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의 표현은 은미(隱微)하면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기록하되 흐릿하게 감추고 완곡하면서도 문채를 이루고 곡진(曲盡)하면서도 비루하지 않고 악을 징계하면서 선을 권장하니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그것을 수사(修史: 역사를 엮음)할 수 있겠는가? (『좌전』 「성공」 14년)
1.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효시(嚆矢)
『춘추』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은공(隱公) 원년(元年: 周平王 49년, 기원전 722)부터 애공(哀公) 14년(周敬王 39년, 기원전 481)까지 제후국인 노나라 12공(公) 242년간의 역사01를 기록한 책이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노나라에 전해지던 사관(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02하였다. 『춘추』라는 명칭은 일 년의 네 계절인 춘(春)·하(夏)·추(秋)·동(冬) 가운데 ‘춘’·‘추’만을 뽑아서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 두예(杜預)03는 “대저 역사의 기록은 반드시 연대를 드러내어 사건의 앞에 기록한다. 그런데 일 년에는 사시(四時)가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춘’과 ‘추’를 엇섞어서 사건을 기록한 책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라 하였다. 인간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선후 관계가 결정된다. 따라서 반드시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그 시간의 흐름을 년(年)·월(月)·일(日)·시(時)의 체계로 기록하고 있지만 『춘추』는 이를 년·사시[春夏秋冬]·월·일이라는 독특한 시간 기록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독특한 시간 기록 체계에서 사시 가운데 ‘춘’, ‘추’를 뽑아서 ‘시간의 흐름’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삼고, 다시 이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인간의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 바로 노나라의 역사로서 『춘추』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춘추』는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는 이른바 편년체(編年體)04 역사서의 동양적 효시(嚆矢)이다.05
2. 현대에 전해지는 『춘추』 삼전(三傳)
한대(漢代)에 들어와 유가(儒家)의 기본적인 책을 경(經)06이라 하여 존중함에 있어, 『춘추』는 그 하나가 되어 시(詩)·서(書)·역(易)·예기(禮記) 등과 오경(五經)에 들었다. 그런데 『춘추』의 글은 극히 간결해서, 『춘추』의 경문(經文)이 과연 어떠한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쉽게 해석하고 또 경문에는 없으나, 후세에 알릴 일을 첨가해서 집필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을 『춘추』의 전(傳)이라 한다. 『한서(漢書)』07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이러한 전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춘추추씨전(春秋鄒氏傳)』·『춘추협씨전(春秋夾氏傳)』의 다섯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춘추추씨전』은 계승되지 못했고, 『춘추협씨전』은 완전한 책으로 성립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세 가지뿐이다. 『춘추공양전』은 『공양전』이라고도 하고 『춘추곡량전』은 『곡량전』이라고도 하며 『춘추좌씨전』은 『좌씨전』이라고도 한다. 『공양전』은 제나라의 공양고가 지었다 하고 『곡량전』은 노나라의 곡량적이 지었다고 하며 『좌씨전』은 노나라의 좌구명이 지었다고 한다. 『공양전』과 『곡량전』은 둘 다 11권으로 전하는 데 대하여 『춘추좌씨전』은 30권으로 전한다.08 후한시대 대학자 정현(鄭玄, 127~200)09은 그의 『육예론(六藝論)』에서 “『공양전』은 미래를 예언한 데 있어 뛰어나고, 『곡량전』은 경문(經文)의 의의를 순정(純正)하게 말한 데 있어 뛰어났으며, 『좌씨전』은 예의(禮義)에 입각하여 시비(是非)를 논한 데 있어 뛰어났다.”고 춘추 삼전의 특색을 말하였다. 『춘추』 삼전 가운데 『좌씨전』은 주석서로 가장 넓게 읽힌 책이다. 『좌씨전』은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춘추』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고 예의에 입각하여 시비를 논함으로써 공자의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해석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주(周)나라의 봉건질서가 무너져가다.
『춘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가 저작된 시대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춘추』에 기술되어진 기간을 중국 역사상 춘추시대라 한다.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동천(東遷)한 시기10, 즉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를 말한다. 이때는 하·은·주를 통틀어 정치와 도덕이 가장 문란한 시기였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엽은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줄어 소국으로 전락하였으며, 희미한 권위와 위엄조차 상실되어 약육강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를 제재할 실제적인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반면 주나라의 주변 열국들은 국력의 강약은 있었지만 열국(列國) 전부가 개별적 독립국가로 변모·발전하고 있었다.11 이들 국가 간에는 자국의 이익과 영토 확장을 위해서 무력의 충돌도 개의치 않았는데, 이러한 면모는 수많은 전쟁을 통해 확인된다. 그 결과 춘추시대 말엽은 예의(禮義)가 붕괴되고 공동체의식이 사라짐에 따라 여러 가지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득한 혼돈의 시대가 되었다.12
4.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위해 『춘추』를 지은 공자
『춘추』는 주대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술된 편년체 사서이다. 그런데 공자가 윤리적 입장에서 필삭(筆削)하여 정사선악(正邪善惡)의 가치판단을 한 책으로 어느 경전보다 권선징악적 기술이 많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찌하여 『춘추』를 지었는가? 이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맹자』 「등문공 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 올바른 정치가 쇠퇴하고 어진 도가 희미해져, 옳지 못한 설(說)과 모진 행동이 제창되고 행해지니, 신하로서 그의 군주를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그의 부친을 죽이는 자가 있자, 공자께서는 그 사태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시었다. 춘추에서 권선징악한 일은, 원래 천자(天子)가 행할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선(善)을 권장하고 악을 응징(膺懲)한 사람이라고 알아주는 자는, 내가 지은 춘추를 가지고 그렇게 알아줄 것일 게다. 그리고 하찮은 사람이면서 분수를 넘어 천자가 하는 일을 함부로 했다고 책망하는 자도 내가 지은 춘추를 가지고 그럴 것이다.13
