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을 평정한 잠팽 26(건무 2)년 광무제가 잠팽으로 하여금 형주(荊州)를 공격하게 하니 주현(犨縣), 섭현(葉縣) 등 십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에 남쪽 지방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가운데 남군(南郡) 사람인 진풍(秦豊)이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그는 여구(黎丘) 땅을 점거하고는 초려왕(楚黎王)이라고 자칭하면서 열두 개 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동흔(董訢)은 도향(堵鄕)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허한(許邯)은 행(杏)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또 경시의 여러 장군들도 각기 자신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양군의 성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에게 남양 정벌을 명령했다. 그런데 오한의 군대가 지나가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 때마침 파로(破虜)장군 등봉(鄧奉)이 광무제를 알현하고 신야(新野)로 돌아오는 도중에 오한의 군대가 자신의 고을을 약탈하는 것을 목격했다. 분노한 등봉은 곧장 반란을 일으켜 오한을 격파하고 치중(輜重)을 빼앗고 육양(淯陽, 하남성 남양현 南綠陽村)을 점거하였다. 등봉은 이후 동흔과 같은 주변의 반란세력들과 연합했다. 이 해 가을에 잠팽은 행(杏) 땅을 격파하여 허한을 항복시켰다. 이후 정남(征南)대장군에 임명되어 남쪽 정벌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광무제는 주우(朱祐), 가복(賈復), 건위(建威)대장군 경감(耿弇), 한충(漢忠)장군 왕상(王常), 무위(武威)장군 곽수(郭守), 월기(越騎)장군 유굉(劉宏), 편장군(偏將軍) 유가(劉嘉)와 경식(耿植)을 보내어 잠팽과 힘을 합하여 등봉을 토벌토록 하였다. 잠팽의 군대가 먼저 도향(堵鄕)의 동흔을 공격하였다. 이에 등봉이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동흔을 도우러 왔다. 동흔과 등봉의 병사는 모두 남양의 정예병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지역이었으므로 잠팽이 수개월 동안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27(건무 3)년 여름 남쪽의 상황에 교착 상태에 빠지자 광무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광무제가 섭성(葉城)에 이르렀을 때 동흔이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동흔의 저지로 광무제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이때 잠팽이 달려나가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여세를 몰아 광무제가 도양(堵陽, 하남선 方城縣)까지 진격하니 등봉은 밤을 틈타 육양으로 도망갔고 동흔은 항복했다. 잠팽이 다시 경감, 가복 및 적노(積弩)장군 부준(傅俊), 기도위(騎都尉) 장궁(臧宮)과 함께 등봉을 추격하여 소장안(小長安)까지 이르렀다. 광무제가 휘하 장군들을 거느리고 직접 싸워 등봉군을 크게 격파했다. 다급해진 등봉은 곧 항복했다. 광무제는 등봉을 용서해주고자 했다. 등봉이 공신이었고, 애초에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오한 군대의 약탈이었다는 감안한 것이다. 그러나 잠팽과 경감은 등봉을 사면하려는 광무제의 의사에 반대했다. “등봉은 배은망덕하게도 반역했습니다. 그의 포악한 군사들이 1년을 경과하면서, 가복은 부상을 입고 주우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이미 행차하셨는데도 등봉은 뉘우치지 못하고 대항했으며 패배한 후에야 비로소 항복했습니다. 만일 지금 등봉을 베지 않으시면 악을 경계할 수 없습니다.” 광무제는 잠팽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등봉은 스스로도 공신이었고 서화후(西華侯) 등신(鄧晨)의 조카이기도 했지만 참형에 처해졌다. 광무제는 수도로 귀환하면서 잠팽에게 부준, 장궁, 유굉(劉宏)을 비롯한 병사 삼만을 지휘하여 진풍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광무제의 명으로 잠팽은 황우성(黃郵城, 남양 신야현)을 공격했다. 그런데 진풍이 그의 대장군 채굉(蔡宏)과 함께 등(鄧, 하남성 등현) 땅에서 잠팽의 군사를 막으니 잠팽군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나아갈 수 없었다. 광무제는 전황에 진전이 없음을 알고 잠팽을 꾸짖었다. 이에 잠팽은 곧 군사를 밤중에 훈련시키며 군중에 명령을 내렸다. 