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순진리회 - 『28수(宿) 신명』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4. 8. 30. 13:32

본문

위(胃) 별을 관장하는 좨준(祭遵) 신명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위수(胃宿)
  위수는 28수 가운데 열일곱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세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3개로 상징 동물은 꿩[雉]이다. 위수의 속성(屬性)은 토(土)이며 음식물로 둘러 싸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는 천상의 식량 창고를 뜻한다. 위수를 의인화하여 서방위토치성군(西方胃土雉星君)이라 하는데, 얼굴은 꿩과 흡사해서 입이 꿩의 주둥이 같고 금갑(金甲)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장극(長戟)01, 머리에는 금관(金冠)을 쓰고 있고 관의 양쪽에 꿩의 긴 꼬리와 같은 긴 깃이 달려 있다고 한다.02

 

 

후한의 창업공신 좨준
  좨준(祭遵, ?-33)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제손(第孫)으로 영천(穎川) 영양[潁陽, 현재 하남성(河南省) 허창(許昌)]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좋아하였다. 좨준은 집안이 부유하였지만 거만하지 않았고 검소하여 화려한 의복을 싫어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자 흙을 지고 무덤을 만들 정도로 효자였다.
  일찍이 현의 관리가 좨준을 모욕하자 자객과 결탁하여 그를 죽였다. 처음에 현의 사람들은 좨준의 성품이 유순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는 그를 두려워했다.
  유수가 곤양대전에서 신(新)나라의 왕심(王尋)을 격파하고 돌아오다가 영양을 지나게 되었다.03 이때 좨준이 현의 관리 신분으로 여러 번 진언하였다. 유수가 그의 용모와 태도를 아껴 문하사(門下史)로 임명하였다. 좨준은 유수를 따라 하북을 정벌하여 군시령(軍市令)04이 되었다. 이때 점령 구역 안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법을 어기자 좨준이 그를 때려 죽였다. 유수가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좨준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주부(主簿) 진부(陳副)가 간언했다.
  “명공(明公, 유수)께서는 항상 군사들을 규율에 따라 바로 잡고자 하셨는데, 지금 좨준이 법령을 받들면서 어떤 것도 피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교령(敎令)이 잘 시행되는 것입니다.”
  유수는 좨준을 용서하고 자간(刺姦)05장군으로 삼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마땅히 좨준을 대비해야 할 것이오! 내 집에 있는 아이가 법을 어기자 오히려 그를 죽였으니 반드시 여러 경들을 사사롭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
  이후 좨준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어 유수를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26(건무 2)년 봄에 좨준은 정로(征虜)장군에 임명되고 영양후(潁陽侯)로 봉해졌다. 좨준은 표기(驃騎)대장군 경단(景丹), 건의(建義)대장군 주우(朱祐), 한충(漢忠)장군 왕상(王常), 기도위(騎都尉) 왕양(王梁), 장궁(臧宮)과 함께 기관(箕關)으로 들어가 남쪽으로 홍농(弘農, 하남성 靈寶縣), 염신(厭新), 백화(柏華, 하남성 낙양시의 남쪽), 만중(蠻中, 하남성 臨汝縣의 동쪽)의 도적들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도적이 쏜 화살이 좨준의 입에 명중하여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병사는 잠시 후퇴하여 사령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병사가 그의 옷자락을 조금 당기자 좨준이 도리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중지시켰다. 전투 중에 부상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일이며, 이런 일로 싸움을 중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좨준은 생각한 것이다. 총사령관의 분투와 독려는 휘하 장졸들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기가 충천한 좨준군이 마침내 도적들을 대파하였다.
  이때 신성(新城) 만중(蠻中)의 산적(山賊)인 장만(張滿)이 험난한 지역을 점거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니 조정에서는 좨준에게 이들을 소탕할 것을 명령하였다. 임지에 도착한 좨준은 산적들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다급해진 장만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좨준은 벽을 굳게 쌓고 응전하지 않았다. 장만이 스스로 포위를 풀 수 없게 되자 염신, 백화에 있던 도적들과 연합하였다. 이 연합의 결과로 염심과 백화의 도덕들이 곽양취(霍陽聚)를 점거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좨준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좨준은 별동대를 곽양취에 파견하여 이들을 격파했다. 이듬해인 27(건무 3)년 봄에 좨준은 계속된 포위로 피폐해진 장만을 공략하여 그를 생포하였다. 애초에 장만은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그 자신은 왕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장만이 최후에 남긴 말은 그가 좨준에게 생포되고 죽기 전에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알려준다. 그가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참문(讖文)이 나를 망치는 구나!”
  참문이란 미래를 예언한 글로 구체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내용이 실린 책을 말한다. 장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혼란한 시대에 아무개가 천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데 빠지지 않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예언서였다. 하지만, 최후에는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 또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좨준은 장만을 참수하는 동시에 그의 처자(妻子)도 처형했다.