위의 글에서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역사에 기록된 구체적 사례를 통해 후세 사람들이 시비선악(是非善惡)의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춘추』를 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난세를 구하고자 공자는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 필주(筆誅)14를 가한 것이다. 그 결과 맹자는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15고 평하였다. 아울러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목적은 시비선악의 교훈 외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데에 있었다.16 이와 관련하여 장자(莊子)17는 “『춘추』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은 선왕의 뜻이다.”18라고 말했고 사마천(司馬遷)19은 동중서(董仲舒)20의 말을 인용하여 “공자는 자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왕의 도(道)가 실행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의 도덕적 시비를 따져 천하의 본보기로 삼았는데 천자라도 어질지 못하면 깎아 내리고 무도한 제후는 물리치며 간악한 대부는 성토하여 왕도(王道)를 이루려 했을 뿐이다.”21고 말했다. 장자와 사마천의 견해는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공자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는 기준 위에서 도덕적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의 방법으로 노나라 역사 기록을 정리하여 『춘추』를 편찬함으로써 단순한 역사 기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후 『춘추』는 바로 도덕 역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즉 공자는 『춘추』를 통해 역사에 나타나는 구체적 사건들에 선악, 시비, 정사(正邪)를 분별하고,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대의(大義)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춘추』는 후기 유학자들의 의리 판단과 평가의 표준이 되었다.22 공자는 권선징악과 대의명분에 따라서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의 원칙을 세워 『춘추』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폄’의 원칙을 현재의 ‘수도 과정’에서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수도인들은 ‘포폄’의 원칙으로 ‘수도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도 과정에서 생기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대순진리에 따라 시비와 정사를 분별해 수도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도(大道)의 참뜻에 맞는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어긋나는 것은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진리 본래의 뜻에 온전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천의 중요성은 도주님과 도전님의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도주님께서는 “먼저 나의 마음을 참답게 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참되게 하고, 먼저 내 몸을 공경함으로써 남도 몸을 공경하게 되며, 먼저 나의 일을 신의로써 하면 남들이 신의를 본받게 된다.”23고 하셨고, 도전님께서는 “모든 도인들은 처사에서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욕됨이 없게 하라.”24고 하셨다. 이는 ‘포폄’과 같이 진리를 기준으로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수도는 인륜(人倫)을 바로 행하고 도덕(道德)을 밝혀 나가는 일이다. 도인들은 진리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대도의 참뜻을 실천해야 하겠다.
01 오늘날 전해져 있는 『춘추』는 노나라 은공 원년에서, 애공 14년까지, 은공(隱公)·환공(桓公)·장공(莊公)·민공(閔公)·희공(僖公)·문공(文公)·선공(宣公)·성공(成公)·양공(襄公)·소공(昭公)· 정공(定公)·애공(哀公) 등 12공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 및 노나라와 관계가 있는 여러 나라의 사건을 간결하게 기재하고 있다.
02 공자가 편수하기 이전에 이미 노나라에는 『춘추』라고 불리는 사관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맹자』에는 춘추시대의 열국(列國)들이 각각 사관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 노에는 ‘춘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가 스스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춘추』이다. 유학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동주(東周)시대의 전반기를 춘추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03 두예(杜預, 222~284)는 중국 진대(晉代)의 학자이면서 정치가. 진주자사(秦州刺史)·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저서 『춘추좌씨경전집해』는 춘추학으로서의 좌씨학을 집대성하였고 『좌씨전』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았다.
04 편년체는 연월(年月)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이다. 중국의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이 이런 체재의 원초형태라고 한다. 그러나 기전체형식(紀傳體形式)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이러한 기술방식을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후한대(後漢代)의 순열(荀悅) 편저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이다. 그 후 역대로 단대사적 편년(斷代史的編年)의 역사서가 작성되어 왔으나,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에 이르러 비로소 통사(通史)로서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 편찬되었다. 이를 계승하여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등의 우수한 편년체의 사서 편찬이 계속되었고, 연월에 따르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 기사의 분단(分斷)을 보충하기 위한 방식으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형식의 사서도 편찬되었다.
07 『한서(漢書)』는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로 전한의 역사를 반고가 편찬하였다. 다루는 시대는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4년까지이다. 총 100편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08 문선규 역저, 『신완역 춘추좌씨전 (上)』, 명문당, 2009, p.15.
09 중국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시종 재야 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10 중국 주나라가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 각 지방의 제후들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진의 시황제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각 제후국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혼란의 시기였다.
15 『맹자』 「등문공 하」,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것은 71세에서 73세 무렵이므로 『춘추』는 육경(六經) 중에서 제일 나중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16 남상호, 「공자와 춘추」, 『공자학』 제7호, 한국공자학회, 2000, p.195 참조.
17 장자(莊子, 기원전 369~289년경)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이는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며[無爲],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自然]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18 『장자』 「제물론」, “春秋經世, 先王之志.”
19 사마천(司馬遷, 145년경~86년경)은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며 『사기』의 저자이다. 무제의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집필하였고 기원전 91년 『사기』를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20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0년경~120년경)는 중국 전한 때의 유학자이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여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에 통일된 것은 그의 영향이 크다.
21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이 동중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孔子知言之不用, 道之不行也, 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 以爲天下儀表, 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以達王事而已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