잠팽의 군령은 ‘이튿날 새벽 서쪽으로 산도현(山都縣)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로들의 감시를 소홀히 하여 그들이 도망쳐서 진풍에게 자신의 의도가 알려지도록 하였다. 잠팽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진풍은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잠팽은 이에 군사를 잠수(潛水)시켜 면수(沔水)를 건너게 하여 진풍군의 장양(張楊)을 아두산(阿頭山)에서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또한 잠팽군은 시내 계곡을 따라 진군했다. 이곳은 길이 없어서 벌목하여 길을 뚫고 여구(黎丘)를 습격하였다. 잠팽의 급속한 진격에 크게 놀란 진풍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때 잠팽은 다른 장군들과 함께 동산(東山)에 진영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진풍이 채굉과 함께 밤에 잠팽을 공격하였지만 그들의 야습(夜襲)은 이미 간파된 것이었다. 잠팽이 복병을 배치하여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여 진풍은 도주했고 채굉은 추적 끝에 처단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잠팽은 무음후(舞陰侯)로 다시 봉해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진풍의 승상 조경(趙京)이 의성(宜城)을 가지고 잠팽에게 항복했다. 광무제는 조경을 성한(成漢)장군에 임명하고 잠팽과 함께 여구에서 진풍을 포위하도록 했다. 이때에 또 다른 군도(群盜)로 자칭 주성왕(周成王)인 전융(田戎)이 이릉(夷陵)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가 진풍이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팽의 군대가 들이닥칠까 염려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신신(辛臣)이 전융에게 팽총(彭寵,?-29)01, 장보(張步,?-32)02, 동헌(董憲), 공손술(公孫述, ?-36)03이 얻은 지역을 보여주면서 간언하였다. “지금 사방의 호걸들이 제각기 군국(郡國)을 점거하고 있는 실정이고, 낙양(洛陽)은 손바닥과 같은 땅이니 그 변화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 못합니다.” 신신의 말은 항복하지 말고 사태의 추이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융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융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진왕(秦王, 진풍)의 세력으로도 오히려 정남장군(征南將軍, 잠팽)에 의해 포위당했는데 하물며 나의 세력으로 어찌하리오? 항복하겠소.” 28(건무4)년 봄에 전융은 신신을 남겨두어 이릉을 지키게 하고 그 자신은 항복을 하기 위한 길을 떠났다. 전융은 장강을 따라 면수를 거슬러 올라가 여구(黎丘, 호북성 宜城縣의 동북쪽)에 이르렀고 날짜를 정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릉 수비를 위해 남겨두었던 신신이 전융의 보물을 훔쳐서 잠팽에게 먼저 항복하였다. 잠팽에게 먼저 항복한 신신이 전융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를 불렀다. 전융은 항복하지 말자던 신신이 먼저 항복하고, 필시 자신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항복하기로 한 날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전융은 점을 쳐 보기로 했다. 전융이 거북을 구워 점을 쳐 보았는데 나타난 징조는 중간이 갈라진 것이었다. 항복을 하기로 하고 쳐 본 점의 결과로는 불길한 징조였다. 전융은 잠팽에 항복하지 않고 진풍의 군사와 힘을 합했다. 잠팽이 군사를 출동시켜 수개월 만에 전융을 격파하였다. 전융의 대장군 오공(伍公)도 항복하고 전융은 다시 이릉으로 도망갔다. 12월 광무제가 여구(黎丘)에 행차하였다. 광무제는 잠팽과 휘하 장정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공훈 있는 백여 명을 봉해 주었다. 잠팽이 진풍을 공격한지 3년이 되니 그간 처단한 적병의 수가 9만여 명이었다. 진풍에게 남은 잔여 병력은 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성안의 식량 또한 바닥이 나게 되었다. 광무제는 진풍의 세력이 매우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주우로 하여금 잠팽을 대신하게 했다. 또한 잠팽에게 부준과 함께 남쪽의 전융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잠팽이 이릉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전융을 추격하여 자귀(秭歸)에까지 이르렀다. 