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말, 부암동에 계셨던 도전님께서는 한강 하류의 명산인 수리산 고개를 넘어 당시 화성군 반월면(半月面) 속달리(速達理)에 위치한 수리사(修理寺)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시고 1969년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그 이후에도 수리사를 자주 왕래하셨는데, 그때 말씀이 “공부할 때는 몰랐는데 공부 마치고 나중에 보니 여기가 반월면 속달리 수리사이더라.” 하시면서 그 지명이 우리 도와 인연이 깊음을 암시하셨다.
반월(半月)은 ‘반달’로서 『채지가』의 「달노래」에 “보름달은 온달이요, 나흘 달은 반달일세. 섣달이라 초나흘날 반달 보고 절을 하네.”처럼 12월 4일 탄강하신 도주님과 연관된다. 속달리(速達里) 수리사(修理寺)는 ‘이치를 닦아서 빨리 이룬다’는 뜻으로 당시 태극도를 이궁하신 도전님께서 서울에 새 도수를 펼치고자 하시는 애타는 심중을 헤아리게 해준다. 그래서 이번 답사를 통해 수리산의 산세와 당시의 지명을 밟아 가면서 도전님의 수리사 공부가 도수에 따른 중요한 행적임을 상기(想起)하고자 한다. 현재 군포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대야동(1969년 당시 화성군 반월면)이 둔대동·도마교동·대야미동을 관할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행정적 변화를 거쳐 왔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에 속했다가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화성군 반월면으로 있다가 1994년 군포시에 편입되었다.01
우리 일행이 여주를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따라가다가 부곡IC 부근을 지나가니 우측으로 산 정상에 공군기지가 있는 군포 수리산이 펼쳐졌다. 평소 이 도로를 지날 때는 무심히 지나쳤지만, 오늘은 유난히 산 정상의 공군기지가 있는 수리산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수리산은 한강 남쪽에서 서울을 감싸고 있으며 남북으로 능선이 길게 뻗어 있는데, 주봉인 태을봉(489m)을 중심으로 슬기봉(451.5m), 고깔봉(451.1m),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의 5개의 봉우리가 속해있다. 수리산 산세는 안양 쪽 삼성산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 터진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다. 말발굽 북동쪽 끝 줄기에 관모봉이 있으며 수리산 최고봉인 태을봉은 관모봉 남서쪽에 있다. 태을봉에서 반 바퀴 돌아서면 서편 줄기 중간에 독수리 바위인 수암봉이 있으며 산줄기가 휘돌아가는 슬기봉과 고깔봉 일대에 공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수리산의 산줄기 능선을 지도상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수리산 산줄기가 독수리 형태, 곧 독수리가 막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형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수리산 줄기를 한 마리의 독수리라고 볼 때, 태을봉-관모봉 능선을 오른쪽 날개, 수암봉 능선을 왼쪽 날개로 해서, 마치 독수리가 웅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수리’는 우리의 하늘을 지키는 ‘공군’의 상징이기도 한데, 앞서 말한 독수리의 몸통에 해당하는 고깔봉과 슬기봉 능선에 공군기지가 있다는 점이다. 이 공군기지 바로 아래에 수리사가 자리하고 있다.
잠시 후, 우리는 군포IC를 통과하여 반월호수에 도착했다. 1969년 당시 화성군에 속했던 반월면은 1994년 군포시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기 때문에 ‘반월’과 연관된 ‘반월호수’에서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반월호수는 1957년 조성한 저수지로 1994년 대야동이 군포시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화성군 반월면에 속했다. 지금은 반월호수를 경계로 군포시와 안산시의 행정구역이 나뉜다. 이곳은 저물녘의 노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해서 ‘반월낙조(半月落照)’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잔잔한 호수에 비치는 주변의 산 그림자와 햇빛을 감상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1970년대 초, 수리사로 가는 승용차 도로는 반월호수 앞에서 영동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여 둔대동 둔대로를 타고 바로 직진하는 길밖에 없었다. 도전님께서는 1968년 말부터 1974년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산본동에 내리신 다음 도보로 수리산 고개를 넘으셨다. 그러시다가 1974년 중고 승용차를 구입하시면서 이 둔대로 길을 이용하시게 된다. 그때는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길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갈치저수지를 지나 군포 제4경인 덕고개 당숲을 통하는 속달로가 새로 나 있다.
