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丁未]년 여름, 정읍의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며 공사를 보시던 상제님께서는 정읍 교동(校洞)에 사는 황응종의 집에서도 여러 날 머무시며 공사를 시행하셨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산하(山河)의 대운을 거두어들이시는 공사를 행하셨는데, 밤에 백지로 고깔을 만들어 황응종에게 씌우시고 “자루에 든 벼를 끄집어내서 사방에 뿌리고, 백지 120장과 양지 4장에 글을 써서 식혜 속에 넣고 인적이 없을 때를 기다려 시궁 흙에 파묻은 후에 고깔을 쓴 그대로 세수하라.”고 명하시니 황응종은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랬더니 별안간 양 눈썹 사이에 콩알과 같은 사마귀가 생겼다. 황응종은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살펴보았더니 간밤에 사방에 뿌렸던 벼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 상제님께서 황응종의 딸에게 “앞마당에 볏짚을 깔고 청수를 올리라.” 하셔서 그 딸이 곧 청수를 동이에 넣어 올렸는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며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나 청수 동이를 놓은 다섯 자 가량의 둘레에는 한 방울의 빗물도 없었다. 또 상제님께서는 구름을 자유자재로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는데, 담뱃대를 들어 태양을 향해 돌리시면 그에 따라 구름이 해를 가리거나 해가 나오거나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다시 정읍을 두루 다니시며 공사를 행하셨다. 그 무렵 황응종의 이웃에 사는 손병욱(孫秉旭)의 아내가 입맛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손병욱은 이웃 사람 황응종의 집에서 상제님께서 공사 보시는 것을 참관한 뒤 그 신성하심에 감동하여 상제님을 지성껏 모시게 되었으나, 그의 아내는 남편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었던 터였다. 박공우는 손병욱의 아내가 사경에 처한 사실을 알고 상제님께 아뢰면 곧 병을 낫게 해주시리라 여겼다. 얼마 후 박공우는 상제님을 모시고 교동 근처 와룡리(臥龍里)01까지 오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자, 그는 상제님께 “저희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였다. 상제님께서 세 번을 되물으셨는데 박공우도 세 번을 연달아 같은 대답을 하자, 상제님께서는 교동 황응종의 집으로 가셨다. 그리고 곧바로 이웃 손병욱의 집에 들르셨다. 상제님께서는 손병욱에게 돈 세 돈02을 가져오게 하시고 박공우에게 맡기신 뒤, 다시 손병욱에게 두 냥03을 더 가져오게 하시어 역시 박공우에게 보관토록 하셨다. 그러시면서 손병욱의 아내를 앞에 부르시어 앉히시고는 “왜 그리 하였느냐?”고 세 번을 꾸짖으시면서 고개를 돌리시고 “다른 죽을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셨다. 손병욱이 상제님께 올릴 술을 준비하려고 하자, 상제님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얼마 뒤에 손병욱 아내의 모친이 상제님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가져와 상제님께 올리니 상제님께서 그 술을 드셨다. 상제님께서 다시 황응종의 집으로 돌아오셔서 밤을 새우시고는 다음날 새벽에 동곡으로 길을 떠나셨다. 그때 뒤를 따르던 박공우는 상제님으로부터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과연 손병욱의 아내는 곧 병이 나았으나 그로부터 잉태하지는 못하였다.
이해 여름 안내성(安乃成, 1867∼1949)도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안내성은 상제님으로부터 “불의(不義)로써 남의 자제를 유인하지 말며, 남과 다투지 말며, 천한 사람이라 천대하지 말며, 남의 보화를 탐내지 말라. 보화(寶貨)라는 글자 속에 낭패(狼狽)라는 패자(貝字)가 들어 있느니라.”,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先靈)의 향화(香火)와 봉친(奉親) 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는 교훈을 받았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이제 천하에 물 기운이 고갈하였으니 수기(水氣)를 돌리리라.” 하시고 정읍 비룡촌 뒷산 피란동(避亂洞)04에 있는 안씨(安氏) 재실(齋室)에 가셨다. 그곳의 우물을 대(竹) 가지로 한 번 저으시고는 안내성에게 “음양이 고르지 않으니 재실에 가서 그 연고를 묻고 오너라.”고 이르셨다. 그가 명하신 대로 재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재실을 지키던 사람은 죽고 그 부인만 홀로 남아 있었다. 안내성이 상제님께 이 사정을 고하자, “딴 기운이 있도다. 행랑에 가 보라.” 하시니 안내성이 가보고 와서 “행랑에 행상(行商)하는 부부가 와 있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이를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재실 청상에 오르시어 종도들로 하여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만수(萬修)’를 크게 외치게 하셨다. ‘만수’는 28수 중의 하나인 다스리는 신명이다.05
곧이어 상제님께서 “이 중에 동학가사를 가진 자가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종도들 중 한 사람이 동학가사집을 상제님께 올렸다. 상제님께서 동학가사집의 중간을 펼치시고 ‘시운 벌가벌가기측불원(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것이 어길 바 없으나 이는 도시 사람이오,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의 일만을 쉽게 알고 심량 없이 하다가 말래지사(末來之事)가 같지 않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06를 읽으셨으니,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시경(詩經)』에서 노래하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는 법은 먼 곳에 있지 않네.”라고 하였다. 도끼자루를 베려면 바로 그 나무를 찍는 도끼에 달려있는 자루에 준해서 나무를 베면 되니, 도끼자루를 베는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앞에 있다. 이와 같이 내 앞에 있는 일이라면 너무 쉽기 때문에 어기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일을 쉽게 알고 깊이 헤아려보지 않다가, 끝내 일이 생각 같이 되지 않는다면 그 아니 한이 되겠는가?’07 그러자 갑자기 뇌성이 대발하여 천지가 진동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모든 사람이 혼몽하여 쓰러지자 상제님께서는 안내성을 시켜 이들을 일으키게 하셨다. 이 공사에 따라 말라가던 천지에 장차 수기가 돌게 되었는데, 상제님께서는 이에 대해 “천지에 수기(水氣)가 돌 때 만국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통어(通語)하게 되나니 수기가 돌 때에 와지끈 소리가 나리라.”고 알려 주셨다.
01 現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괴동(槐洞)마을. 와룡마을과 신기(새터)마을이 합쳐져서 괴동마을이 되었고, 와룡마을은 괴동 남쪽에 있었다.(『한국지명총람12-전북편(하)』, 한글학회, 2003, p.447. / 임남곤, 『향리지』, 2002, p.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