  좨준은 다시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을 일으킨 등봉(鄧奉)의 아우 등종(鄧終)을 두연(杜衍)에서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때 탁군(涿郡)태수 장풍(張豊)이 사신을 잡아 가두고 병사를 일으켜 모반하여 스스로 무상(無上)대장군이라 칭하면서 팽총(彭寵,?-29)06과 연합하였다.
  28(건무 4)년 좨준은 주우, 건위(建威)대장군 경감(耿弇), 효기(驍騎)장군 유희(劉喜)와 함께 장풍을 공격하였다. 좨준의 병사가 먼저 이르러 장풍을 공격하자, 장풍의 공조(功曹)인 맹굉(孟宏)이 장풍을 사로잡고 항복했다. 이전에 장풍은 방술(方術)07을 좋아했다. 어떤 도사가 장풍에게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도사는 오채낭(五綵囊)에 돌을 넣고 장풍의 팔꿈치에 매주면서 ‘돌 속에 옥새(玉璽)가 들어있다’고 하였다. 옥새는 천자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장풍이 그 도사의 말을 믿고 마침내 모반한 것이었다. 장풍은 잡혀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당당했는데 도사가 자신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팔꿈치 매달린 돌 속에 옥새가 있다.”
  좨준이 몽둥이로 그것을 깨뜨려 보이자 장풍이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죽어도 한(恨) 될 바가 없구나.”
  장풍의 사례는 앞서 언급한 장만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천자가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비로소 장만과 장풍의 망상이 깨어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리석었고 또한 조심성도 없었다. 이들의 행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주변의 요청도 세 번의 거절 끝에 받아들인 광무제의 그것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대목이다.
  장풍을 토벌한 이후 여러 장군들은 모두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좨준은 광무제의 명으로 양향(良鄕)에 주둔하면서 팽총에 맞섰다. 좨준은 호군(護軍) 부현(傅玄)을 파견하여 팽총의 장수 이호(李豪)를 로(潞)에서 습격케 하여 대파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좨준군과 팽총군은 1년 동안 서로 대치했다. 좨준군이 팽총의 선봉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자 팽총의 무리들 가운데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이 후 팽총이 자신의 노예였던 자밀(子密)에게 피살당하였다. 팽총이 죽고 그의 부하들이 투항하자 좨준이 그 땅을 평정하였다.
  30(건무 6)년 봄. 좨준은 건위대장군 경감, 호아(虎牙)대장군 합연(蓋延), 한충장군 왕상, 포로(捕虜)장군 마무(馬武), 효기장군 유흠(劉歆), 무위(武威)장군 유상(劉尙)과 함께 천수(天水)를 따라 공손술(公孫述,?-36)08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공손술이 천자를 자칭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광무제는 그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외효(隗囂,?-33)09는 공손술의 토벌을 위해 한나라의 병사가 농(隴) 땅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아 핑계를 대고 변명했다. 외효는 천수 지역을 근거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중앙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외효와 같은 이들은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장만, 장풍과 다를 바 없었다. 외효와 이들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겉으로는 광무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킬 위인이었기 때문에 광무제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어떤 조처를 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효의 변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광무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좨준을 제외한 모든 장수들의 뜻은 동일했다.
  “좋습니다. 외효의 임기를 연장해 주고 더욱이 그를 장수로 봉한다면 점차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좨준이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효는 매우 간사한 사람입니다. 지금 만약 병사의 사기(士氣)를 억누르고 시간을 끈다면 그의 사기(詐欺)와 모략이 더욱 심해지고 촉 땅의 경비도 더욱 갖추어질 것이니 지금 진격하느니만 못합니다.”
  광무제는 좨준의 말을 받아들여 그를 외효 토벌의 선봉대로 파견하였다. 외효는 왕원(王元)으로 하여금 농저(隴坻, 감숙성 淸水縣의 북쪽)를 지키게 하였는데 좨준이 그를 격파하고 신관(新關)까지 추격하였다. 여러 장군들이 이르러 외효가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농(隴) 아래로 후퇴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명령을 내려 좨준은 견(汧)에 주둔케 하고 경감은 칠(漆, 섬서성 邠縣), 정서(征西)대장군 풍이는 순읍(栒邑, 섬서성 순읍현), 대사마 오한은 장안에 각각 주둔토록 하였다. 이후로도 좨준은 외효군과 교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30(건무 8)년 가을에 좨준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농으로 진격하였다. 광무제는 동쪽으로 돌아가다가 견에 주둔한 좨준의 진영에 행차하여 병사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춤추고 노래하며 깊은 밤이 되어서야 마쳤다.
  그 때 좨준이 병이 들었는데 광무제는 중인(重茵)10을 하사하였다. 광무제는 다시 좨준에게 명령을 내려 농 땅에 주둔케 하였다. 공손술이 외효를 구원하기 위한 병사를 파견하여 오한과 경감이 패퇴하였으나 좨준은 홀로 퇴각하지 않았다. 광무제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좨준의 공을 치하했다.

