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회(劉政會, ?~635)는 골주(滑州) 조[胙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연진(延津)] 사람으로 당 창업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인물이다.
유정회는 수(隋) 대업[大業 :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616] 연간에 태원(太原)의 응양부사마(鷹揚府司馬)로 있다가 군사를 이끌고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휘하로 들어왔다.
당을 세운 고조 이연은 617년[대업(大業) 13]에 태원 유수(太原留守)에 임명되었다. 수양제는 자신 주변의 세력이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였는데 이연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수양제에게 ‘이씨가 마땅히 황제가 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권고한 방사(方士)01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연은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수양제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수양제는 이연을 태원 유수(太原留守)로 임명하면서도 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부유수(副留守)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는 수양제의 이런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중국 전역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이연이 태원 유수가 되던 해에 마읍(馬邑, 현재 山西省 朔縣) 교위(校尉) 유무주(劉武周, ?~622)02는 어지러운 정세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무리를 모으니 그 세력이 만 명이나 되었다. 유무주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돌궐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니 돌궐은 유무주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유무주는 돌궐의 무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산서성 북부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울지경덕[尉遲敬德 :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과 송금강(宋金剛, ?~620)03에게 명령을 내려 남침(南侵)을 감행했다. 이때가 619년[무덕(武德) 2]이다.
유무주가 반란을 일으키고 세력 확장을 꽤한 지역은 태원 유수의 관할 구역으로 이 지역은 북으로는 돌궐에 맞닿아 있고 남으로는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연결되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이외의 지역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유무주의 반란은 이연으로 하여금 거병(擧兵)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이연으로선 수나라 중앙 정부의 명령이 실질적인 효력을 상실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수의 권한으로 유무주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이연이 병력을 소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사들이 크게 모이자 왕위와 고군아는 이연이 모반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연을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왕위와 고군아의 움직임은 너무 공공연하여 곧 이연에게 알려졌다. 진양(晉陽) 향장(鄕長)인 유세룡(劉世龍)이 왕위와 고군아가 이연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은밀히 이연에게 고한 것이다.
“왕위와 고군아가 진사(晉祠)의 기우제를 틈타서 이롭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합니다.”
이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이연이 이세민으로 하여금 진양궁(晉陽宮) 궁성 밖에 군사를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연이 왕위, 고군아와 같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때 유문정(劉文靜)04이 이연에게 은밀한 고발장이 있다면서 유정회를 불러 들였다. 왕위와 고군아가 고발장을 보려고 하자 유정회가 말했다.
“이는 부유수(副留守)에 관한 것이니 오직 당공(唐公, 이연)만이 살필 수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한 고군아가 소리쳤다.
“이것은 곧 반란자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잠시의 소란이 있었지만 곧 진압되었다. 이연은 곧 왕위와 고군아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런 다음에 군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당 창업의 실질적인 첫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유정회는 큰 공을 세웠고 대장군부(大將軍府)가 설치되자 호조참군(戶曹參軍)이 되었다.
유정회는 무덕[武德 : 고조 이연의 연호로 618~626] 초에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임명되어 태원을 지켰다. 유정회가 변방의 정사를 평화롭게 잘 살펴보니 멀리 있는 오랑캐나 가까이 있는 자들도 기꺼이 복종했다. 그런데 유무주가 병주(幷州)를 침략하고 진양 지역 호걸들이 모두 유무주에 호응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유정회는 유무주의 포로가 되었는데 매번 적의 형세를 몰래 조정에 보고했다.
유무주가 토벌된 이후 유정회는 관직과 작위를 회복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와 광록경(光祿卿)을 거쳐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다.
유정회는 정관[貞觀 : 당태종의 연호로 627~649]초에 홍주 도독(洪州都督)으로 옮겨가 있다가 633년(정관 7)에 그곳에서 죽었다. 유정회가 죽으니 당태종이 친히 조서를 내려 말했다. “유정회는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날에 남다른 공적을 세웠으니 마땅히 특별히 장사지내 주어야 한다.”
당태종의 명령으로 유정회는 민부상서(民部尙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를 양(襄)이라 하였다. 후에 추증되어 유국공 에 옮겨 봉해졌고 은개산[殷開山 : 하지(夏至) 절후를 관장]과 같이 고조 이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01 방술(方術)을 행하는 술사(術士). 신선을 찾아다니고 연단(煉丹)을 배워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는 사람 또는 의생(醫生)·점쟁이·점성가(占星家)·관상가(觀相家) 등을 이르는 말.
02 하간(河間) 경성[景城 : 현재 하북성(河北省) 헌현(獻縣)] 사람으로 마읍(馬邑)으로 옮겨 살았다. 날래고 사나우며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교위가 되었다. 이후 마읍에 돌아와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로 있던 617년(대업 13) 같은 군(郡)의 장만세(張萬歲) 등과 모의하여 태수 왕인공(王仁恭)을 죽이고 세력을 규합하여 스스로 태수라 칭했다. 그는 세력 확장을 위해 돌궐(突厥)에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하여 이들의 무력을 기반으로 안문(雁門), 누번(樓煩), 정양(定襄) 등의 군(郡)을 점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돌궐로부터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임명되었고 황제를 자칭(自稱)했다. 619년(武德 2) 당군(唐軍)에 연승(連勝)하여 태원(太原), 진주(晉州), 회주(澮州)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돌궐로 도망갔는데 다시 마읍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피살(被殺)되었다.
03 상곡[上谷 : 현재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사람. 수나라 말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위도아(魏刀兒, ?~618)가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다가 위기에 빠지자 위도아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유무주(劉武周)의 부하가 되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신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고 송왕(宋王)이라 칭했다. 또한 서남도대행대(西南道大行臺)에 임명하여 당의 기반이 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619년(무덕 2) 병주(幷州), 회주(澮州)에서 당군(唐軍)에 연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이세민에게 패하여 유무주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였다. 이후 돌궐에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잡혀 죽었다.
04 팽성[彭城 :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당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고조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을 했는데 고조가 이를 받아들여 죽임을 당하니 그의 나이 5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