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경감을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에 임명했는데, 이때 경감의 나이 23세였다. 경감은 표기대장군 경단, 강노장군(彊弩將軍) 진준과 함께 오창(敖倉)에서 염신(厭新)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26(건무 2)년에 광무제는 경감을 호치후(好畤侯)에 봉하고 호치, 미양(美陽) 두 현(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27(건무 3)년에 연잠(延岑, ?-36)01이 무관(武關, 陝西省 商縣 동쪽의 관문)에서 나와 남양(南陽)을 공격하여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두홍(杜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연잠에게 동조했다. 경감이 양에서 연잠과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3천을 처단했다. 이때 반군의 장수와 사졸 5천여 명을 생포했으며 인수(印綬) 3백 개를 획득했다. 두홍은 항복하고 연잠은 부하 몇 명과 함께 동양(東陽)으로 도주했다.
경감이 광무제의 용릉(舂陵) 순시를 수행하다가 광무제에게 진언했다. 그는 상곡(上谷)으로 가서 아직 징발되지 않은 병력을 수습하여, 어양의 팽총과 탁군(涿郡)의 장풍(張豊)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평(富平), 획삭(獲索)을 수습하고 동쪽으로 장보(張步,?-32)02를 공격하여 제(齊) 땅을 완전히 평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광무제가 경감의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지만, 과연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후한 개국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천하대란 속에서 겨우 자신들의 터전을 확보한 것에 불과한 창업 초기에 경감의 계획은 당시로서는 희망사항으로 여겨질 정도로 거창했기 때문이다.
28(건무 4)년에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경감으로 하여금 어양으로 진공케 하였다. 그러나 경감은 자기 아버지와 팽총이 함께 일했던 처지이며 자신의 형제들 가운데 경사(京師, 서울 이때는 洛陽)에 머물고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머뭇거리며 홀로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경감이 상서하여 낙양으로 갈 것을 청했다. 경감이 주저한 것은 당대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총사령관이 정벌에 나설 때 보통 그 처자들이 서울에 남게 된다. 이때 후방에 남겨진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질이었다. 동맹 체결과 강화 협상에서도 상호 인질 교환은 관례적인 일이었고, 동맹 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하는 의미에서 정략결혼도 드물지 않았는데 이 또한 협약을 체결한 당사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또 다른 형태의 인질 교환이었다. 아무리 서로를 신뢰하는 군신관계라고 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원정군 사령관과 서울에 있는 군주 사이를 이간질하는 경우는 허다했으므로 여기에 대비하는 의미에서도 서울에 가족 중 누군가 인질로 남아 있거나 또는 그에 상응한 조처가 필요했다. 경감의 상서에 관한 광무제 반응이 흥미롭다. 광무제는 경감의 상서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군의 집안은 모두 나라를 위해 일했고, 가는 곳마다 적들을 물리쳐 그 공적이 매우 현저하거늘 어찌 꺼리고 의심하여 이곳으로 오시려고 하오? 왕상(王常)과 함께 탁군에 주둔하면서 앞으로의 계책이나 잘 생각해보시오.”
광무제는 경감의 가문 전체가 보여준 노고에 전폭적인 신뢰를 표명하면서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군주의 입장이 그렇다고 해도 신하된 입장이 군주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모를 수 없었고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는 경서(耿舒)의 동생 경국(耿國)을 낙양으로 보내 광무제를 모시게 했다. 궁정에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 숙위(宿衛)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다. 광무제는 자신의 조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삼가고자 한 경감과 경황의 처신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광무제는 경황을 진급시켜 유미후(隃麋侯)에 봉하고 경감에게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 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과 함께 망도(望都), 고안(故安)에 있는 서산적(西山賊)의 10여 영(營)을 공격케 했다. 경감은 이들 모두를 격파했다.
이때 정노장군(征虜將軍) 좨준은 양향(良鄕, 하북성 房山縣)에, 효기장군(驍騎將軍) 유희(劉喜)는 양향(陽鄕, 하북성 탁현 동쪽의 양향정)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탁군에 소속된 현이었다. 이들이 탁군에 주둔한 이유는 팽총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양태수 팽총은 원래 경황과 더불어 광무제의 즉위에 공이 큰 인물이었다. 그런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이때는 광무제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팽총이 그의 아우 팽순(彭純)에게 흉노병 2천여 기를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두 길로 나누어 좨준과 유희를 공격하였다. 흉노의 기병이 군도(軍都)를 지날 때 경서가 그 무리들을 격파하고 흉노의 두 왕(王)을 베어버리자 팽총은 퇴주했다. 경황이 다시 경서와 함께 팽총을 공격하여 군도를 탈환했다. 이렇게 경감의 가문은 후한 창업기에 큰 공을 세웠다.