 

장군은 여러 해 동안 거듭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모든 병력이 퇴각했음에도 홀로 남았으니 그 공훈과 노고는 찬연하다 할 것이오. 우리 병력이 물러나면서 사전 예고도 없었고, 양식은 준비되지 못했소. 지금에 이르러 이 문제를 합당하게 처결할 것이나 그 힘이 미치지 못할까 두렵기만 하오. 국가11는 장군이 쉬이 옮기지 않았으며 또한 장군에게 남은 힘이 없음을 알고 있소. 이제 비단 천 필(匹)을 보내어 관리와 병사들에게 하사하고자 하오.
 
  33(건무 9)년 좨준이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좨준의 인물됨과 극기봉공(克己奉公)
  일반적으로 ‘열전(列傳)’의 경우에는 해당되는 인사(人士)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누가 언제 죽다. 후손 아무개가 뒤를 잇다’로 종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열전의 성격상 당연한 것인데, 좨준과 같이 부가적인 설명이 따르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그는 당대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좨준의 죽음은 광무제를 비탄(悲嘆)에 젖게 했다.
  좨준은 사람됨이 검소하고 신중하였으며 사사로움을 이기고 공공에 봉사하여[克己奉公] 상으로 하사 받은 물건은 매번 사졸들에게 주어 버렸다. 따라서 그의 집안에는 사재(私財)가 없었다. 그 자신은 가죽 바지와 베옷을 입고 부인은 테두리 없는 치마를 입고 다녀서 광무제는 좨준을 더욱 중히 여겼다. 좨준이 죽자 광무제는 매우 애통해했다. 좨준의 상여가 하남현에 이르자 광무제는 백관(百官)들의 회집(會集)을 명령하는 조서를 내렸다. 광무제의 조서로 백관(百官)들이 모여 좨준의 상여를 영접하였고, 광무제 자신은 소복(素服)을 입고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곡하였다. 광무제는 돌아와 성문에서 좨준을 실은 수레가 지나가자 눈물을 흘리면서 그칠 줄 몰랐다. 상(喪)이 끝나자 광무제는 친히 그의 제사를 태뢰(太牢)12로 지내주었다. 이는 전한(前漢)의 선제(宣帝)가 곽광(霍光)에게 행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광무제는 대장추(大長秋)13, 알자(謁者)14, 하남윤(河南尹)에게 초상을 치르는 모든 일을 돌보게 하고, 대사농(大司農)15에게 명령하여 그 장례비용을 지급토록 하였다. 박사(博士) 범승(范升)은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올려 좨준을 추모했다.

