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戊申]년 봄, 상제님께서는 박공우에게 마음속으로 육임(六任)을 정해보도록 명하셨다. 원래 육임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만든 여섯 개의 교직(敎職)을 뜻하는 것이었는데,01 상제님께서는 이것을 공사에 활용하신 것이었다. 박공우는 마음으로 여섯 사람을 생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그중의 한 사람이 불가하다 하심에,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마음으로 정하였다. 상제님께서는 그 여섯 사람을 부르게 하시고, 이 여섯 사람이 밤중에 등불을 끈 캄캄한 방 안에서 동학 주문을 외우며 돌게 하셨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방 안에 등불을 켜게 하시니 여섯 사람 중에서 손병욱 한 사람이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상제님께서 손병희의 기운을 붙여 보았더니 이기지 못한다 하시며 물을 머금어 손병욱의 얼굴에 뿌리시니 그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상제님께서 “나를 부르라.”고 이르시니, 그가 힘겹게 상제님을 불렀고, 즉시 기운이 돌아왔다. 상제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종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허물을 지은 자니라.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하리라.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을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도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으리라. 이런 때에 나를 부르면 살아나리라.”
또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시속에 병신이 육갑한다는 말은 서투른 글자나 배웠다고 손가락을 꼽작이며 아는 체 한다는 말이니 이런 자는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계하셨다. 십간(十干)인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십이지(十二支)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각각 하나씩 순서대로 조합하면 갑자·을축·병인·정묘·… 계해라는 총 60개의 간지(干支)가 나오니, 이것이 육십갑자(六十甲子) 즉 육갑(六甲)이다. 이 60개를 다 외우는 것은 정상인도 어려운 일인데, 좀 덜 떨어진 사람이 손을 꼽작거리며 이것을 다 아는 척을 하면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병신육갑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자란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잘 하지도 못 하면서 잘 하는 척하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채지가』, 「초당의 봄꿈」에 ‘대성인(大聖人)의 행(行)이신가, 천지도수 바꿨으니, 귀신도 난측(難測)인데 사람이야 뉘 알소냐? 아무리 안다한들 도인 외에 뉘알소냐?’라고 하였듯이, 후천 개벽시대를 맞이하여 이제 상제님에 의해 천지의 모든 도수가 바뀌어져 사람은 물론 귀신조차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안다 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한다면,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일신의 편안과 재리(財利)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러한 자들은 모두 ‘병신육갑’을 하고 있는 것이니 상제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의 비참한 결말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시면서 상제님께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이해를 얻지 못하면서도 열성적으로 ‘남 모르는 공부’에 열중하는 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을 전하셨다.
“부녀자들이 제 자식이라도 비위에 맞지 아니하면 급살 맞으라고 폭언하나니 이것은 장차 급살병이 있을 것을 말함이니라. 하루 짚신 세 켤레를 닳기면서 죽음을 밟아 병자를 구하러 다니리니, 이렇게 급박할 때 나를 믿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므로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1908[戊申]년 5월이 되었다. 김경학이 정읍 와룡리02 문공신의 집에 머물고 계시던 상제님을 찾아뵈었다가, 상제님으로부터 “내일 일찍 태인 살포정03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들었다. 김경학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상제님을 뵙기 위하여 살포정 주막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나그네 두 사람이 머리와 상투를 붙든 채 싸우고 있었고, 상제님께서는 큰길가의 높은 언덕에서 노기(怒氣)를 띠신 채 돌아앉아 계셨다. 김경학이 언덕으로 올라가 상제님께 인사를 올리니, 상제님께서는 인사만 받으시고 언짢은 표정을 풀지 않으셨다. 김경학은 영문을 모른 채 그냥 상제님 옆에 서 있었다. 좀 지나서 상제님께서 싸우는 나그네들에게 그만 두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싸움을 그치고 각기 제 갈 길을 갔다. 그제야 김경학이 “어떤 사람들이 싸웠나이까?” 여쭈니, 상제님께서 “우리 겨레에서 정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씨(李氏)가 정씨(鄭氏)의 화(禍)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煞)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고 일러주셨다. 후에 김경학이 싸운 두 사람을 찾아 그때 어떤 연유로 싸웠는지를 물어보았더니, 이들은 자기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왜 그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정감(鄭堪 혹은 鄭鑑)의 비결이 크게 유행했다. 그 내용은 조선 이씨왕조의 선조인 한륭공(漢隆公)의 두 아들 이심(李沁), 이연(李淵)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 왕조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 앉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이씨의 한양 도읍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서 몇 백년간을 도읍 삼아 왕조를 세우고, 그 다음은 조씨(趙氏)가 가야산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가 완산을, 왕씨(王氏)가 다시금 송악(松嶽:개성)을 차례로 도읍 삼아 왕조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왕조 중간에 일어날 각종 재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씨 왕조가 끝나면 그 다음으로 정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의 비결은 조선시대의 많은 반란에 이용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조 개국 이래 벼슬을 한 자는 다 정씨를 생각하였나니 이것이 곧 두 마음이라. 남의 신하로서 이심을 품으면 그것이 곧 역신이니라.”고 말씀하시어, 정감의 폐해를 지적하신 적이 있으셨다. 상극에 지배되어 혼란에 빠진 세상을 바로 잡고 만고의 원을 풀어 상생의 선경을 세워 천하창생을 건지시려는 상제님께서는 또다시 전근대적인 왕조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는 정감을 없애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신 것이니,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시며 허망한 정감의 비결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러주셨다. 또 상제님의 신성하심을 아는 사람들이 상제님께 정감의 비결에 대해 간혹 물을 때면, 그때마다 상제님께서는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정씨가)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 하고 일깨워주셨다.