29(건무 5)년에 팽총이 죽자 광무제가 광록대부(光祿大夫) 번굉(樊宏)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경황을 맞아들이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그의 공을 치하했다.
“오직 경황이 대공을 세웠는데 감찰(監察)에 종사하게 함은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변방에 있는 군(郡)은 춥고 고생스러우니 오래 거주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행재소로 오라.”
경황이 경사에 이르니 광무제는 그에게 갑제(甲第)03를 하사하고 봉조청에 임명하여 조정에 행사가 있으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경서를 봉하여 모평후(牟平侯)로 삼았다. 광무제는 경감으로 하여금 오한과 함께 평원(平原, 산동성 평원현)에서 부평, 획삭적을 치게 하였는데 크게 이겼고 항복한 자가 4만이나 되었다.
장보를 토벌한 경감
경감에게 조서가 내려져 그는 장보의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경감은 원정을 떠나기 전에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모아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였다. 경감은 이렇게 편성한 부대를 기도위(騎都尉) 유흠(劉歆)이 지휘하도록 하고, 태산태수 진준의 군대와 더불어 장보를 치기위해 동쪽으로 갔다. 경감은 조양(朝陽)에서 제하(濟河)까지 다리를 놓아 하수(河水)를 건넜다.
장보가 이를 듣고 그의 대장군 비읍(費邑)에게 역하(歷下, 산동성 歷城縣)에 진을 치게 하고, 군대를 나누어 축아(祝阿, 산동성 長淸縣)에도 주둔케 하는 한편 별도로 태산(泰山)의 종성(鐘城, 산동성 禹縣의 동남쪽)에 수십 개 병영을 만들어 경감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경감은 하수(河水)를 건넌 뒤 먼저 축아를 공격하였는데, 아침부터 성을 공략하여 한낮이 되기도 전에 함락시켰다. 이때 고의로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터 병사들이 종성으로 도망가도록 유도했다. 도망병들의 전언으로 축아가 이미 궤멸된 것을 알게 된 종성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한편, 비읍이 그의 아우 비감(費敢)에게 군대를 나누어 주면서 거리(巨里)04를 지키게 했다. 경감이 진격하여 우선 거리를 위협했는데 나무를 많이 베게하여 갱도와 해자(垓字)를 막아 버리겠다고 장담했다. 이렇게 해서 며칠 지나자 투항해 온 사람이 말했다.
“경감장군이 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비읍이 구원하러 온다 합니다.”
경감이 군중에 엄령을 내려 장비들을 손질하게 하고 모든 부서에 명령을 내려 3일 후에 거리성을 총공격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이 말이 비읍에게 전달되게 하려고 사로잡은 포로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여 이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했다. 탈출병들의 전언으로 경감의 공격 날짜를 알게 된 비읍이 직접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거리성을 구원하러 왔다. 경감이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쟁장비들을 손질케 한 것은 비읍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들에 있는 군사를 치지 않고 어찌 성을 도모하겠는가? 이에 올 것이 왔으니 하고자 하는 바에 딱 들어맞게 되었다.”
경감은 즉시 3천여 명의 병사들을 남게 하여 거리성을 감시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은 정병들을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면서 서로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적들의 진영에 이르러 비읍을 베었다. 비읍의 잘린 머리를 거리성에 보이자 성 안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거리성을 지키던 비감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장보에게로 달아났다. 경감은 적들이 남기고 간 군수품을 수습하고 아직 평정되지 않은 병영을 마저 공격하여 40여 영을 격파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제남(濟南)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때 장보는 극(劇)을 도읍지로 삼고 그의 아우 장람(張藍)을 시켜 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안(西安)05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제군(諸郡)의 태수들이 보낸 병사 1만여 명을 모아 임치(臨淄)를 지키게 했는데 서로 4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경감은 획중(畫中)으로 진군하였는데 이곳은 서안과 임치, 두 성 사이에 있었다.
경감이 서안성은 비록 작으나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정병이어서 쉽게 공략할 수 없지만, 임치는 비록 크기는 해도 실제로는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임을 간파했다. 그런데,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경감은 닷새 후에 서안을 공격하겠노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경감의 공격 계획은 장람에게 전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폈다.
