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순진리회 - 『28수(宿) 신명』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4. 4. 21. 12:49

본문

우(牛) 별을 관장하는 구순(寇恂) 신명 (2)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종교문화연구소

 

 

 

광무제 즉위와 구순의 활약

  주유의 하내 공략은 곧장 유수에게 보고되었다. 이미 예견된 침공이었지만 전황이 어떻게 되는지 노심초사하고 있던 유수에게 연이어 구순의 승전보가 당도했다. 유수는 크게 기뻐했다.

“나는 구자익이 그 소임을 다할 것을 알았다.”

여러 장군들이 승전을 축하하면서 유수에게 존호(尊號)를 바쳤다. 존호는 글자대로 보면 ‘존귀한 칭호’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황제’를 의미한다. 이때 유수의 직위는 소왕(蕭王)이었다. 그가 황제를 자처하게 되면 자신을 소왕으로 임명한 경시제는 첫 번째 타도 대상이 된다. 유수가 황제에 등극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으나 그는 사양한다. 그러나 유수의 등극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휘하 장수들의 요청을 세 번 거절한 이후인 25년 6월 유수가 호현(鄗縣, 하북성 柏鄕縣)의 남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이다. 이렇게 구순의 승리는 후한을 여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광무제가 즉위했다고 하지만 아직은 창업 초기였다. 이 시기에 갑자기 군량이 궁핍해지지 않도록 구순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레와 마차를 동원하여 군수품을 끊이지 않고 운반토록 하였다. 광무제는 여러 번 책서(策書)01를 내려 구순의 노고를 묻고 치하했다. 구순의 동문인 무릉(茂陵) 사람의 동숭(董崇)이 그에게 경고했다.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사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군후(君侯, 구순)께서는 대군(大郡)에 근거하시어 안으로 인심을 얻고 밖으로 소무를 깨트려 그 위의가 주변의 적들을 떨게 하시고 공명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이것은 참소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깝게 보는 것으로 원망과 화를 입을 수 있는 시기입니다. 옛날 소하가 관중을 지킬 때 포생(鮑生)의 말에 깨달은 바 있어 그대로 행하니 고조가 기뻐하였습니다.”

동숭이 구순에게 한 말을 되짚어 보자. 대체로 전한(前漢) 공신들의 최후는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한신(韓信)이다. 한신이 죽기 전에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세상이 평정된 이후 전쟁이 사라져 쓸모없게 된 공신들의 최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전한의 많은 공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과는 반대로 소하는 명재상으로 후세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소하는 말단 관리에서 출발했으나 전한 건국의 최고 공신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소하는 한 고조가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때부터 그를 따랐다. 한 고조의 군대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초패왕 항우보다 먼저 입성하였을 때도 소하는 함께 했다. 한 고조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이 진나라의 국고에 수장된 엄청난 보물에 현혹되었다. 진나라가 각 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양의 보물은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충분했다. 그런데 소하는 진나라 승상부(丞相府)와 어사부(御使府)로 달려가서 각종 공문서를 수집하여 한군의 진영으로 옮겼다. 소하가 이 문서를 거두지 않았다면 함양이 불탔을 때 이 또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하가 수집한 진나라의 공문서는 당시 중국의 모든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한 왕조는 이를 토대로 정책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조가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사냥꾼과 사냥개의 비유까지 들면서 최고 공로자를 소하라고 칭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 소하였지만 고조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조는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황제가 된 인물로 의심이 많았다. 그의 공신들 가운데 언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넘볼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승패를 알 수 없는 전황 속에서 반란이 보고되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시대였으므로 그의 의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데 만약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소하라면 이것은 중대 사안이 분명했다. 그는 초패왕과의 사투 속에서도 사신을 파견하여 소하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때 소하에게 충고한 사람이 동숭이 언급한 포생이다. 포생의 충고는 다음과 같다. ‘한왕(漢王, 유방)이 고된 전쟁 가운데서도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당신을 위로하는 것은 당신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당신의 자제와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두 싸움터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면 왕은 반드시 당신을 더욱 신임할 것이다.’ 이에 소하는 그의 말을 따랐고, 고조는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소하의 가족이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정하게는 인질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만약 소하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들을 순순히 한 고조의 수하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하는 자신의 충성을 다시 맹세한 셈이고, 한 고조로서도 ‘소하의 반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구순은 동숭의 말을 옳게 여기고 병을 핑계로 일을 보지 않았다. 광무제가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하내에 왔을 때, 구순이 동숭의 충고대로 종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무제는 “하내를 아직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구순이 여러 차례 간곡히 청하였으나 광무제가 들어주지 않자 형의 아들 구장(寇張), 누이의 아들 곡숭(谷崇)을 보내었다. 이들은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 광무제는 구순의 처신이 잘한다고 여겼고, 그들을 모두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소하나 구순과 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좋은 평판을 끝까지 남긴 이들의 처신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소하나 구순은 충고하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말을 하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지적에 귀를 열고 충고한 이들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26(건무 2)년 구순을 고발한 자가 있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때 영천(潁川)에서 다시 도적이 일어났다. 엄종(嚴終), 조돈(趙敦)이 만여 명을 모아 밀(密) 땅의 가기(賈期)와 연합하여 주변을 노략질하였다. 구순은 면직된 지 수개월 후 만에 다시 영천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파간(破姦)장군 후진(侯進)과 함께 도적을 공격하였다. 몇 달 뒤 구순이 가기의 목을 베고 이 지역을 평정되었다. 이 일로 구순은 옹노호(擁奴侯)에 임명되었는데 식읍(食邑)이 만(萬) 호에 이르렀다.

