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戊申]년 7월의 어느 날 상제님께서 정읍 교동01 손병욱의 집에 이르시니, 상제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종도들도 손병욱의 집에 같이 오게 되었다. 손병욱은 즉시 아내에게 점심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손병욱의 부인은 꼭 1년 전에 남편이 상제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가 신명에게 벌을 받아 죽을 지경에 처하였으나, 상제님의 은혜를 입어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그 후유증으로 잉태를 못하게 된 여인이었다.02 그런데 이 부인은 무더운 날씨에 많은 사람들의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또 짜증을 내었다. 아직도 마음을 제대로 고치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부엌에서 불평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와사증이 와서 눈과 입이 돌아가 쓰러져버렸다. 손병욱이 놀라 이 사정을 상제님께 아뢰었더니, 상제님께서는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竈王)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고 일러주셨다.
조왕이란 부엌의 아궁이를 관장하는 가신(家神)을 말한다. 아궁이는 불을 때는 곳인데 생활이 넉넉하다면 불을 잘 땔 것이요, 궁핍하다면 불을 잘 때지 못할 것이다. 한 집의 식구들 먹을거리가 이렇게 아궁이를 통해서 장만이 되기 때문에 조왕은 그 집안의 재산과 관계되는 신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선조들은 조왕에게 불경(不敬)이 되지 않도록 아궁이에 함부로 걸터앉지 않았고 아궁이 앞에서는 불경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조왕은 음력 12월 23일이면 하늘로 올라가 1년 동안 그 집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낱낱이 옥황상제님께 고하고 설날 새벽에 다시 아궁이로 돌아온다고 믿었으므로, 1년 동안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고 생각한 사람은 조왕이 옥황상제님께 그 사실을 보고하지 못하도록 조왕이 승천하는 전날 밤에 아궁이에 엿을 발라두는 풍속까지 있었다고 한다.03
상제님께서는 손병욱의 부인을 딱하게 여기시고는 어떤 글을 쓰신 뒤에 그녀가 직접 부엌에서 그 글이 씌여진 종이를 불사르도록 시키셨다. 손병욱의 부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서 상제님의 명을 시행하였더니 와사증은 곧바로 치유되었다.
얼마 후 상제님께서는 백암리(白岩里)04로 가셨다. 박공우와 신원일은 이곳에서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김경학의 소개로 김영학(金永學)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상제님을 뵈었다. 김영학은 상제님 곁에서 7일을 머물렀으나,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가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이 불만을 품자, 이를 지켜보던 박공우와 신원일은 “그대가 상제께 삼가 사사(師事)하기를 청하면 빨리 가르쳐 주시리라.”고 일러주었다. 그제야 그는 상제님께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상제님께서는 이를 응낙하시고는 대뜸 호통을 치며 꾸중부터 하시는 게 아닌가! 김영학은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그냥 문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상제님께서 그런 김영학을 불러들이시고는,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慼神)을 물리쳐 내려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놀란 김영학이 “무슨 척(慼)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아뢰니, 상제님께서는 “너는 열여덟 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다. 김영학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화로를 던져 그의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그 아전은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3월에 죽었나이다. 또 금년 봄에 외숙 김요선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였기에 의병대장 김영백05을 찾아가서 그 비행을 따졌더니, 그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약탈한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나이다.”고 아뢰는 것이었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동곡약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곳에서 어떤 글을 쓰고 계시는데, 문득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 대여섯 명이 대립을 쓰고 행의(行衣) 차림으로 찾아와 “선생님 뵈옵겠습니다.”하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로다.”고 하시며 절을 받지 않으시니, 이들은 일어나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섰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다. 이율곡과 송우암의 사상을 계승한 간재는 조선의 마지막 정통 유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는 당시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겠다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고 하며 배를 타고 부안 앞바다에 있는 자그마한 섬 왕등도(旺嶝島)로 들어가 버렸다. 일부에서는 나라가 망하는데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스스로 도학군자라고 자부만 하고 있던 그를 두고 썩은 선비[腐儒]라고 비판했고, 간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고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항변하였다.06 이런 상황에서 간재의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이 상제님을 찾아 가르침을 청한 것이었다.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간재가 매달렸던 성리학은 이제 그 수명이 다하여 나라를 구할 수도, 민생을 구제할 수도 없었다. 세상은 오직 만민을 살리시려는 상제님의 상생 천지대도에 의해서만이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상제님께서 간재의 제자들을 물리치신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 전간재선생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는 계양사(繼陽詞)
한편 이때까지 계속 상제님을 따라다니던 신원일은 상제님께 얼른 공사를 끝내시고 속히 개벽을 열어주시기를 거듭 간청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해가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신원일의 간청은 있을 법한 일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신원일을 데리시고 부안 변산 우금암 아래에 있는 개암사(開岩寺)에 가셔서, 그에게 삶은 쇠머리 한 개와 술 한 병, 청수 한 그릇을 방안에 차리고 쇠머리를 청수 앞에 진설하게 하신 후에 그 앞에 그를 꿇어앉히시고 성냥 세 개비를 청수에 넣으셨다. 그러자 별안간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큰 홍수가 창일했다. 상제님께서 신원일에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다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災害)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고 일러 주시고 진설케 하신 것을 모두 거두게 하시니, 곧 비바람이 멎었다.
▲ 부안의 개암사. 뒤에 보이는 큰 바위가 우금암이다. 개암사는 634년에 묘련(妙蓮)이 창건한 고찰로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다.
상제님께서는 신원일을 급히 집으로 보내셨다. 신원일이 자기 집에 가서 보니, 동생의 집이 갑작스런 폭우에 파괴되어 그 가족이 피난 와 있었다. 원래 신원일의 동생은 상제님을 믿지 못하고 언제나 불평을 터뜨리고 다녔던 사람이었으나, 이 일을 겪은 뒤로는 크게 두려워하여 다시는 상제님에 대한 불경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을 겪은 신원일은 상제님을 찾아뵙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왔다. 상제님께서는 신원일에게 다시 깨달음을 주시고자 이렇게 가르침을 내리셨다.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의 도로써 화민정세((化民靖世)07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大人)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好生)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
01 現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마을.
02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한 아내의 운명」, 『대순회보』 121호, 2011, 14쪽 참조.
03 임동권, 『한국의 민속』, 교양국사 편찬위원회, 1999, 130-131쪽.
04 現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05 김영백(金永伯, 1880-1910).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전남 장성에서 천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김영백의 어머니를 사로잡아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영백은 스스로 잡혀 교수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