공격 개시일이 되자 경감은 모든 병사들에게 이른 새벽에 서둘러 식사를 마치게 하라고 독촉하고 행군하니, 날이 밝을 즈음에 임치성에 도달하였다. 서안성 공격을 천명한 총사령관이 임치성을 공격하니, 호군(護軍) 순량(荀梁) 등이 의당 서안을 먼저 공격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경감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서안은 내가 공격하리라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를 철통같이 하고 있소. 우리가 뜻하지 않게 임치를 공격하면 반드시 놀랄 것이니 하루 정도만 공략해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오. 임치를 함락시키면 서안은 고립되어 장람과 장보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므로 장람이 반드시 도망치게 될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른바 하나를 쳐 둘을 얻게 된다는 것과 같아지는 셈이오. 만일 서안을 먼저 공격하였다고 할 때 곧바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적들은 더욱 굳게 수비에 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아군의 사상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비록 함락시켰다고 해도 장람이 군대를 이끌고 임치로 달려가 임치의 병력과 합세하여 아군의 허실(虛實)을 주시하게 될 것이오. 우리가 적지 깊숙이 들어가 뒤에서 보급로가 차단되면 한 달 남짓 되어 우리는 싸우지도 않고 곧 곤궁에 처하게 될 것이오. 여러분들의 말은 이 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오.”
경감의 계책은 적중했다. 경감군이 임치를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입성(入城)하였다. 장람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무리들을 이끌고 장보가 있는 극으로 도망쳤다.
경감은 휘하 군대에 명령을 내려 극(劇) 지역에 대한 노략질을 중지하도록 했다. 극은 장보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장보가 왔을 때 그의 도읍을 노략질하면, 자신의 도읍이 적군에 침탈당하는 모습을 보고 격노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장보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우래(尤來), 대동(大彤)의 10만 병력으로 그들을 깨뜨리겠노라. 이제 경감의 군대는 나보다 숫자도 적고, 또한 모두 지쳐 있는데 두려워할 게 뭐 있으랴!”
장보는 세 아우 장람,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대동의 두목이었던 중이(重異) 등의 군대와 함께 20만 대군이라 일컬으며 임치에 있는 큰 성의 동쪽에 이르러 경감을 공격하려고 했다. 경감이 광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서했다.
“신이 임치를 점거한 후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았습니다. 장보는 극현(劇縣)에서 나와 공격하는 것이므로 그의 군대는 피로하고 주리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장보가 진격하려고 하면 유인하여 공격하고, 퇴각하려고 하면 추격하여 격퇴하겠습니다. 신은 군영(軍營)에 의거하여 싸울 것이니 날카롭기가 백배는 될 것이고, 편안한 군대로 지친 군대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는 실(實)로서 허(虛)를 치는 것입니다. 10일 정도면 장보의 머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광무제는 경감의 계책을 옳게 여겼다. 경감이 먼저 치수(淄水)가로 나가 중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경감은 먼저 돌격기병대(突擊騎兵隊)를 동원하여 적군의 선봉을 꺾으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적이 공격을 멈출 것 같았다. 경감이 짐짓 약한 척하며 적들의 기세를 부추겨 놓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작은 성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중이는 경감이 자신들의 예봉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고 여겼다. 이렇게 기세가 오른 장보군이 곧바로 경감의 병영을 공격하였는데 유흠이 이들을 맞아 교전하였다. 이때 경감은 왕궁의 대(臺)에 올라 전투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유흠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직접 정병을 이끌고 나가 동성(東城) 아래에서 장보의 진영 측면을 돌파하여 크게 이겼다. 양군이 치열하게 접전하는 과정에서 경감의 허벅지에 화살이 꽂혔으나 패도(佩刀)로 잘라내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투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경감은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군대를 정비하고 출진했다.
이때 광무제는 노(魯)에 머물고 있었는데 경감이 장보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와서 구원하려고 했으나 임치에 도달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진준이 경감에게 말했다.
“승여(乘輿)06가 당도하면 신하된 자는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거늘, 도리어 도적들을 군부(君父)에게 남겨주려는 것이오?”
경감이 병력을 발동하여 큰 싸움을 벌여 하루 종일 공방전을 벌인 끝에 다시 크게 이겼다. 이 싸움으로 장보의 군대는 회복하기 힘든 큰 타격을 입었다. 경감은 장보가 후퇴할 것을 예상하고 병사들을 미리 풀어 퇴각지점에 매복하여 그를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밤이 깊어지자 장보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퇴주하기 시작했다. 경감의 복병이 뛰어나와 공격하여 거매수(鉅昧水)까지 추격하였다. 장보의 군대는 괴멸되고 이들이 버리고 간 수레만 2천량이었다. 장보는 자신의 근거지인 극으로 되돌아가고 그의 형제들을 각기 군대를 이끌고 흩어졌다.