 

신이 듣기로 선왕(先王)은 정치를 숭상하고 선한 일을 밝히었으며 악한 일은 내쳤다고 합니다. 옛날 고조(高祖)는 대성(大聖)이시어서 식견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여 벼슬과 땅을 나누어줌에 아랫사람들과 공적을 나누었으며 공신들을 기록하여 그 아름다운 덕을 기렸습니다. 그래서 공신들은 살아서는 특수한 예의로써 총애 받아 상주(上奏)할 때 이름을 안 써도 되었고 성문을 들 때는 총총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죽어서는 그 봉작(封爵)과 식읍(食邑)을 세습 받아 대대로 후사가 끊이질 않았고 공적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대한(大漢)이 아랫 사람을 후히 대하고 편안히 하는 오래된 덕으로서 여러 대가 지나고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망했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극한 덕으로 천명을 받으시어 먼저 한(漢)의 도(道)를 밝히시고 공신들을 차례로 포상하시고 식읍을 봉해 주시니 조종(祖宗)의 공덕과 부합합니다.
정로장군 영양후 좨준은 불행히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질고 은혜로우신 폐하께서는 그를 위해 슬퍼하고 멀리 하남에까지 마중 나가셔서 슬퍼하시고 통곡하시는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시고 장례 준비와 절차를 관리들에게 의뢰하시고 그 처자에게 중한 상을 내리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죽은 이를 보내심이 산 사람보다 더함이 있고 죽은 이에게 후하심이 산 사람에게보다 지나침이 있으시니 폐하께서 풍속을 바로잡고 교화를 장려하심이 해와 달 같이 빛납니다. 옛날에는 신하가 병들면 임금이 문안가고 신하가 죽으면 임금이 조문 가는 것이 후한 덕이었지만 그것이 해이해진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때에 이르러 이러한 예가 부흥하여 모든 신하가 감동하여 스스로 힘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 좨준은 행실을 닦고 선을 쌓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북으로는 어양(漁陽)을 평정하고 서쪽으로는 농(隴), 촉(蜀)을 물리쳤으며 먼저 농저(隴坻)로 올라가 점령하고 약양(略陽) 깊숙이까지 점령하였습니다. 모든 군대가 후퇴하였는데도 홀로 지키며 어려움을 구했고 병사들의 마음을 제어하여 법도를 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곳에 있던 관리들은 군대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 맑은 이름은 세상에 전해지고 청렴결백함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사 받은 상은 매번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특별한 옷 한 가지 없었으며 집안에는 사적인 재산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형인 좨오(祭午)가 좨준에게 자식이 없어서 첩을 얻어 그에게 보냈는데 돌려보내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의 임무를 맡은 몸으로 감히 후사를 잇는 일에 신경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좨준이 죽기 직전에 소가 끄는 수레에 상여를 싣고 낙양에서 간소하게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했으며, 집안 일에 대해서 묻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임무는 막중하고 가야할 길은 멀어서 그가 죽은 다음에야 끝났습니다. 좨준이 장군이 되어 병사를 선발할 때는 유술(儒術)을 사용하였으며 술자리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에도 반드시 아가(雅歌)
16를 듣거나 투호(投壺)17로써 하였습니다. 또한 공자의 대를 이을 사자(嗣子)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오경대부(五經大夫)를 설치할 것을 주청(奏請)했습니다. 그는 비록 군대에 있더라도 제사 지내기를 잊지 않았으니 예(禮)를 좋아하며 악(樂)을 즐기며, 죽을 때까지 선도(善道)를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禮)에 살아서는 작(爵)이 있고 죽어서는 시호(諡號)가 있어서 작(爵)으로는 벼슬의 높고 낮음을 가리고 시호로는 선악(善惡)을 밝힌다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좨준이 죽었으니 그가 세운 여러 공을 따져보고 시법(諡法)에 따라 예로써 대우해 줌이 마땅합니다. 옛것을 돈독히 하는 국가의 제도를 밝히시어 후손들에게 이를 본받게 하소서.

