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1980)이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01 수도원의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이면서도 에코 특유의 문장과 풍부한 지식이 인기에 한몫을 보탰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될 즈음 원작이 1986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사건의 전개는 웃음을 축으로 하면서도 신성과 인성 또는 신의 말씀과 사람의 이성 사이의 대립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2011년 연말에 국내의 SBS TV ‘뿌리 깊은 나무’가 집현전 학자의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글 창제를 둘러싼 세종과 밀본의 대립을 그려서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어찌 보면 둘은 놀랄 정도로 닮았다.
동아시아의 고전에도 『장미의 이름』이나 ‘뿌리 깊은 나무’와 닮은 사건과 책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먼저 반신반의부터 할 것이다. 바로 『악경』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동아시아의 고전을 묶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이니 ‘십삼경十三經’이니 말한다. 『악경』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오경이든 육경이든 십삼경이든 그 중에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고대부터 『악경』의 완전한 분량은 사라지고 오늘날 『예기』로 전해지는 방대한 분량의 책 속에 「악기(樂記)」라는 한 편명으로만 남아있다.02 ‘악경’은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분량이 전해지지 않고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남았을까?
⋅ 『예기』 속의 「악기」, 악과 예의 불편한 동거와 어색한 화해
오늘날 「악기」가 원래 『악경』의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오늘날 『악경』은 사라지고 「악기」가 『예기』 속에 들어있다. 여기서 ‘「악기」가 『예기』로 편입되면서 악이 예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돈 없는 사람이 친척이나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되면 제 성질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눈으로 봐서 그런지 「악기」를 보면 유독 예와 악이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것으로 말하면서도 유독 둘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말들이 많다. 「악기」의 ‘악론’을 보면 처음부터 “악은 같아지게 하는 것이고 예는 달라지게 하는 것이다.”라며 둘의 특성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다.03 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악을 들으면 정서적인 공감을 하게 된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이 흥겨워하고 슬픈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축 처지게 된다. 말씨의 하대와 존대처럼 예는 신분마다 행위를 달리 규정하므로 예를 차리게 되면 서로의 차이가 한층 더 뚜렷해진다. 그 결과로 악에 의해서 사람들이 동화되면 서로 가까워지고 예에 의해서 구별이 되면 서로 조심하게 된다. 이처럼 예와 악의 특성이 다르다면 둘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악기」의 다른 곳을 보면 서로 다른 예와 악이 전체적으로 보면 공통점을 갖는다고 다소 기괴한(?) 논리를 장황하게 펼치고 있다. ‘악본’을 보면 예는 뜻을 잘 이끌고 악은 소리를 조율하고 정치는 행실을 하나로 하고 형벌은 범행을 막는다. 이렇게 보면 네 가지는 다른 기능을 가졌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을 같아지게 변화시켜서 사회 안정을 이루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04
이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서 악이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분위기와 풍속을 일신한다는 이풍역속(移風易俗)을 끌어들인다.05 이로써 음악은 개인의 취향이나 독립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일종의 도덕 교육의 일환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악경』이 「악기」로 축소되어서 『예기』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예의 자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 악의 쾌감,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는 원초적 본성
「악기」를 읽다보면 악화(樂化), 즉 음악에 의한 사회 개선의 이야기보다는 악 자체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악기」가 『예기』속에 전세를 한다고 하지만 악 자체가 가진 성격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음악과 노래를 듣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군가를 부르다보면 금세 피곤이 사라지고 전우애가 생겨서 전체가 한마음 한뜻이 된다. 주말에 집에서 쉬며 방송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연신 “이게 아닌데 ……” 하면서 채널을 돌린다. 흘러나온 음악이 나의 마음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이풍역속을 반영하고 있다. 후자는 개인의 정서적 쾌감을 중시하고 있다.