전융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도망쳐 촉(蜀)으로 들어갔다. 잠팽은 전융의 처자와 병사 수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전융이 촉(蜀)으로 도주하자 잠팽이 그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촉으로 진군해야 했다. 그러나 촉의 지형은 물을 끼고 있고 식량도 부족한 곳이었다. 촉으로 가는 수운(水運)도 험난해서 배로 식량을 운반하기도 힘겨운 지방이었다. 잠팽은 촉 정벌을 위한 사전 조처로 위로(威虜)장군 풍준(馮駿)을 강주(江州)에 주둔시켰다. 아울러 도위(都尉) 전홍(田鴻)을 이릉에 주둔시키고, 영군(領軍) 이현(李玄)은 이도(夷道)에 주둔시키고 그 자신은 진향(津鄕, 호북성 江陵縣의 동쪽)에 주둔하였다. 진향은 형주(荊州;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의 요충지였다. 잠팽은 군대의 배치를 끝내고 항복해 오는 자는 광무제께 아뢰어 제후에 봉해 주겠다고 주변 지역에 고지했다. 이러한 조처는 잠팽이 무력으로만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에 잠팽과 교지목(交阯牧) 등양(鄧讓)은 친분이 두터웠다. 잠팽이 등양에게 편지를 보내 광무제 통치하의 국가의 위엄과 덕을 설명했다. 또 편장군(偏將軍) 굴충(屈充)을 보내 강남 지역에 돌며 광무제의 뜻을 전달케 했다. 잠팽의 편지를 받은 등양이 강하(江夏)태수 후등(侯登), 무릉(武陵)태수 왕당(王堂), 장사(長沙)의 승상 한복(韓福), 계양(桂陽)태수 장융(張隆), 영릉(零陵)태수 전흡(田翕), 창오(蒼梧)태수 두목(杜穆), 교지(交阯)태수 석광(錫光)과 함께 휘하의 관리를 보내 광무제에게 공물을 헌납하였다. 광무제는 이들 모두를 제후로 봉해주었다. 이들 가운데는 자제들과 병력을 파견하여 잠팽군에 합류한 이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때에 비로소 강남(江南)의 물산과 진기한 보배들이 유통되었다. 30(건무 6)년 겨울에 광무제는 잠팽을 잠시 서울로 불러들였다. 잠팽의 혁혁한 전과에 대한 포상을 위한 것이었다. 잠팽을 위한 연회가 거듭되었고, 연회의 석상에서 상을 내려 그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포상이 끝난 후 다시 임지로 귀환하는 잠팽에게 광무제는 명을 내려 조상의 묘에 참배케 하였다. 또한 잠팽의 모친에게는 초하루, 보름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안부를 묻게 하였다.
파촉 정벌에 나선 잠팽 32(건무 8)년 잠팽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천수(天水) 지역을 격파하고 오한과 함께 서성(西城)에서 외효(隗囂, ?-33)04를 포위했다. 이때에 공손술이 이육(李育)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외효를 구원하기 위해 상규(上邽)지역에 주둔하였다. 광무제는 합연(蓋延)과 경감(耿弇)과 함께 외효를 포위케 하고 자신은 귀환했다. 그리고 잠팽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촉을 공격하시오. 사람의 고통은 만족을 모르는 데 있소. 이미 농(隴) 땅을 평정하였지만 다시금 촉(蜀) 지역을 평정하기를 바라고 있소. 군대를 한번 출정시킬 때마다 근심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오.” 잠팽이 광무제의 지시로 촉을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잠팽은 계곡의 물을 막고 그 물을 서성으로 흘려보냈다. 그런데 서성이 거의 물에 잠길 즈음 행순(行巡)과 주종(周宗)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외효는 기(冀)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오한군은 식량이 다 떨어져서 짐수레를 불태우고 농 땅을 빠져나갔으며 합연과 경감도 퇴각했다. 외효가 후퇴하는 이들을 공격하였다. 잠팽이 최후에서 방어한 까닭에 원정군은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원정군이 회군할 때 잠팽은 자신의 근거지인 진향(호북성 江陵縣)으로 돌아왔다. 33(건무 9)년 이번에는 공손술이 공격에 나섰다. 공손술 휘하의 임만(任滿), 전융(田戎), 정범(程汎)이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뗏목을 타고 강관으로 내려와 풍준, 전홍, 이현을 격파했다. 이도(夷道), 이릉(夷陵), 형문(荊門), 호아(虎牙)05가 공손술의 수중에 떨어졌다. 공손술군은 강수(江水)를 가로질러 구름다리와 전투용 누각을 설치하였다. 또한 강에 찬주(欑柱)06를 박아 물길을 막고 산 위에 진영을 설치하고 광무제의 공격에 대비했다. 