이 무렵 원평에 사는 최운익(崔雲益)의 스무한 살이 된 맏아들이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최운익이 상제님께 달려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자, 상제님께서는 마치 병자의 사정을 다 아시는 듯이 “그 병자가 얼굴이 못생김을 일생의 한으로 품었기에 그 영혼이 지금 청국 심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니 어찌하리오.” 말씀하셨다. 그래도 최운익이 매달리며 약을 달라고 간청하니, 상제님께서는 마지못해 사물탕(四物湯) 한 첩을 지어 거기에 ‘九月飮’이라고 써 주셨다. 최운익은 너무나 감사해 하면서 그 약을 가지고 집으로 급히 돌아갔으나, 아들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종도들이 ‘구월음’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구월장시황어여산하(九月葬始皇於驪山下)’라 하니 이것은 살지 못할 것을 표시함이로다. 그 아들이 죽을 사람이지만 만일 약을 굳이 원하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원한을 품을 것이므로 다만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약을 주었노라.”고 일러주셨다.
‘九月葬始皇於驪山下’는 『통감』 「후진기(後秦記)」 편에 나오는 말로, 9월에 진시황을 여산(驪山) 아래에 장사 지냈다는 뜻이다. 진시황은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군주로서, 도량형과 문자 · 화폐를 단일화시키고, 봉건제를 폐지하여 중앙의 관리가 직접 지방으로 가서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하는 등 명실 공히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10년간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를 벌였는데, 작업 인원수가 많을 때는 무려 7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7월, 진시황이 죽자, 그해 9월 시신을 함양에서 옮겨와 장례를 지낸 후 여산의 능에 묻었다. 그의 능은 섬서성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임동(臨潼)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진시황릉의 규모는 대단히 웅장하여 능이 아니라 산처럼 보인다. 현재는 높이가 79m이지만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봉분의 높이가 50여 장(丈) 즉 약 115m에 달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실상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사기』 에 따르면, 진시황릉의 내부에는 경사진 묘도(墓道)가 있고, 묘의 천정에는 천문성상도(天文星象圖)가 그려져 있으며, 묘 아래에는 수은으로 된 하천과 호수가 있고, 인어의 기름으로 만든 초가 진시황의 영생을 밝히며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당시의 기술로 설치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2003년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소형 로봇을 능 안으로 들여보내 촬영해 본 결과 대부분의 모습이 기록과 일치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도굴된 바가 없다고 하는 진시황릉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발굴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발굴기술과 유적보호기술이 부족하여 자칫하면 능 전체가 크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04
01 동학에서의 ‘육임(六任)’은 임원 체계를 뜻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말한다. 교장(敎長)은 건실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하고, 교수(敎授)는 성심으로 도를 닦아 가히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하고, 도집(都執)은 위풍이 있고 기강(紀綱)이 밝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으로 하였고, 집강(執綱)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 판단을 내릴 사람으로 삼았고, 대정(大正)은 공평하며 무사(無私)하고 근후(勤厚)한 사람으로 하였으며, 중정(中正)은 직언할 수 있 는 강직한 사람으로 정하여 교인들의 교화와 기강을 바로 잡으며 교인들의 지도자로서 수범(垂範)이 되게 하였다.
02 現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마을. 원래 이 마을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교동 혹은 교촌이라고 불렸다. 이 마을에 황응종, 문공신, 신 경수가 같이 살았다.
03 現 전북 정읍시 북면 장학리 장재마을의 태양주유소 일대.
04「중화의 본고장, 섬서성을 둘러보고 2편」 『대순회보』 75호, 2007, 84~8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