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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 『전경 지명 답사기』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4. 9. 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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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도 진업단과 개간지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종단역사연구팀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 (교운 2장 35절)

 

 

진업단은 무극도 신도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로, 1925년 무극도가 창도된 직후에 창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설목적은 안심·안신의 무극도 취지에 따라 당시 각지의 빈곤한 신도들이 노동생활을 통해 안심(安心)을 구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조직된 진업단은 개간사업, 수리사업, 삼림벌채, 광산채굴 등 여러 가지 사업에 신도들을 알선(斡旋) 종사케 하였다.01 『전경』 교운 2장에 기록된 안면도·원산도 지역에서의 간척사업은 개간사업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 성황정에서 바라본 정읍시 태인면 일대 전경

 

 

개간사업은 안면도·원산도 지역 간척사업 이전부터 있었는데, 그 지역은 주로 『전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구태인 일대’로 보인다. ‘구태인’은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지역으로, 1912년 인근에 ‘신태인’이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생긴 이름이다. 신태인이라는 이름은 기차역 이름으로 먼저 붙여졌다. 1912년 호남선(湖南線)이 개통되면서 당시 태인군(泰仁郡) 북촌면(北村面) (현재 신태인리) 지역에 신태인역(新泰仁驛)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집은 몇 채밖에 없었고 대부분 갈대밭이었던 곳이 이때부터 마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새로 생긴 그 마을과 태인 지역을 구분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시 무극도장이 있던 곳은 구태인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전경』에 기록된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는 무극도장 주변 일대에 무극도 신도들이 개간한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장 주변으로 상당한 면적의 땅이 개간되어 경작지가 생김으로써, 그곳에서 많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후 안면도·원산도 지역 간척사업에 300석이나 되는 많은 곡물의 투입도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극도 개간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에 무극도장 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극도 신도들의 개간활동에 관한 내용을 알고 있다는 분이 계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전설처럼 너무도 오래 전의 역사로만 느껴졌던 진업단의 개간사업에 대한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과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태인 지역 답사를 준비하였다.

 

 

▲ 무극도장 터 주변의 개간지역(출처: 다음 지도)

 

 

드디어 답사 당일. 여주본부도장에서 차로 3시간쯤 달려서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무극도장 터에 도착했다. 이곳을 지날 때면 웅장하고 화려했던 옛 사진속의  무극도장 건물이 머리를 스치며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잠시 도장 터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 오늘 만나보려는 장○○씨 집으로 향하였다. 이분의 조부(祖父)는 『전경』에도 나오는 장득원 씨인데,  태인에 오기 전에는 경북 청도에 사셨다고 한다. 그런데 1925년 무극도장이 건립되기 전에 도주님께서 청도에 들러 몇 달을 머무신 적이 있는데, 그때 그곳에서 도주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이곳 태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때는 무극도의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중요한 직책을 맡아 활동했던 분이기도 하다. 무극도장 터에서 이분 집까지는 3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여서 잠시 후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무렵에 미리 연락했던 터라 장득원 씨 손자께서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인사를 나눈 후 안내를 받아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극도 도인들의 개간활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씀에 따르면, 당시 무극도 신도들의 태인지역에서의 개간사업은 성황산(城隍山), 항가산(恒伽山), 거산(居山) 평야 일대 등 당시 무극도장 주변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 진업단 개간 추정지 위치(출처 : 다음 지도)

 

 

성황산은 높이가 125m로, 태인면 태성리(泰成里)에 있는 태인의 주산(主山)이다. 산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불렀으며, 옛날에는 ‘죽사산(竹寺山)’으로 불렀다. 산 정상에는 3.1운동의 횃불을 밝힌 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기려 세운 성황정이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태인 시내와 태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항가산은 높이가 128m로 태인면 태흥리(泰興里)에 있다. 이 산 중턱인 ‘돌챙이 고개’(도창현)에 무극도장 터가 있다. 또한, 1894년 11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이 이끈 동학 농민군 주력부대가 관군·일본군 연합군과의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전적지이기도 하다. 거산 평야는 태인면 거산리에 있다. 지금은 거산 평야가 개간이 되어 수십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지만, 개간되기 전에는 습지가 많았던 곳이다.

