不相離之妙)’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기가 떨어질 수 없는 ‘불리(不離)’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섞일 수 없는 ‘부잡(不雜)’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고 있다. 그는 ‘리’와 ‘기’의 관계를 ‘일이이(一而二)/이이일(二而一)’이라는 간단한 수식으로 나타내고 이것을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불렀다.22 율곡은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이기가 두 개의 존재로 되며 마음에 두 개의 근본이 있게 된다”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이며 이것은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도 ‘기발이이승지’로써 이발(理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23 이에 따라 율곡은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보게 된다.
대게 사람의 성(性)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다섯 가지 이외에는 성이 없고, 정(情)에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일곱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일곱 가지 이외에는 정이 없다. 사단이란 것은 선한 정의 별칭에 불과하니 칠정을 말하면 사단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요 인심(人心), 도심(道心)과 같이 상대적으로 이름 지은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사단(四端)은 도심만을 오로지 말한 것이요,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쳐서 말한 것이니, 인심과 도심이 양변으로 나누어진 것과는 다르지 아니한가?24
‘정’은 ‘칠정’뿐으로서 ‘사단’은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선한 ‘정’만을 척출해 낸 것으로 보는 입장이 율곡 ‘사단칠정론’의 핵심이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정감으로 규정하였다고 한다면 율곡은 이 두 가지 ‘정’을 가치론적 차원에서의 구분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통합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 율곡은 ‘인심’과 ‘도심’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단’과 ‘칠정’이 하나의 ‘정’인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두 개의 마음임을 인정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25 도심(道心)은 순연(純然)한 천리(天理)이므로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으며 인심(人心)은 천리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이를 테면 먹어야 할 때 먹고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성현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천리요, 식색(食色)의 생각으로 인하여 나중에 악이 된다면 이것은 인욕이다.26 율곡은 ‘인심’과 ‘도심’은 다 같이 ‘리’에 근거한 ‘기’의 발동인데 다만 그것이 무엇을 위하여 발동했는가라고 하는 지향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인심’과 ‘도심’은 그 근원을 같이 하기 때문에 대립적인 두 가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통로를 본질적으로 갖고 있다. ‘도심’은 천리일 뿐이고 ‘인심’에는 천리와 인욕이 동시에 있다. 천리와 인욕의 차이란, 예를 든다면 마땅히 먹어야 할 경우에 먹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경우에 먹거나 또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과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욕으로 흐르기 쉬운 ‘인심’을 ‘도심’에 의하여 절제한다면 ‘인심’이 또한 ‘도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27 이러한 주장들은 성리학설에서 세계를 ‘대립적 구조’로 파악하는 입장과 이에 대응하는 ‘통합적 구조’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명시해 준다. 퇴계는 ‘사단/칠정’, ‘인심/도심’, ‘리/기’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에 반하여 율곡은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보고, ‘인심’과 ‘도심’을 근원은 하나인데 흘러서 둘이 된 것이라고 규정한 다음에 이를 논거로 ‘인심’과 ‘도심’이 상호 전화(轉化)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율곡이 인간의 마음을 통합적 구조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28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논의는 마음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출된 ‘정’의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선의 실천을 이룰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은 절제되어야 그것이 선이 될 수 있으며 절제의 기준으로 ‘중’의 개념이 제시된다. 성리학에서 ‘중’의 문제는 마음과 관련되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4. 중용(中庸)
마음과 관련된 ‘중’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는 『서경(書經)』의 서문에 언급이 된다. 상제님께서는 “서전(書傳) 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 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 관통한다.”29고 말씀하신 바 있다. 도에 통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서전서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서경(書經)』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二帝)·삼왕(三王)의 정치는 도(道)에 근본하였고 이제·삼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면 도와 정치를 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요,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움은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서로 전수한 심법이다. 덕(德)과 인(仁)과 경(敬)과 성(誠)이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니, 모두 이 마음의 묘함을 밝힌 것이다.30
요순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도 요·순의 도(道)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이상적 군주로 회자한다.31 도에 근본을 둔 정치는 요·순·우의 심법(心法)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일집중’에서 핵심키워드는 ‘중’이 된다. 정(精)과 일(一)이라는 마음의 과정이나 조건을 통해 ‘중’을 잡는 것이다. 도(道)에 근본을 두고자 한다면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서 ‘중’이 얘기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의 서문에서 주자는 『서경』에서의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경서(經)에 나타난 것으로는 “진실하게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함은 요임금이 순에게 전수하신 말씀이다.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하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오직 은미하기만 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해야만 진실하게 그 중을 잡을 것이다(允執厥中)”라고 함은 순임금이 우에게 전수하신 말씀이다.32