 

 

가복과의 불화를 현명하게 해소한 구순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과의 관계가 나빠진 시기는 구순이 영천(潁川) 태수로 있을 때였다. 가복의 부하 장수가 영천에서 살인을 범하여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는 아직 법률 체계가 세워지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군인들은 법을 어겨도 대부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구순이 살인을 저지른 가복의 부하를 저자거리에서 처형하였다. 가복은 자신의 부하를 지켜내지 못했다 하여 이 일을 수치로 여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구순과 같은 서열의 장수인데 지금 그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대장부가 어찌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도 결단을 내리지 않겠는가? 이제 구순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내 손으로 목 베리라.”

구순이 가복의 말을 전해 들었다. 이후로 그는 되도록이면 가복과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구순이 가복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곡숭이 구순에게 말했다.

“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칼을 차고 옆에서 시중들겠습니다. 갑자기 변이 생겨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순은 대답하였다.

“그럴 것 없다. 옛날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염파(廉頗)에게는 굴복했는데 그것은 오직 나라를 위해서였다. 보잘것없는 조(趙)나라조차도 이러한 의를 가졌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구순이 말한 인상여와 염파에 관한 이야기는 문경지교(刎頸之交)02란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잠시 살펴보자. 진나라가 중국 전역을 통일하기 전에 각 국을 병합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조나라는 국력에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조나라에는 염파와 인상여라는 출중한 인물이 있어서 진나라는 조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염파는 장군이었고 인상여는 외교에 능했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회담에서 인상여의 현명한 조처로 조나라는 국가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상여에 대한 평판이 높아지자 염파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 자신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인상여는 몇 마디 말밖에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염파는 언젠가 인상여에게 모욕을 주리라고 공공연하게 다짐했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가급적 그와의 만남을 피하도록 애썼다. 인상여의 가신(家臣)들은 인상여의 이러한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상여의 가신들은 인상여가 염파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상여의 가신들은 ‘이런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결정했다. 가신들의 말을 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진왕 가운데 누가 더 무서우냐고 물었다. 그리고 염파와 자신이 싸우게 되면 좋아하게 되는 쪽은 진나라라고 하면서, 그 자신은 진왕도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이 일은 염파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염파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상여를 찾아가 사죄했다. 인상여는 ‘다른 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염파를 위로했다. 이후, 인상여와 염파는 서로를 위해서는 목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 ‘문경지교’라는 고사를 낳게 한 것이다.