▲ 납덕골 마을 앞
우리는 수리사를 향해 좁은 둔대동 둔대로를 달렸다. 2km쯤 지나니, 둔대로에서 속달동 속달로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속달로로 이어지는 곳에 납덕골이라는 벽화마을이 나타났다. 사방이 산으로 뒤덮인 산골마을은 한 사람이 시작한 붓질이 번져 예술마을로 거듭났다고 한다. 지도상으로는 ‘납다골’, ‘납작골’ 등의 표기가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납덕골’이다. 산속 넓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넓다’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자로는 ‘들일 납(納)’, ‘큰 덕(德)’으로 표기한다. 현재 납덕골 벽화 마을은 수리산을 관통하는 수원~광명 구간 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민가 일부가 철거되었고 수리사로 오르는 길가로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건물 및 벽이 사라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속달로는 납덕골 입구에서부터 수리사 앞까지 이어진다. ‘속달’의 한자표기는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으로, ‘속’은 수리산 골짜기 안(內, 속)을 뜻하며 ‘달’은 땅이나 마을을 지칭한다. 따라서 속달이란 수리산 안쪽의 마을을 의미한다. 달리 이곳이 산속 깊숙이 있어도 과거에 수원과 안산의 관청을 이어주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기 때문에 “안이라도 소통이 잘된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02 납덕골에서 속달로를 따라 조금 오르니 수리사 입구 삼거리가 나왔다. 이 삼거리는 수리산을 사이에 두고 대야동과 산본 신도시를 잇는 임도(林道)오거리 고개와 통한다. 임도오거리 고개는 예전에 쑥고갯길이라고 부르며 대야동 사람들이 안양 장에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였다고 한다. 1968년 말 겨울, 도전님께서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산본동에 내리셔서 도보로 눈 덮인 이 쑥고개를 넘어서 수리사로 들어가셨다. 그 이후 서울 중곡 도장에서 오고 가실 때에도 항상 이 쑥고개를 넘으셨다. 지금은 도전님께서 넘으셨던 쑥고갯길이 수리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주변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임도길이 되었다. 당시 산본동에서 안산이나 수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고개 길이었을 것이고, 특히 걸어서 수리사로 들어가는 길은 이 보다 빠른 길은 없었던 것 같다. 납덕골에서 수리사 앞 삼거리까지는 그래도 평탄했지만, 삼거리에서 수리사 입구까지는 매우 가파르고 구불구불하였다. 1976년까지도 이곳은 도로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오면 흙이 떠내려가 곳곳에 개울물이 흘러넘쳤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수리사를 자동차로 자주 왕래하셨는데 도로가 좋지 않아 도인 10여 명을 보내어 수리사 진입로를 몇 번 보수하게 하셨다. 그 당시에는 길만 닦았고 전체 도로포장은 그 후 정부에서 해주어서 지금은 차량으로 쉽게 출입할 수 있다. 당시 수리사 진입로 보수 공사에 참여했던 분은 “이 지역이 인적이 드문 청정구역이라 개천에서 가재를 많이 잡아 맛있게 끓여 먹었다”고 추억한다. 수리사는 수리산 좌우 능선이 번갈아 빗장을 치듯 막고 있어서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리사 진입로를 막고 있는 앞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풍수상으로 보아도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을 앞산이 열쇠를 채우듯이 불쑥 튀어나와 막고 있다고 하여 이 전체 형세를 자물쇠 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찰(古刹)이 오랜 세월 동안 자물쇠에 채워진 것처럼 닫혀져 있을 때 도전님께서 방문하신 것이다. 그래서 도인들은 도전님께서 그 잠겨진 자물쇠을 풀고 수리사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 입구를 막고 있는 앞산
수리사 일주문 앞에 이르자 양쪽의 산줄기와 숲이 확 트이면서 넓고 양지바른 천년 고찰의 명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찰 바로 뒤로는 가파른 고깔봉과 슬기봉 능선이 병풍을 치고 있는 듯 아늑하게 수리사를 감싸고 있었다.
