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훈사의 말사(末寺)인 정양사(正陽寺)는 금강산 정맥(正脈)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양사는 지대가 높고 동쪽이 탁 트여 있어 금강산 내외의 뭇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망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표훈사와 더불어 600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짓거나 중수(重修)되었다. 정양사의 중심건물인 반야전(般若殿) 앞에는 약사여래석불상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들보를 하나도 쓰지 않은 육각당(六角堂)인데, 기둥 위 안팎으로 공포(栱包)01를 여러 겹 짜 올려 천장을 대신한 점이다. 육각 평면이라는 건축적 기교와 더불어 지붕 꼭대기의 화강암을 연꽃 모양으로 다듬어 올린 것이 이채를 띠고 있다.
■ 정양사 약사전 전설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왕사(王師: 국왕의 스승이 된 큰스님에게 주던 칭호) 조형이 정양사의 약사전을 다시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스님들이 모여 절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이 그곳에 찾아왔다. 일터에 있던 스님들이 그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는 아이냐? 또 여기에는 무엇 하러 왔느냐?” “저의 이름은 용화라 하옵고 강릉에 살고 있습니다. 듣자니 이곳에서 약사부처님의 전각(殿閣)을 다시 짓는다 하기에 저도 목수 일을 돕자고 왔습니다. 저에게 목침[부재(部材)02의 일종] 깎는 일을 맡겨주십시오.”라며 소년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나이를 물어본즉 올해 16살이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소년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을 우려하여 그에게 일을 맡기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 솜씨를 한번 보고 나서 일을 시켜달라고 하더니 큰 통나무 하나를 골라내어 잠깐 사이에 몇 개의 토막을 만들었다. 그런 연후에 다시 손질을 계속하더니 목침으로 쓸 만한 부재들을 깎아 놓은 것이었다. 그 솜씨가 날래고 익숙한 점은 몇 십 년 동안 목수 일을 한 사람 못지않았다. “어디서 배운 재간인지 정말 훌륭하구나.”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소년의 청을 쾌히 승낙하였다. 그는 날마다 수십 개의 목침을 깨끗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다. 얼마 안 가서 목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서 그것을 쌓아놓은 게 마치 자그마한 산더미처럼 보였다. 너무도 감탄한 왕사와 스님들이 의논하기를 “우리 저 애가 만든 목침 하나를 몰래 감추어봅시다. 그러면 이 소년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 수 있을 것이오.” 하며 슬그머니 목침 한 개를 숨겨놓았다. 얼마 후 부재가 모두 마련되자 그것들을 맞추어 전각을 세울 때가 되었다. 소년 목수는 자기가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목침들을 종류별로 다시 갈라놓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왜 그러냐?” 하고 사람들이 묻자 소년은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저는 지금까지 몇 겁03을 두고 부처를 위해 일해 왔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소한 일에서도 단 한번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저의 성의가 모자란가 봅니다. 분명히 수효를 헤아리며 목침을 만들었는데 하나가 부족하네요.” 여러 사람들이 감탄하며 감추어 두었던 목침을 가져다주었다. 소년은 “나는 남해에 사는 용의 아들인데 사라가용왕의 명령을 받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하더니 그 자리에서 그만 자취를 감추자 아무리 찾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정양사의 약사전 천장을 짜 올린 구조물 가운데 나무토막 목침 하나가 비어 있다. 이에 대해 소년 목수가 한 번 잃어버린 목침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전각을 지을 때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천일대 전설 - 하루세끼수좌
정양사 부근에는 예로부터 천일대, 개심대, 진헐대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망대들이 있다. 이곳은 높이 800여 m밖에 안 되는 산중턱이지만 사방이 탁 트여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환히 볼 수 있고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전망은 더욱 좋아진다. 이들 중 천일대와 관계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600년에 백제의 중 관륵이 자기의 벗인 용운과 함께 금강산 도솔봉의 산허리에 8방(方) 9암자를 짓고 절간의 이름을 ‘정양(正陽)’이라 하였다. 그 후 정양사의 스님들은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30년을 기한으로 하루에 한 끼씩만 먹으면서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여 불도를 닦기로 했는데 여기에 천 명의 스님들이 참가하였다. 그들 중 뒷바라지를 맡은 무착이란 스님이 있어 매일 천 명의 스님들이 한 끼씩 먹을 음식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는 이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여러 스님들에게 간곡하게 청했다. “나는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하루 한 끼만 먹어서는 정말 그 일을 감당해낼 수가 없소. 그러니 여느 때와 같이 하루 세 끼를 꼭 먹어야만 하겠소. 여러 스님들은 나를 ‘하루세끼수좌’라 불러주시오.” 이때부터 여러 스님들은 그에게 조롱삼아 ‘하루세끼수좌’라고 불렀다.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는 맑고 화창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는 가운데 남쪽 언덕 위의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세끼수좌는 빨리 나오라.” 여러 스님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공양 맡은 중이 허위를 일삼는 수좌이기 때문에 그 죄가 커서 하늘이 이제 벌을 주려나보다.”라며 말하였다. 모두 두려워 마지않았는데 공양을 맡은 무착만은 함박웃음을 띄우며 나섰다. 그가 남쪽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뒤편의 골짜기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정양사의 반야전과 약사전만 남고 8방 9암자와 999명의 스님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무착은 “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도 있는가!” 하면서 혼자 깊이 탄식하다가 문득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즉시 자리를 잡고 사색을 거듭하였다. 그가 깊이 사유하는 경지에 이르러 하늘세계를 우러러 보니 999명의 스님들은 이미 도솔천에 가 있었고 8방 9암자는 바다 속의 용궁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착 자신만이 30년 동안 남들처럼 공을 들이지 않지만 결국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양을 맡은 스님이 이 세상에 혼자 남으면서 좀 뒤늦게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정양사 8방 9암자와 천 명이 수행한 사실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날 이후 무착이 봉우리 위에 초막을 짓고 14년간이나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후에 정양사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정양사 서남쪽에 있는 ‘천일대’는 이렇게 천 명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하여 ‘일천 천(千)’과 ‘한 일(一)’ 자를 써서 천일대(千一臺)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