며칠 후에 광무제가 임치에 당도하여 군사들의 노고를 친히 위로했는데 신하들이 많이 모였다. 광무제가 경감을 극찬했다.
“옛적에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한의 기초를 열었는데 오늘 장군이 축아를 공략한 것은 한신의 자취를 이은 것으로, 이 지역은 모두 제의 서쪽 경계이니 그 공이 서로 비견될 듯 하오. 한신은 이미 항복한 상대를 공격한 것이나, 장군은 홀로 강한 적을 격파했으니 공을 세우기가 한신보다 어려웠을 것이오. 또 전횡(田橫)이 역이기(酈食其)를 죽인 뒤에 조서에 응하게 되었을 때 고제(高帝, 한고조 유방)가 조서를 내려 전횡을 건드리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원수로 삼아버리겠다고 했소. 장보가 전날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돌아와 명을 받든다면 복륭의 아비 대사도 복담(伏湛)에게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게 할 터인 즉, 그 일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오. 장군이 전날 남양에서 제(齊) 땅의 평정이란 큰 뜻을 세웠을 때 짐은 정밀하지 못해서 이루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늘 여겼었소. 그런데 뜻을 가졌던 자가 마침내 일을 해내었구려.”
역사를 보면 시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광무제는 경감이 거둔 성과를 한신의 고사와 대비하면서 그를 칭찬하고 있다. 한신이 제나라를 공략하였을 때 이미 제나라에는 한고조의 명을 받든 역이기가 제왕(齊王)에게 유세(遊說)하여 이미 한나라에 항복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한신 역시 제나라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을 중지하려 했는데 그의 참모 괴통은 그래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면 제나라를 차지한 것은 역이기의 공이 될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신 또한 괴통의 주장에 동조하여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제나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제왕은 분노하여 역이기를 죽인 것이다. 이렇게 한신처럼 이미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여 승리한 것과 경감과 같이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는 상대를 공격하여 승리한 것은 같은 승리라고는 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일임을 광무제는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서로간의 은원관계 또한 참으로 유사한 점이 있었다.
또한 후한 창업 초기에 경감이 광무제에게 ‘제 땅을 평정하겠습니다’고 했을 때 그의 뜻을 가상히 여기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예측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경감이 자신이 뱉은 말을 완수했으니 군신이 크게 모인 자리에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감이 다시 장보를 추격하자 그는 평수(平壽, 산동성 濰縣)로 도망했다가 항복했다. 경감이 장보를 행재소(行在所)로 보내고 그의 군대를 수습하여 입성시켰다. 경감은 12군(郡)07의 깃발을 세우고 명령을 내려 항복한 병사들에게 자기 군의 깃발 아래로 가게 했다. 이때 획득된 군대의 장비는 7천량이었고 병사들은 10만에 달했는데 모두 자신들의 향리로 돌려보냈다. 경감은 성양(城陽)에서 오교의 잔당에게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원정을 마무리 하고 경사(京師)로 개선했다.
30(건무 6)년에 광무제는 외효(隗囂, ?-33)08를 막고자 경감에게 칠(漆)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32(건무 8)년 경감은 계속해서 롱(隴)에 머물렀다. 33(건무 9)년에 경감은 중랑장(中郞將) 내흡(來歙)과 부(部)를 나누어 안정(安定, 감숙성 固原縣), 북지(北地)의 변방의 여러 진영과 보루들을 순시하면서 모두 항복시켰다.