한편 태인면은 무극도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전체 인구가 2~3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나 무극  도장이 건립된 이후에는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서 상당히 많은 무극도 도인들이 이주해 와서 인구가 3만여 명이 넘을 정도로 상당히 큰 지역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국민이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그 시절, 각 지에서 이주해 온 많은 무극도인들의 사정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도주님께서는 그 많은 신도의 생계 걱정에 얼마나 시름이 많으셨을까. 진업단의 창설은 아마도 도주님의 이런 제민(濟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서답바위 앞 진업단 개간지 일대 전경

 

 

또한, 거산 평야에 있던 무극도인들의 경작지 위치에 대한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인근 지역인 거산리에 옛날 이 근처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유명했던 서답바위라고 있는데, 그 바위 앞쪽으로 무극도 신도들이 경작했던 논(진업단 개간 추정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할머니(장득원 씨 부인)와 어머니(장득원 씨 며느리)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좀 더 나눈 후에, 장득원 씨 손자와 함께 무극도 경작지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서답바위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와 오른쪽으로 400여 미터 가다 보면 피향정(披香亭)사거리가 나온다. 눈앞에 호수 위의 정자 하나가 보이는데, 이것이 호남 제일의 정자로 불리는 피향정이다. 이 정자는  신라 정강왕 시대에 태산(泰山: 泰仁의 옛 이름) 태수(太守: 郡守)였던 최치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피향정사거리에서 거산리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경사가 완만한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가 거산 고개이다. 현재 모습의 도로가 되기 전에는 길이 구불구불해서 ‘아리랑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개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원거산’ 글자가 새겨진 돌로 된 마을 표지석이 눈에 띈다.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장득원 씨 손자를 따라갔다. 장득원 씨 손자는 손으로 경사면 아래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옛날에 평평한 서답바위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래쪽으로 내려가 부근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한참 동안 둘러보았으나 그런 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집에 들어가 물어보기로 하였다.

 

 

▲ 섬진강 수력발전소 앞 수문. 이 곳의 물이 낙양취입수문으로 흘러간다.

 

 

마침 집주인이 계셔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서답바위 위치를 안다고 했다. 서답바위 주변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90년 초반이고, 본인은 1960년 초에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계속 살았기 때문에 그 바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곧바로 안내를 받아 서답바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바위는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땅을 조금만 파보면 바위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말씀을 듣고 주변을 살펴보니, 빨래터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위들이 몇 군데 드러나 있어서 이 근처가 빨래터였음을 짐작케 했다. 이 바위 앞으로 있었던 무극도 경작지의 규모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당시 무극도인들의 인원수나 안면도, 원산도 간척지 사업에 투입한 곡물량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수만 평은 되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런데 이 경작지는 무극도는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묘하게도 상제님 공사와도 관련이 있다. 상제님께서 “전북 칠읍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시면서 운암강의 물을 김제, 만경 들판으로 돌리신 공사가 그것이다.02 이후 실제로 동진강 유역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1925년 8월에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된다. 동진수리조합에서는 섬진강에 운암댐을 건설하는 한편, 동진강 유역으로 섬진강의 풍부한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수리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무극도 개간지가 있던 거산평야 일대의 수리사업도 그때 진행되었다. 그 시기는 거산 평야 아래에 있는 낙양취입수문이 1927년 5월에 준공되어 물 공급을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1925년 8월 이후부터 1927년 5월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수리사업과 동시에 개간사업도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수리사업과 개간사업에는 당시 이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무극도 신도들이 상당수 종사하였을 것이다.
몇 번의 답사를 통해 무극도 신도들의 개간활동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그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극도 개간사업의 주축이었던 진업단이 활동한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를 얻었다는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무극도 창도 직후 진업단을 창설하셔서 개간, 수리, 삼림벌채, 광산개발 등 다양한 사업으로 구세제민하시고자 하셨다. 거산 평야의 무극도 개간지도 그런 목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주님의 숨결이 배어 있는 거산 평야를 바라보며, 도주님의 구세제민의 뜻을 새겨본다.

 
 

참고 문헌
『전경』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유사종교』, 최길성ㆍ장상언 譯,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91).
『동아일보』 1929. 3. 5.
장득원 씨 손자(1940년 生) 인터뷰 내용.
서답바위 터 주인 이○○ (1962년 生) 씨 인터뷰 내용.

 
 
 

01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유사종교』, 최길성ㆍ장상언 譯,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91), p.271 참조.
『동아일보』, 1929. 3. 5 참조.
02 공사 1장 28절 참조.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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