현재 수리사는 군포시의 대표적인 종교문화유산으로 1988년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성견(性見)스님이 수리사 주지로 부임(1997~2009)하면서 수리사는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고 전통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수리사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오백나한전과 삼성각, 2003년에 대웅전, 2006년에 요사채, 2007년에 공양간을 신축하여 전통사찰로서의 도량(道場)을 갖추게 되었다.03 그래서 현재의 수리사의 모습은 도전님께서 공부하실 당시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수리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그리 많지 않고 단지, 『고려사』04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05에 대체로 단편적인 내용만이 전한다. 사찰에 전하는 구전으로는 “창건주는 미상이고 성품을 닦는 성지(聖地)의 절이라 하여 수리사라 이름하였고 절 뒤편 북쪽 산에 부처님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수리산을 견불산”06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어 왕손인 운산대사가 뼈를 깎는 정진으로 마침내 부처님을 친견해서 산 이름을 ‘견불산’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07 수리사는 고려시대에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고지도인 『동여비고(東輿備攷)』를 보면 수리사는 보이지 않고 바로 옆의 수암봉 아래 원당사가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안산(安山)의 옛 관청이 있었던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원당사가 수리사 보다 더 융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두 사찰은 폐허가 되었고 원당사는 군사지역으로 복구가 불가능하여 현재 수리사만이 명맥을 유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수리사 전경(2016년)
수리사에 도착하자 먼저 도전님 공부하신 곳을 찾았다. 도전님의 공부 장소는 수리사 건물의 오른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위에는 공군기지가 보이고 공군기지 옆 골짜기에는 부처모양의 바위가 있다. 그 부처 바위와 일직선상에 도전님의 공부 처가 위치하며 그 아래 일주문 앞에서 예전의 신도들이 부처 바위를 향해 합장하고 올랐다고 한다. 일주문 앞에서 도전님 공부 처 바로 위를 올려다보니 희미한 돌 모양이 보인다. 지금은 군사지역이라 접근할 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다. 도전님께서 공부하신 곳은 수리사의 최고 명당이라고 한다. 당시 돈 많은 사람들이 이 터를 구입하려고 하였지만 청운 스님은 팔지 않고 있었다. 그럴 때 도전님께서 요사채에서 주문하면서 공부하시는 것을 보고 스님은 보통 분이 아님을 직감하고 도전님께 공부 장소로 사용하시라고 자청해서 그 터를 내어 주었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도인들을 시켜서 이곳에 흙벽돌을 찍어서 방 2칸에 부엌이 하나인 초가삼간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당시 도인인 윤 목수08를 불러서 처마와 내부 도배를 마무리하게 하시고 바로 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이 터는 수리가 머리를 내리꽂으면서 먹이를 낚아채는 형상의 명당으로 지금까지도 건물을 개량하여 스님들의 공부처로 쓰고 있다.
도전님께서는 추운 겨울, 방 한 칸에 화로 하나를 놓고 문을 걸어 잠그시고 밤낮으로 공부를 하셨다. 납폐지를 화로에 계속 소지하면서 49일 동안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방 안의 연기 속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힘드셨으면 공부를 마치신 후 “나도 책임 때문에 하는 거지, 나를 위한 일이라면 못했을 것이다”라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당시 청운 스님도 저녁에 잠을 안 자고 도전님 공부를 밖에서 지켜드렸다고 한다. 도전님께서 수리사를 처음 방문하셨을 때, 청운스님은 6.25로 폐허가 된 수리사에서 노모를 모시고 아주머니와 아들과 함께 수도생활 중인 대처승이었다. 당시에는 산신각과 현 법당 자리 앞의 요사채 왼쪽에 조그만 임시 건물만이 있어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사찰이었고 신도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리사를 중창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할 때 청운 스님은 도전님과 인연이 되어 법당과 수리사 진입로 작업 등을 통해 수리사 중창에 도움을 얻게 된다. 1972년 도전님께서 대순진리회 현판식을 하고 임원을 개편하실 때였다. 당시 한창 도장 공사 중이어서 일꾼이 많은 것으로 여긴 청운 스님은 도전님께 수리사 법당(대웅전) 중창을 부탁하였다. 도장 공사로 바쁜 와중에도 도전님께서는 당시 윤 목수와 일꾼들을 보내셨다.