잠팽이 수 차례 이들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잠팽은 공손술군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전투용 누각을 설치한 배와 돌격용 전함 수천 척을 준비했다. 35(건무 11)년 봄 잠팽을 필두로 대사마 오한, 주로(誅虜)장군 유융(劉隆), 보위(輔威)장군 장궁(臧宮), 효기(驍騎)장군 유흠(劉歆)이 남양(南陽), 무릉(武陵), 남군(南郡)의 군대를 동원했고 계양(桂陽), 영릉(零陵), 장사(長沙) 지역에서는 노 젓는 군졸을 징집하였다. 이들의 전체 군세는 6만에 달했고 여기에 오천 필의 말이 모두 형문에 모이게 되었다. 대사마 오한은 계양, 영릉, 장사 세 개 군에서 모인 노 젓는 군졸들에게 소비되는 양식이 너무 많다고 여겼다. 잠팽의 전략상 필수적인 병력이었지만 대사마 오한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잠팽이 광무제에게 글을 올려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광무제의 회신은 다음과 같았다. “대사마(오한)는 보병과 기병 사용에는 익숙하지만 물에서의 싸움은 잘 알지 못하니 형문의 일은 정남공(征南公, 잠팽)인 그대가 알아서 일괄 처리토록 하시오.” 광무제의 회신 이후에 잠팽이 휘하 장졸들에게 공손술군의 구름다리를 공격하고 적의 진영에 먼저 오르는 자에게 최고상을 내리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리하여 편장군 노기(魯奇)가 선봉에 나섰다. 노기의 공격과 때를 맞추어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다. 노기의 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 곧바로 적군의 구름다리로 돌격했다. 그러나 노기의 배는 공손술군이 강에 박아 놓은 찬주에 걸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노기 는 필사적으로 전진하고자 했고 연이어 횃불을 날려 적진을 불태웠다. 더 거세진 바람 덕에 적군의 다리와 누각이 모두 타버렸다. 잠팽이 승세를 몰아 전군을 동원하여 바람과 함께 전진하니 막아서는 적이 없었다. 공손술군은 크게 혼란에 빠져서 익사자만도 수천 명이었다. 잠팽은 임만을 참(斬)하고 정범은 생포했고, 전융은 강주로 도주했다. 잠팽이 광무제에 상소하여 유융(劉隆)을 남군(南郡)태수로 천거하고 그 자신은 장궁(臧宮), 유흠(劉歆)을 거느리고 촉으로 진군했다. 촉으로 진군하면서 잠팽은 군중에 엄명을 내려 행군 중에 노략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 중국은 도둑과 강도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세력이 커지면 대장군이나 왕을 자칭하던 시대였다. 이들의 세력다툼은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도적떼와 강도들의 영역 싸움일 뿐이었다. 잠팽의 군대는 이전의 도적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잠팽군이 지나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쇠고기와 술을 바치면서 환영했다. 잠팽이 그 장로(長老)들을 만나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大漢)의 백성들인 파(巴)와 촉(蜀)의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시달리는 것을 가엾이 여겨 군사를 일으켜 죄지은 자들을 토벌하고 백성들을 위해 근심거리를 없애주는 것입니다.” 잠팽은 백성들이 준비한 술과 고기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파촉의 백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해 왔다. 잠팽의 현명한 조처로 민심이 돌아선 것이다. 광무제는 잠팽을 익주목(益州牧)에 임명하고 항복시킨 군들에 대해서 태수의 직분을 행사하도록 했다. 잠팽이 강주(江州, 사천성 巴縣)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곳의 전융은 식량이 풍부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풍준을 남겨 지키게 했다. 그 스스로는 군사를 이끌고 빠른 길을 이용해 점강(墊江)에 와서 평곡(平曲)을 공격해 쌀 수십만 석을 획득했다. 잠팽의 진격에 위기를 잠지한 공손술이 휘하의 장군 연잠(延岑), 여유(呂鮪), 왕원(王元)과 동생 공손회(公孫恢)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광한(廣漢)과 자중(資中) 지역에서 대항케 하고 또 후단(侯丹)을 파견하여 군사 이만여 명을 거느리고 황석(黃石)에서 대항케 하였다. 이에 잠팽은 적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 가짜 병정을 많이 만들어 설치하고 호군(護軍) 양흡(楊翕)과 장궁에게 이들을 맞서게 했다. 또한 잠팽 자신은 병사를 나누어 일부러 장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강주로 돌아가게 하고 일부는 도강(都江)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후단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한편으로는 새벽과 밤을 이용하여 배로 이천여 리를 가서 곧장 무양(武陽) 지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정예 기병을 파견하여 광도(廣都)에 이르니 이 곳은 성도(成都)에서 불과 수십 리 떨어진 곳이었다. 