 

  광무제는 범승이 올린 글을 공경(公卿)들에게 보여주었다. 광무제는 좨준의 장례식(葬禮式)에 다시 참석하여 장군, 제후의 인끈을 하사하고 붉은 수레바퀴로 수레를 장식하게 하고 갑옷 입은 병사들을 진열시켜 상여를 보내 주었으며 시호를 성후(成侯)라 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광무제는 그의 무덤에 가보고 유가족을 위문하였다. 그 후 조회 때마다 광무제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어떻게 좨정로(祭征虜, 좨준)같은 우국(憂國) 봉공(奉公)의 신하를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회 때마다 반복되는 광무제의 탄식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위위(衛尉) 요기(銚期)가 말했다.
  “폐하께서 어지시어 좨준을 애도하며 생각하는 것이 그치지 아니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각기 부끄럽고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요기의 충고를 듣고서 광무제는 비로소 그쳤다. 아직도 많은 과제가 산적한 후한 초기였다. 좨준의 공로가 아무리 크다고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또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광무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었다.
  하지만 광무제의 좨준에 대한 배려는 이어졌다. 광무제는 좨준의 종제(從弟) 융(肜)을 황문시랑(黃門侍郎)18에 임명하여 항상 좌우에 두고자 했다. 그런데 좨준이 후사(後嗣) 없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한 광무제는 융을 언사장(偃師長)에 임명하여 그의 묘소를 돌보게 하였다. 좨융은 광무제의 명으로 좨준의 묘소를 돌보며 사시(四時) 제사를 올렸다.
  광무제는 개국공신들을 세심하게 배려한 군주였다. 그런 광무제였지만 사후에 좨준과 같은 대접을 받은 이는 극히 드물었다. 좨준의 죽음과 관련하여 광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죽지만 좨준과 같은 삶을 영위하다가 그와 같이 세상과 이별한 이는 흔치 않다.(좨준 끝)

 
 

01 극(戟)은 끝이 좌우로 갈라져 있는 창을 의미한다. 과(戈)와 모(矛)가 합쳐져 생긴 무기이다. 걸어서 당기는 용도인 과(과, 戈)와 찌르는 것이 주된 용도인 모(矛), 두 창을 결합하여 어떤 때는 걸어서 당기고 필요에 따라서는 찌를 수도 있는 무기인 극(戟)이 만들어졌다.
02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33.
03 곤양대전과 전한-신-후한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28수(宿) 신명과 광무제 유수-28수 신명 연재를 시작하며-」, ≪대순회보≫ 153호(2014년 2월호), pp.75-76 참조.
04 군시(軍市)는 군대의 주둔지 부근에 형성된 시장으로 사병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취급했다. 군대는 이 시장에 대한 징수권을 행사했고 군시령(軍市令)을 두어 관리, 감독했다.
05 글자대로는 간사한 관리를 감독하여 살피는 것으로 이러한 직책을 맡은 벼슬 이름을 뜻한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따르면 왕망이 좌우자간(左右刺姦)을 두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자간장군은 군대에서 법률을 집행했다.
06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7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행하는 사람)가 행하는 술법.
08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제(更始帝)가 선 이후 경시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장군(輔漢將軍)이라 칭하고 촉군태수(蜀郡太守)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니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
09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30(건무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32(건무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10 수레 안에 까는 화려한 자리.
11 여기서는 광무제가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다.
12 대뢰(大牢)라고도 하는데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소를 통째로 바치던 일, 또는 그 소를 이른다. 원래는 소, 양, 돼지를 함께 바쳤으나, 뒤에는 소만 바쳤다.
13 황후부(皇后府)를 관장하는 환관(宦官) 가운데 최고위 직책.
14 군주의 명령을 전달하는 관직.
15 재정(財政)장관으로 전곡(錢穀)을 관장했다.
16 『이아(爾雅)』에 나오는 시를 노래로 부르는 것으로 유가(儒家)의 전통적인 음악.
17 『예기(禮記)』 「투호경(投壺經)」에 나오는 놀이로 고대인들이 연회때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어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18 진(秦)나라 초기에 설치된 관직으로 ‘황문랑(黃門郞)’이라고도 한다. 궁내(宮內)의 일을 보는 낭관(郎官)으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조령(詔令)을 전달했다. 진한(秦漢) 시기 궁궐의 문이 주로 황색이었던 것에서 ‘황문(黃門)’이라 칭하게 되었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76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