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9년[영조(英祖) 13] 함경관찰사의 한 보고로 인해 조정이 뒤집혀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북 사람들이 ‘정진인(鄭眞人)이 나타나 조선이 멸하고 그 위에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이 담긴 서적을 서로 돌려봅니다. 더욱이 역병처럼 삽시간에 여러 고을로 확산되면서, 조정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어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01라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후 다시 한번 참혹한 유혈전이 재 점화될 사건이기에 조정은 엄청난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실지로 소문은 순식간에 남쪽 오지 섬마을까지 전파를 탔고, ‘새 세상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민중 봉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정은 궁여지책으로 서적의 내용을 입에 담거나 필사금지라는 금서(禁書)조치에 이르게 된다. 대체 어떤 책이기에 대담하게 조선왕조의 국운을 예언하며 민심을 선동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시대 최고의 금서이자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민중의 강한 염원을 반영한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예언서였다.
누가 지었고 언제 성립됐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책의 저자를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는 전설적인 인물로 보는 관점과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보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정감록』은 단일 책자가 아니라 구전되던 수십여 편의 작은 예언적 비기를 집대성해 하나로 엮은 것이다.02 그런데 조선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금서로 지정된 『정감록』이 공식적으로 출판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그것도 일본인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 총독부에 강탈된 규장각본의 사료들을 필사했고, 이를 동경(東京, 도쿄)에 있던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6∼1934)가 편집하여 출판했던 것이다. 지금의 『정감록』은 아유카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03
이 책의 특징이라면 단연 그 내용이 조선의 멸망과 진인에 의해 새 세상이 열린다는 반 왕조적 색깔을 담고 있어 조선중엽 이후의 대소규모 각종 민란의 촉발제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19세기 동학을 기점으로 속출한 대부분의 신종교운동이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단지 민중에 의해 구전과 필사를 거쳤을 뿐임에도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것은 『정감록』 전반에 걸쳐 담겨 있는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즉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과 ‘십승지지설(十勝之地說)’이 그것이다. 진인출현설은 ‘정감록 신앙’의 핵심이자 귀결로써, 초월적 능력을 지닌 진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고 복락이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일종의 메시아니즘(Messianism)이다. 여기서 진인출현 장소가 남해(南海), 남해도(南海島) 그리고 제주도 일대의 섬[島] 중 하나일 것이라는 설(說) 때문에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진인은 ‘정감록 신앙’에서 핵심 키워드지만, 유사 필사본을 살펴보더라도 진인의 실체가 어떠하다는 뚜렷한 명시가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이 예언적 비결은 표현 자체가 암시적이고 상징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첨삭이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정감록』 이후 저마다 자신이 진인임을 자처하며 추종세력을 모아 왕후장상의 허망한 꿈을 꾸는 사례가 빈번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당시 홍경래의 난(1811∼1812)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들불처럼 번진 민란이 이를 잘 입증하는 것이다.
‘십승지지’는 원래 경치가 좋은 곳이나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 말이나, 『정감록』에서는 전쟁이나 천재(天災)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군데의 땅을 의미한다. 대체로 필사자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그 지역도 다양하지만, 다음 열 곳의 땅이 주된 설로 통용되고 있다. 곧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안동의 내성(奈城), 보은 속리산 산록의 증항(蒸項) 근처, 운봉(雲峯) 두류산(頭流山) 산록의 동점촌(銅店村), 예천의 금당동(金堂洞) 북쪽, 공주의 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영월의 정동(正東) 상류, 무주의 무풍(茂豊) 북쪽의 덕유산(德裕山), 부안 변산의 호암(壺岩), 가야산(伽倻山)의 만수동(萬壽洞)이 『정감록』에서 제시하는 명당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십승지지의 분포가 한강 이남, 즉 모두가 남조선에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는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진인이 나타나 남조선이라는 이상의 낙토에 민중들을 그곳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하나의 이상이자 신앙을 낳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남조선 신앙(南朝鮮信仰)’이라는 한국적 유토피어니즘(Utopianism, 공상적 이상주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괴설(怪說)만을 맹신하여 십승지지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두드러진 악폐였다.
이렇듯 『정감록』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지배층에게는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고, 민중에게는 언제가 더 나은 내일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 앞에 올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더구나 민중들의 꿈은 하나의 공통된 마음과 열망이 고취되어 이른바 민중운동의 이념적인 바탕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 소박한 이념이 도리어 재민혁세(災民革世)에 힘을 실어주고, 민중의 금전과 노동력을 갈취하려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동학의 접주(接主)였던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을 들 수 있다. 본래 동학의 목적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에 뜻을 두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선봉장인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역시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평등한 새 세상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이다. 이처럼 전봉준과 같이 민중을 위해 애쓴 사람도 있으나, 김개남은 이 운동에 편승하여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패악을 저질렀다.
김개남은 『정감록』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데,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김기범(金箕範)으로 개명했다가, 꿈에 신령이 나타나 그의 손에 ‘개남(開南: 남조선을 연다)’이라는 두 글자를 써주었기 때문에 다시 개명할 정도였다. 곧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공이 자신임을 내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보면 진인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힘없는 백정이나 노비들을 끌어 모은 뒤 양반의 재물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고, 자신이 맡은 부대 명을 개남국왕(開南國王: 남조선을 개국한 왕)이라고 자칭하고 다녔고, 1894년 9월 동학군 2차 봉기 때 전봉준으로부터 합류 요청을 받았으나 “남원에 군사를 주둔하고 49일을 지나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정감록』의 비결만을 믿고 거절하였다. 실로 그는 보국안민이라는 기치 아래 내심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자 애쓴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상제님께서는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공사 2장 19절)고 하셨듯이 처음 가졌던 소박한 취지를 무색하게 각자의 속마음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을 좇다 무고한 인명마저 빼앗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만 『정감록』의 맹신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와서까지 시의(時宜)에 맞기만 하면 스스로가 진인임을 자처함과 투기를 위한 십승지지의 명당을 내세워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권 출마를 한다든지, 어떤 대표성을 띠는 자리에 앉기 위해 주변을 현혹시키려고 한 경우, 해도진인을 들먹여 남해의 한 무인도를 선택해 허황된 종교단체를 만들어 사회에 물의를 빚는 것들이 그러한 사례다.
더욱이 아직 상제님의 진리를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상제님을 믿고 나가는 수도인들이 그런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상제님께서 “현세에 아는 자가 없나니 상도 보이지 말고 점도 치지 말지어다.”(교법 1장 65절)라고 하셨고, 더욱이 세상 사람들이 정진인(鄭眞人)이 출현하여 새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교법 3장 39절)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결국 『정감록』이라는 것은 구심점 없는 헛된 꿈과 부질없는 야욕을 부추기는 서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앞길을 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도의 법방에 맞추어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修道)’에 더욱 매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03 호소이가 편집 간행한 『정감록』은 출판한지 불과 6개월 만에 제3판이 인쇄될 정도였다고 한다. 정작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이 예언서 출판에 열의를 올린 것은 다름 아닌 민족말살정책의 합리화에 있었다. 곧 굳이 일본이 무력으로 피를 흘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조선이 멸망 한다는 『정감록』의 요지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그 섬에 있는 진인이란 바로 일본인이며 그래서 조선을 구원하려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