잠팽군의 행군과 진격은 그 기세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잠팽군의 갑작스런 등장에 적군은 놀라서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애초에 공손술은 잠팽의 군대가 평곡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잠팽이 이미 무양까지 이르렀고, 연잠의 부대를 우회하여 촉 땅을 종횡무진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대경실색하여 갖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하였다. “그는 과연 사람인가 귀신인가.”
갑작스런 최후를 맞이한 잠팽 이때 잠팽이 주둔한 곳의 지명이 공교롭게도 팽망(彭亡)이었다. 글자대로만 보면 팽(彭)이 망(亡)07하는 곳이니 잠팽으로선 꺼림직한 지명이었다. 잠팽이 지명을 알고 진영을 옮기려 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실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날 저녁에 공손술의 자객이 도망쳐 온 노비로 가장하고 투항했다가 잠팽을 찔러 죽였다. 갑작스럽고도 어이없는 최후였다. 잠팽은 제일 처음 형문을 격파하고 무양(武陽)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매우 잘 다스렸다. 당시 군대는 행군하는 도중에 약탈이 빈번했는데 잠팽의 군대는 군기가 엄격하여 조금도 법을 어기는 군졸들이 없었다. 공곡왕(邛穀王) 임귀(任貴)가 잠팽의 위엄과 신의를 전해 듣고는 수 천리 먼 곳에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해 왔다. 그런데 이때 잠팽이 죽게 되니 광무제는 임귀가 헌납한 공물들을 모두 잠팽의 처자에게 주고 시호(諡號)를 장후(壯侯)라고 했다. 촉인(蜀人)들이 잠팽을 가련하게 여겨 무양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잠팽은 평생토록 정벌에 헌신하여 후한의 창업 초창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단지 전투만 능했던 장수는 아니었다. 사태 판단에도 능했고 이를 토대로 상대방을 설득하여 항복을 유도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파촉 평정의 과제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한이 완수하게 되지만 그 실상은 잠팽이 거의 다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잠팽 끝)
01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2 자(字)는 문공(文公). 낭야(琅邪) 불기[不其, 현재 산동성(山東省) 노산(嶗山)] 사람. 왕망의 신(新)나라 말엽에 수천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주변 군현(郡縣)을 공략하여 자칭 오위장군(五威將軍).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왕굉(王閎)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양왕(梁王) 유영(劉永)이 그를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 충절후(忠節侯)에 봉해 청주(靑州), 서주(徐州)를 관할케 했다. 이후, 그의 영역은 확대되고 병력도 증대되었다. 26(건무2)년 유영이 광무제 항복하자 27(건무3)년 광무제가 장보를 동래태수(東萊太守)에 임명했으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제왕(齊王)이라 했다. 29(건무5)년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서자 다시 투항하여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으나 32(건무8)년 처자를 데리고 임회(臨淮)로 도망가 자신의 옛 무리를 모았는데 낭야태수(琅邪太守) 진준(陳俊)에 의해 진압된 후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03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更始)가 선 이후 경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輔漢)장군이라 칭하고 촉군(蜀郡)태수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어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
04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