원래 윤 목수는 법당 크기를 9자 1칸09으로 하여 마름10할 목재를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이튿날 도전님께서 10자 1칸 길이로 나올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다행히 윤 목수는 목재를 여유롭게 두었기 때문에 10자 1칸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운 스님은 옛날 법당 있던 자리에 법당을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전님께서 몇 번 터를 둘러보시더니 “첫 줄을 여기다 놓고 줄을 띄워라”고 하셨다. 윤 목수는 그 첫 줄을 중심으로 10자 1칸으로 줄을 놓아 표시하고 주춧돌 구멍을 팠다. 얼마 파지 않아 모두 12개의 주춧돌이 나왔는데 그것은 모두 신라시대 대웅전 자리였던 10자 6칸의 주춧돌이었다. 그러자 청운 스님은 도전님의 비범하심에 탄복하며 “선생님께서 신라시대 법당 터를 찾아주셨다”하면서 뛸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법당 공사는 두 달(음력 8, 9월)이 걸렸고 도전님께서는 그 법당을 짓는 동안 오가시면서 살펴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그 법당이 헐리고 2003년에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수리사는 청운 스님이 개인 사찰로 지키고 계실 때까지는 태고종이었지만 1988년 조계종 전통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1988년쯤 청운 스님은 수리사를 나오기 위해 군포에 포교당(50평 규모)을 지었는데 그 포교당도 도전님께서 목수를 보내 도와 주셨다고한다. 후에 도시개발로 인해 안산으로 옮기게 되었고 160평 규모의 구룡산 천수사를 개창하였다. 청운 스님은 30년 동안 수리사를 중창하고 수행하다가 1990년 천수사에 모든 것을 회향하고 열반하였다. 현재는 청운 스님의 아들인 지허(智虛) 스님이 천수사의 주지로 있다. 지허 스님은 수리사 진입로 공사 때에 도전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포천 대진대학교 공사 때 건물 30개 동이 한꺼번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기억하였다.11 수리사를 한 바퀴 다 돌아본 후,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수리산의 산세와 수리산을 경계로 나눠진 안산시, 안양시, 군포시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수리사 좌측 등산 길로 수리산 등반에 올랐다.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 150m 쯤 오르니 산 정상이 나타났다. 거기서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수암봉과 안산시가 선명히 내려다 보이는 고깔봉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리산의 지명은 수암봉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수리산의 지명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안산의 주산(主山)인 취암(鷲岩: 수암봉) 유래설12이다. ‘수암봉’이라 부르는 취암의 ‘취(鷲)’ 자는 ‘독수리 취’다.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에도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이 있는데 ‘독수리 취’자를 일컬어 수리(修理)라고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리가 고깔봉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수암봉의 모습에서 독수리 모양의 윤곽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비상하는 독수리 모습은 안산시 부곡동 방면에서 북쪽의 취암을 향해 바라보면 거대한 검둥수리가 남쪽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 듯한 모습이 드러난다.
수암봉을 바라보면서 고깔봉과 슬기봉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다시 오르다보면 태을봉이 바라다 보이는 슬기봉 정상이 나타난다. 슬기봉에서 바라본 수리산의 최고봉인 태을봉(489.2m)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었다. 마치 큰 뱀이 꿈틀거리면서 새을(乙)자 모양으로 앞을 향하는 것 같았다. 태을(太乙)은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본체 즉 천지만물의 출현과 성립의 근원을 뜻한다. 풍수지리에서는 큰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 내리는 모습을 매우 귀한 지상(地相)으로 꼽는데 그런 현상을 천을봉, 태을봉이라 한다. 한편, 태을봉 정상에서 북쪽의 관악산을 바라보며 삼국시대부터 한강 이남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슬기봉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리사를 감싸고 있는 고깔봉으로부터 슬기봉을 타고 임도오거리로 내려오니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모되었다. 수암봉과 태을봉을 가지 않았는데도 길이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3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다. 우리 일행은 임도오거리에서 잠깐 쉬었다가 도전님께서 1968년 말 이후 수리사를 향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수리사 앞 삼거리에서 답사를 마쳤다.
▲ 슬기봉에서 바라본 태을봉
도전님께서는 태극도를 이궁하시고 서울에 올라오셨다가 1968년 말 당시 화성군 반월면 속달리에 있는 수리사에 들어가셨다. 당시의 지명이 도전님께서 서울에 새 도수를 펼치고자 하시는 애타는 심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수리사는 수리산의 최고 명당으로 고깔봉과 슬기봉 능선이 병풍처럼 서있고 좌우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싸 안은 천혜의 고찰이었다. 이곳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신 도전님께서는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번 답사를 통하여 도전님께서 공부하신 수리사와의 인연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도수에 의한 중요한 행로였음을 알 수 있었다.
★ 본 답사기는 2003년도에 몇 몇 임원들의 인터뷰한 내용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습니다.
01 군포시사편찬위원회, 『군포시사 2』, (경기 일산, 2010), pp. 156~157. 02 군포시사편찬위원회, 『군포시사 별책 1』, (경기 일산 2010), p.170. 03 수리사 중창불사 비구성견 공덕비. 04 『고려사』권129 최충헌 조(崔忠獻條)에 “흥왕사(興王寺),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 안양사(安養寺), 수리사 등의 중으로서 종군한 자들이 최충헌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0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주목(廣州牧) 불우조(佛宇條)에 “수리사는 수리산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06 수리산 수리사 사적기(事蹟記). 07 군포시사편찬위원회, 『군포시사 1』, (경기 일산 2010), p.301. 08 태극도 때부터 목수 일을 맡아 하셨던 도인. 09 9자(2m 70cm) 길이의 1칸 방을 말한다. 10 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치수에 맞도록 재거나 자름. 11 인터뷰, 지허 스님(청운스님 아들, 現 안산 천수사 주지), 2011년 07월 29일. 12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 「안산군」편 “진산을 취산이라 한다(鎭山曰鷲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