이와 같은 ‘중’의 개념은 『중용』의 본문내용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첫 번째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중’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통하는 도이다.33
주자는 기본적으로 ‘중’을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과함과 부족함이 없음을 이름 하는 것이다”34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중’에 대한 개념 정의 아래 주자는 위 본문 내용에 대한 주석으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말하고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나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니, 치우치고 기울어짐이 없는 까닭에 중(中)이라 이른 것이다.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음(發皆中節)’은 정의 바른 것이니, 어긋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화(和)라 이른 것이다. ‘큰 근본(大本)’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령한 성품이며, 천하의 이치가 모두 여기서부터 나오니 도의 본체(體)이고 ‘통하는 도(達道)’라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며, 천하의 예와 지금이 함께 따르는 것이니, 도의 작용(用)이다.35
‘중’은 마음과 관련된다.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른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정’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중’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마음의 순선한 본연의 ‘성(性)’과 연결된다. 그리고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표출된 ‘정’의 상태가 ‘중절’함을 말하는 것으로 “편벽과 치우침이 없고 과함과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는 ‘중’의 특성으로 ‘정’을 절제함을 말한 것이다. 특히 일어난 정감이 절도에 맞게(中節) 되었을 때 즉, ‘정’이 ‘중’으로의 절제 되었을 때 그것은 바르다고 하는 선의 가치기준이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자의 해석을 통해 마음을 나타내는 ‘성’과 ‘정’이라는 개념이 ‘중’과 관련되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중’의 개념은 그것을 통해서 ‘중용’의 의미를 가름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중용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평상의 이치니, 곧 하늘이 명령한 당연한 것이며, 정밀하고 은미함의 극치이다.36
‘중용’의 정의는 치우침이 없이 과불급이 없으며 하늘이 명한 ‘성’으로서 정밀하고 은미함의 극치로 얘기되고 있는데 이는 곧 ‘중’의 개념 속에서 확인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37 그러나 ‘중’의 치우침이 없고 과불급이 없는 상태는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중’은 상황에 따라 극단과 치우침이 인정된다.38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고 소극적이어야 할 때 소극적인 것이 ‘중’이 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내용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여야 되느니라.39
성인과 영웅은 어떤 측면에서 대비되는 인간상일 수 있으나 상황과 주제에 맞게 각각의 극단적 인간상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제님의 말씀 속에서 ‘중’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으니 짧은 말씀 한마디 속에 숨겨진 오묘한 이치를 발견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용’의 개념에서 특별히 ‘중’과 관련하여 ‘안심’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5. 안심(安心)
먼저 ‘안심’의 대상이 되는 마음에 대해서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음이란 귀신(鬼神)의 추기(樞機)이며 문호(門戶)이며 도로(道路)이다. 추기를 열고 닫고 문호를 들락날락하며 도로를 오고가는 신(神)에는 혹 선(善)한 것도 있고 혹은 악(惡)한 것도 있다. 선한 것은 스승으로 삼고 악한 것은 고쳐 쓴다.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天地)보다도 크다(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40
이와 같은 말씀에서 인간의 마음은 신(神)이 드나들고 있는 도로와 같다는 원리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단순한 측면에서 신은 환경과 대상에 응하여 있는 기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신이 나의 마음에 드나든다는 것은 마음이 환경과 대상에 감응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물과 환경, 대상에 감응하여 생기는 마음의 문제를 내 스스로 다루는 것은 마음에 드나드는 신을 선택하는 길이 된다. 마음을 신이 오고가는 길이라고 보는 기본적인 원리성을 토대로 대순진리회에서는 마음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안심’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안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의 행동(行動) 기능(機能)을 주관(主管)함은 마음이니 편벽(便辟)됨이 없고 사사(私邪)됨이 없이 진실(眞實)하고 순결(純潔)한 본연(本然)의 양심(良心)으로 돌아가서 허무(虛無)한 남의 꾀임에 움직이지 말고 당치 않는 허욕(虛慾)에 정신(精神)과 마음을 팔리지 말고 기대(企待)하는 바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도록 항상(恒常) 마음을 안정(安定)케 한다.41
‘안심’을 이루기 위한 마음상태의 전제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편벽(便辟)됨이 없고 사사(私邪)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된 본연의 양심(良心)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내용을 성리학에서 마음의 ‘성’, ‘정’과 관련된 ‘중’의 문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편벽과 사사되지 않도록 하는 것의 일차적 문제를 ‘정’을 ‘중’으로의 절제라는 공식에 대입해 볼 수 있다. ‘정’은 마음이 나에게 인식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희노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가 ‘중’으로서 순선한 것처럼 ‘정’의 상태는 마음에서 발동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 아닌데 치우침과 과부족이 생기면서 사심으로 흐르게 된다. 편벽과 사사됨은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 상태에서 스스로의 절제가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절제의 기준은 ‘중’이 된다. 마음이 사물과 응해 ‘정’으로 표출될 때는 과불급이 없이 표출되는 알맞은 ‘정’의 단계가 ‘중’이 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정’의 문제에 있어서 ‘중’으로 절제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계신다.