구순의 처신을 보며 그는 옛 고사에서 깊이 감명 받은 것이다. 구순은 속현(屬縣)들에 명령을 내려 풍성하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집금오 가복의 군대가 영천군의 경계에 들어서면 한 사람에게 2인분의 술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구순 자신은 가복을 맞이하러 가는 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가복의 군대는 영천에서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고 병사들은 모두 취했다. 가복이 구순을 추격하려했지만 이미 그의 병사들이 모두 취해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구순은 곡숭을 보내 이 일을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는 곧 구순을 불러 들였다. 구순이 이르러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는 이미 가복이 와 있었다. 가복이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 구순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광무제가 제지했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두 장군은 어찌 사사로운 다툼을 할 수 있소? 오늘 짐이 그대들을 화해시키리라.”

그리하여 광무제가 주선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구순과 가복은 함께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같은 수레를 타고 나가서 친구의 의리를 맺고 헤어졌다. 구순과 인상여의 처신은 상제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사람에게 마음을 누그리고 지는 사람이 상등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니라. 분에 이기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 사람이니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리라. 어찌 잘 되기를 바라리오.”03 만약 인상여와 구순이 염파와 가복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어떤 조직이 별 탈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상여와 구순과 같은 이들이 염파와 가복에 맞서 싸우지 않고 스스로 지는 쪽을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구순의 지략과 말년

27(건무 3)년 광무제는 구순을 여남(汝南)태수에 임명하였다. 또한 표기(驃騎)장군 두무(杜茂)에게 병사를 이끌고 구순을 도와 도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도적 떼들이 조용해지고 군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 구순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향교(鄕校)를 정비하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능통한 사람을 초빙해 몸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31(건무 7)년 구순은 주부(朱浮)를 대신해서 집금오가 되었다. 그 다음 해 광무제는 외효(隗囂, ?-33)04를 공격하였다. 이때 영천의 도적들이 다시 일어나니 광무제는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구순에게 말하였다.

“영천은 장안에 가까우니 때맞추어 평정하는 것이 좋소. 그러나 오직 경만이 그들을 평정할 수 있을 따름이었는데 짐의 행렬을 쫓아 출병하였으니 경의 우국충정을 알 수 있겠소.”

구순이 대답하였다.

“영천에서 도적들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경솔하기 때문입니다. 도적들은 폐하께서 멀리 농(隴), 촉(蜀) 땅에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활하게 그 틈을 타서 난리를 피우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시고 그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놀라고 당황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이 선봉에 서게 하여 주소서.”

광무제는 그날로 군사를 남쪽으로 돌렸다. 구순이 광무제를 수행하여 영천에 이르자 도적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영천군의 백성들이 황제의 행렬을 막고 광무제에게 청을 올렸다.

“폐하께서 구군(寇君, 구순)을 1년만 더 이곳에 머무르게 해 주시길 원하옵니다.”

광무제가 백성들의 청을 받아들여 구순을 남겨두어 백성과 관리들을 위무케 했다. 구순이 영천태수가 되자 남은 도적들도 항복했다.

외효의 장수인 안정(安定)의 고준(高峻)이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고평현(高平縣) 제일성(第一城)에 근거하였다. 광무제는 마원(馬援)에게 명령을 내려 고준을 공격토록 지시했다. 마원의 공격을 받은 고준이 투항하니 그 이후로 하서(河西)의 길이 뚫렸다. 광무제의 명으로 이 지역에 파견된 중랑장(中郞將) 래흡(來歙)이 황제를 대리하여 고준을 통로(通路)장군에 임명하고 관내후(關內侯)로 봉했다. 그 뒤 고준은 대사마 오한(吳漢)의 휘하에 편입되어 기(冀) 땅에서 외효를 공격했다. 그런데 오한이 패퇴하자 고준은 다시 외효를 도와 농저(隴阺)지방을 점거했다. 외효가 죽자 고준은 고평현에 근거하면서 굳게 지키고 있었다. 건위(建威)대장군 경감(耿弇)은 태중대부(太中大夫) 두사(竇士), 무위(武威)태수 양통(梁統)을 이끌고 고준을 포위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34(건무 10)년 광무제는 관내로 들어와 직접 고준 정벌에 나서고자 하였다. 구순이 황제를 수행하다가 간언하였다.