‘악상’을 보면 “오직 악만이 거짓으로 할(꾸밀) 수가 없다.”는 주장을 던지고 있다.06 외국에 가서 보지 못한 애인을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움을 애써 참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다 안다. 아무리 반갑지 않은 척 기쁘지 않은 척하지만 흥분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즐거운 음악을 들으며 쾌감을 느낄 때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즐거움을 그대로 표출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쾌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쾌감을 속이려고 하거나 억지로 참으려고 한다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쾌감을 터뜨려서 분위기를 흐리곤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악이 사회적 요구에 수용해서 그대로 반영하는 소극적 측면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와 무관하게 개인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악화’를 보면 “악이란 즐거움이다. 인정에 따르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라는 훨씬 더 적극적인 주장이 있다.07 아직 말을 익히지 못한 아이를 보라. 그들은 흥겨운 음악만 나오면 먼저 율동을 한다. 누가 보고 있는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음악에 그냥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신나는 음악이 나와도 어른은 체면이며 눈치며 이것저것 재다보니 그냥 쳐다볼 뿐 춤을 잘 추지 않는다. 어른이 아니라 아이가 바로 ‘악화’에 나오는 말에 가감 없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악기」에는 음악의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지만 음악의 부정할 수 없는 쾌감을 말하는 주장도 들어있다. 바로 이 부정할 수 없는 쾌감이 문제로 될 가능성을 안고 있던 것이다.
⋅ 『악경(樂經)』 텍스트 실종 사건
『장미의 이름』에서 살인 사건의 발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에 있다.08 책의 막바지에 이르면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월리엄과 사건을 일으킨 호르헤는 사건 자체에는 안중에 없는 듯 신성의 절대성과 합리적 이성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사건을 풀어가는 월리엄은 희극을 뜻하는 코미디가 실재보다 못하고 성인보다 열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즉 열등한 것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이윤기, p.863) 반면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웃음이 예술로 과대 평가되어 있고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으로 과장되었다고 본다.(이윤기, p.867) 따라서 『시학』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신성을 모독하는 열려서(읽어서) 안 되는 금서여야 했다.
이 금서에의 접근은 차단되어야 하므로 지성의 힘으로 그곳에 다다른 사람은 독을 먹고 죽어갔던 것이다.
이제 『악경』의 운명을 생각해보자.
경(經)의 시대는 서주의 종말과 더불어 사라졌다. 서주시대까지만 해도 정치와 학문 두 영역을 완전하게 아우른 성왕(聖王)이 통치를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신분은 왕이지만 학덕은 보통 사람만도 못한 암주(暗主)가 타락과 부패를 일삼고 나아가 사치와 향락을 즐기느라 공동체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울러 철기의 보급과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등장으로 인해 겸병 전쟁이 나날이 그 강도를 더해갔다. 음악이 고래로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용사의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 군악 이외에 음악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진과 한이 제국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이 등장하자 황제는 또 다른 혼란의 시대가 재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정과 평화의 이름으로 권력 의지를 강력하게 행사했다. 세계는 유희와 낭만의 기운이 넘치는 공간이 아니라 생산과 질서의 가치가 강조되는 억압이 가득 찬 감옥이 되어갔다.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생산을 권장하고 질서를 찬미하는 기능만을 허용 받았을 뿐이었다.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악경』은 춘추전국시대와도 맞지 않고 진한 제국의 시대와도 맞지 않는다. 억제할 수 없는 쾌감을 즐거워하기에는 춘추전국시대의 공간이 너무 암울하고 진한제국시대의 공간이 너무 억압적이었다.