처세에 귀한 것은 부드러움이요 강하고 굳건한 것은 화(禍)의 기초가 된다. 말을 할 때는 늘 더듬듯이 하라. 일을 당하여 당연히 어리석은 듯하라. 위급함(急地)에 있어서는 항시 느린(緩)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安時)에는 위태한(危) 것을 잊지 말라. 한 평생을 이 계책에 따른다면, 진정한 호남아(好男兒)이니라(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癡 急地尙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皆好男兒).42
사람의 다양한 감정들은 세밀하게 표현될 수 있지만 아주 단순하게 나눈다면 좋음과 싫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과부족이 발생하여 중절이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치우치지 않는 절제가 요구되는데 “위급함에 있어서는 느린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는 위태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은 ‘정’으로 표출된 나의 마음을 치우치거나 과부족이 생기지 않도록 ‘중’으로 절제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진실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으로 이는 하늘에서 부여 받은 인간의 ‘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중’은 희노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의 본질적인 가치로서 ‘성’과 연결된다. 따라서 양심의 회복은 ‘중’의 회복 그 자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의 개념에 대입해서 ‘중’을 생각해 볼 때, ‘정’으로 표출되지 않은 마음 안에서 과불급이 없는 단서로서 의미를 갖는다. ‘성’은 본질적으로는 ‘리’와 같고 선의 가치인 오상(五常)의 덕과 같으며 ‘정’으로 표출될 때는 ‘사단(四端)’으로 나타난다. 상제님께서는 오상의 덕 자체에 대해서 ‘중’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 언급을 하고 계신다.
치우쳐서 사랑하고 치우쳐서 미워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인(仁)이라 하고, 전부 옳고 전부 그르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의(義)라 하고, 오로지 힘쓰고 오로지 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예(禮)라 하고, 방자하게 귀 밝고 방자하게 눈 밝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지(智)라 하고, 넘치게 견주고 넘치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신(信)이라 한다(不受偏愛偏惡曰仁 不受全是全非曰義 不受專强專便曰禮 不受恣聰恣明曰智 不受濫物濫欲曰信).43
인의예지신은 오상의 덕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천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이 된다. 때문에 ‘성’은 마음의 본체가 되며 인간이 선할 수 있는 근원적인 근거가 된다. 인간이 양심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천성이나 본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위와 같이 대비적인 개념들을 제시하여 그것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서 오상의 덕에 대해 개념정의를 하고 계신다. 이러한 개념정의는 ‘중’의 가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오상의 덕 하나하나가 ‘중’의 가치 기준 속에서 정의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구성하는 두 가지를 ‘성’과 ‘정’으로 보았다. ‘성’은 하늘이 부여한 순선한 양심 그 자체이며, 상황과 대상에 응해서 생기게 되는 마음의 상태인 ‘정’은 정감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마음의 ‘성’과 ‘정’에는 중요한 기준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중’의 개념이다. 형이상학적 도(道)와 ‘리’의 순선한 가치를 따르기 위해서는 ‘중’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에서 ‘중’은 편벽과 치우침이 없고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가치이다. 또한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은 양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러한 ‘중’의 가치는 ‘안심’의 “편벽됨이 없고 사사됨이 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라”는 정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편벽되지 않고 사사롭지 않는 것은 마음이 표출되는 ‘정’의 차원에서 ‘중’을 통한 절제로,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중’의 가치를 지니는 ‘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각각 그 의미를 대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음에서 ‘중’의 절제는 우리가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으로 삼아야 하는 ‘안심’에서도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성리학적 사유 속에서 ‘중용’의 개념을 통한 마음의 이해는 ‘안심’을 이해하는 데 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전경』 •『대순진리회요람』 •『대순회보』127호.
•『太極圖說』 •『朱子語類』 •『栗谷全書』 •『退溪集』 •『中庸』 •『書經』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2012. •김수길 역, 『집주완역-중용』, 대유학당, 2008. •성백효 역주, 『서경집전』, 전통문화연구회, 1998. •신정근,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사계절, 2010.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홍석영 역, 『니코마코 스 윤리학』, 풀빛, 2005. •최영진 외, 『한국철학사』, 새문사, 2010. •최영진, 『e시대의 절대사상-퇴계 이황』, 살림, 2007. •퇴계, 이광호 역, 『성학십도』, 홍익출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