“장안은 낙양과 고평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접전하기가 가깝고 편리하며 안정, 농서 지역도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을 터이니 이것은 한 곳에 조용히 거하면서도 사방을 제어할 수 있는 요새라는 뜻입니다. 지금 병사와 말들이 지쳐있어 위험한 때입니다. 지난 해 정예병으로 영천을 치던 때와는 상황이 다르니 경계하심이 좋겠습니다.”

광무제는 구순의 말을 따르지 않고 진군하여 견현(汧縣)에 이르렀다. 광무제는 사신을 보내 고준에게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광무제가 구순에게 말했다.

“경이 전에 짐에게 거사하지 말도록 충고하였으나 지금의 나를 위해 가주시오. 만약 고준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경감을 비롯한 다섯 군영의 군대로 공격하겠소.”

구순은 광무제의 서찰을 가지고 제일성에 이르렀다. 이때 고준이 그의 군사(軍師) 황보문(皇甫文)을 보내어 구순을 맞았다. 그런데 사자로 파견된 황 보문의 태도는 무례했다. 황보문의 태도에 격분한 구순이 그를 베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고준의 정예병이 만여 명이고 모두 강한 궁수이며 서쪽으로 농(隴)으로 통하는 길이 막고 있어서 해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준에게 항복을 받아내려고 왔는데 도리어 그의 사신을 죽인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안됩니다.”

구순은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지 않고 황보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황보문을 수행한 부하를 돌려보내 고준에게 다음과 같이 고(告)하게 하였다.

“그대가 보낸 군사가 무례하여 내가 죽였소. 항복하고 싶거든 빨리 항복하고, 항복하고 싶지 않거든 굳게 지키시오.”

고준은 황보문의 죽었다는 소식에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그는 그 날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여러 장군들이 구순에게 경하하면서 말하였다.

“감히 여쭙니다. 그의 사신을 죽이고도 항복을 받아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구순이 대답하였다.

“황보문은 고준의 심복이오. 고준의 계책은 황보문에게서 나온 것이오. 황보문이 이번에 와서 굴복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항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뜻이오. 그를 살려두면 반드시 계책을 짜낼 것이요, 그를 죽이면 고준이 기댈 바를 잃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소. 황보문이 죽었으니 고준이 항복한 것이오.”

여러 장군들이 모두 대답하였다.

“과연 저희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구순은 항복한 고준을 낙양으로 송환했다. 구순은 경(經)에 밝고 행실을 잘 닦아 명망이 조정에 두터웠다. 그가 받은 녹봉은 친구들과 그를 따르던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사대부(士大夫)의 몸으로 이런 위치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홀로 누릴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이 그의 뛰어난 점을 감복하면서 재상(宰相)의 그릇이라고 여겼다.

  36(건무 12)년 구순이 죽으니 시호를 위후(威侯)라 하였고, 아들 구손(寇損)이 뒤를 이었다. 구순의 형제 자제들 가운데 군공(軍功)을 세워 열후(列侯)에 봉해진 사람이 여덟이었다.

(구순 끝)

 

 

 


 

01 백관(百官)을 임면(任免)하는 사령서(辭令書). 한나라 때는 황제가 신하들에게 하달하는 문서가 넷인데 첫 번째가 책서, 두 번째가 제서(制書), 세 번째가 조서(詔書), 네 번째가 계칙(誡勅)이었다.

02 친구를 위해서는 목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런 사귐을 뜻한다.

03 교법 1장 55절.

04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66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