경감이 평정한 군이 46개, 함락시킨 성이 3백여 개나 되었으며 일찍이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36(건무 12)년에 경감의 부친 경황이 병이 들었다. 광무제는 수 차례 그의 병문안을 갔다. 경황은 후한 창업기에 큰 공을 세운 원로이며 그의 여섯 아들은 맏아들 경감을 위시하여 모두가 창업에 대공을 세웠다.09 광무제는 셋째 아들 경국(耿國)과 다섯째 아들 경거(耿擧)를 모두 중랑장에 임명했다. 경감을 비롯한 여섯 형제들은 모두 청색이나 자색의 인수를 늘어뜨리고 병든 부친의 시중을 드니 당대 세상 사람들은 이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경황이 죽자 시호(諡號)를 열후(烈侯)라 하고 막내 경패(耿霸)에게 경황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37(건무 13)년에 광무제는 경감의 식읍을 늘렸다. 경감이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쳐 은퇴하니 광무제는 열후(列侯)로서 봉조청(奉朝請)할 수 있도록 했다. 경감이 은퇴했지만 광무제는 매번 이견이 분분한 사안이 있을 때면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청취했다. 광무제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반납하고 은퇴할 당시 경감의 나이는 37세였다. 경감으로서는 좀 더 왕성하게 일을 할 나이가 분명하지만 그는 광무제의 의중이 어디에 있었는지 파악한 것이다. 후한 건국 후 숱한 전쟁 끝에 건무 13년이 되면 비로소 평화가 도래한다. 광무제는 정벌로 후한을 창업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너무도 분명하게 목도한 까닭에 무력 사용을 싫어했고, 공신들의 작위도 보전해주고자 했다. 광무제는 좌장군, 우장군의 관직을 없애고 공신들도 관직에서 배제하여 군신간의 불필요한 긴장 관계를 사전에 차단했다. 광무제의 공신들은 주군의 뜻을 간파하고 대부분 스스로 물러났다. 이들의 작위는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모두가 그들의 복록을 보존하였고 주살되거나 견책 받는 사람이 없었다.
후한 창업공신인 중흥 28장 가운데 경감과 같이 그 가문과 형제들 모두가 창업에 대공을 세운 이는 드물었다. 경감은 중대한 순간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후한 창업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둘이다. 먼저는 광무제가 하북에서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실질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후한 창업의 터전을 확보한 것이다. 다음은 후한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장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을 수습하면서 동쪽지방을 평정한 것이다.
『후한서』는 경감의 공적을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3대(代)에 걸쳐 장군이 나는 것은 도가(道家)에서 꺼리는 바이다. 그러한 집안은 많은 살육을 야기한 까닭에 반드시 그 후손들은 상서럽지 못하다고 하는데 경감의 가문은 누대로 시종일관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어떤 이유인가?” 『후한서』의 사관(史官)은 장삼대필패(將三代必敗, 장군이 3대 이어지면 반드시 패망한다)라는 말까지 인용하면서 누대로 장군이 이어지는 집안은 끝이 좋을 수 없는데 경감의 가문은 그렇지 않다면서 왜 그러한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후한서』는 그 대답도 내놓고 있는데, 경감의 가문에서 장군들이 이어져 그 과정에서 살육이 발생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전쟁은 살육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누대에 걸쳐 장군이 이어졌으나 공명 또한 이어졌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8수 신명들의 생애는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대가 그러했고 자신들의 임무가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비록 글이라고 하지만 많은 살육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이라고 다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전쟁이었기에, 『후한서』의 사관도 「경감열전」에서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58(永平 1)년에 경감이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민후(愍侯)라 했다.(경감 끝)
01 남양(南陽, 현재 하남성 남양) 사람.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주변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진풍(秦豊)과 연합하였다가 진풍이 패하자 공손술(公孫述)에 투항하여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다. 36(建武 12)년, 오한(吳漢)이 촉(蜀)을 평정할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연패하였다. 공손술이 죽자 항복했고 처형되었다.
02 자(字)는 문공(文公). 낭야(琅邪) 불기[不其, 현재 산동성(山東省) 노산(嶗山)] 사람. 왕망의 신(新)나라 말엽에 수천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주변 군현(郡縣)을 공략하여 자칭 오위장군(五威將軍).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왕굉(王閎)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양왕(梁王) 유영(劉永)이 그를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 충절후(忠節侯)에 봉해 청주(靑州), 서주(徐州)를 관할케 했다. 이후, 그의 영역은 확대되고 병력도 증대되었다. 26(건무2)년 유영이 광무제에게 항복하자 27(건무3)년 광무제가 장보를 동래태수(東萊太守)에 임명했으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제왕(齊王)이라 했다. 29(건무5)년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서자 다시 투항하여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으나 32(건무8)년 처자를 데리고 임회(臨淮)로 도망가 자신의 옛 무리를 모았는데 낭야태수(琅邪太守) 진준(陳俊)에 의해 진압된 후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03 최고급 저택.
04 일명(一名) 거합성(巨合城). 산동성 역성현 서쪽에 있는 성.
05 이때 서안은 현재의 서안(西安, 당시의 장안)과는 다른 곳이다. 현재 산동성 치박시(淄博市)에서 서쪽 15km 지점.
08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유현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를 협박하여 경시제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30(건무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32(건무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09 경황의 여섯 아들은 첫째가 경감, 둘째가 경서(耿舒), 셋째가 경국, 넷째가 경광(耿廣), 다섯째가 경거, 여섯째가 경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