암울하고 억압의 공간이더라도 『악경』을 읽는 또는 읽고자 하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악경』을 읽더라도 읽지 않은 듯이 읽어야지 보란 듯이 읽을 수 없었다. 국가이든 호르헤와 같은 수사이든 『악경』이 있다는 것을 알면 천하에 펼쳐놓고 읽기를 권장할 게 아니라 지하에 꽁꽁 숨겨놓고 찾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것을 읽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아델모, 베난티오 등과 같은 운명에 놓였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악경』 실종 사건의 혐의자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진제국의 수립 이후에 시황제는 고전의 권위를 빌어서 제국을 헐뜯는 비판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과 눈을 막기 위해서 분서갱유를 실시했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민간의 서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연구를 금지하는 법률을 반포했다. 이로써 쉽게 찾을 수 있던 『악경』이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실종되게 되었다. 진제국의 몰락이 진행될 때 항우는 함양궁에 방화를 해서 시황제에 대한 인민들의 적개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로 인해 『악경』은 일반인의 눈만 아니라 왕실 도서관에서도 실종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제국의 등장 이후에 『악경』은 다른 경처럼 왜 모습을 다시 드러내지 않았을까? 시대가 쾌감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권력의지를 수호하는 경학자들은 발견을 저지했을 것이다. 코미디를 싫어했던 호르헤처럼 쾌감(즐거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경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 실종 사건의 여운, 동아시아 문화의 틀을 왜곡하다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처럼 『악경』이 세상이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경학자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범인은 아직 현상 수배 중이다. 나는 언젠가 자료 조사를 통해 『악경』 실종을 둘러싼 사건을 『장미의 이름』처럼 소설로 써보고 싶다.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동아시아 지성사를 보면 호르헤를 닮은 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월리엄을 자처했던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란 생의 1/5를 유배지에서 보냈던 조선 후기의 정약용(1762~1836)이다. 그는 제자 이정(李睛) 등과 함께 『악경』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들은 『서경』과 『주례』에 남겨진 단편적인 구절을 경으로 삼아서 믿을 만한 책을 만들고서 그것에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 제목을 붙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료가 많다고 소홀히 다루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보다 적지만 제대로 다루어서 영원히 살아남게 하겠다는 것이다.09 이제껏 실종되었는데 또다시 실종된다면 『악경』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악경』은 사라지고 「악기」는 두꺼운 『예기』 속의 한 편명으로 남아있다. 둘의 싸움은 예의 승리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는 예와 대립하는 악 또는 예의 그늘을 벗어난 악이 아니라 예에 길들여진 악의 틀로 드러나게 되었다. 실로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의 문화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악본’을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 고요하기 그지없다. 이게 하늘(자연)의 본성이다. 사물에 자극을 받아서 호오(好惡)의 반응이 움직이게 된다. 이게 본성의 욕망이다.”10 이로써 쾌감(즐거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도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도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다음 단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동아시아 사회는 모험과 도전, 낭만과 광기보다는 고요와 안정을 강조하는 주정주의 또는 정적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정약용이 끝맺지 못한 월리엄의 역할을 이을 새로운 윌리엄이 기다려진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월리엄이 조서를 마무리 짓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고서 호르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쾌감(감정)의 표출보다는 그것의 삭제, 즉 얼굴 없는 얼굴이 우리 주위에 넘쳐나게 되는 천고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서가 끝나지 않는다면 결국 동아시아에는 호르헤가 많고 윌리엄이 적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소개
신정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01 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상하, 열린책들, 1986 초판. 초판 이후에도 해를 거듭하면서 개역판과 신판이 나왔다
02 「악기」는 다양한 예를 모아서 기록해놓은 『예기』의 한 편이지만 내용에 따라 11단락으로 구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악기」는 樂本 ⋅ 樂論 ⋅ 樂禮 ⋅ 樂施 ⋅ 樂言 ⋅ 樂象 ⋅ 樂情 ⋅ 魏文侯 ⋅ 賓牟賈 ⋅ 樂化 ⋅ 師乙 등으로 되어있다. 만약 11구분이 축약된 꼴이 아니라 온전한 꼴로 남았거나 사라진 부분을 복원한다면 ‘악경’은 상당한 분량의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번역본으로 조남권 ⋅ 김종수 옮김, 『동양의 음악 사상 악기』, 민속원, 2001; 2005 3판 1쇄; 김승룡 옮김, 『악기집석』, 청계, 200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