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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 『금강산 이야기』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3. 8. 1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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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89)

비로봉과 마의태자릉전설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비로봉구역은 비로봉(毘盧峯: 1,638m)과 영랑봉, 장군성과 장군봉, 월출봉과 일출봉 등 금강산의 뭇 봉우리들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이 구역은 높은 봉우리에 펼쳐진 특이한 식물경관과 내·외금강의 아름다운 전망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내금강의 부드럽고 유정한 자태와 외금강의 장대한 모습, 그리고 해금강의 아름다운 전경이 마치 지형도를 펼친 듯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오르는 길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외금강 구룡연 계곡 길과 내금강의 만폭동을 지나 백운대 구역으로 오르는 길이 가장 대표적이다.

  내금강에서 비로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만폭동 계곡의 상류에 있는 묘길상을 지나 비로봉구역으로 들어서야 한다. 이곳에서는 계곡이 층층을 이루며 높아지고 좌우로 울창한 숲과 높은 봉우리들이 다가서서 좁은 골목을 이룬다. 각각의 봉우리에는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늘어서서 만물상을 이루고 있다.

이 기묘한 바위들을 둘러보며 한참을 더 가면 ‘이십년고개’라는 등성이가 나타난다. 등성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어린애를 품에 안은 어머니 모습의 ‘사랑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옛날 금강산에서 살았던 의좋은 부부가 자식이 없어서 20년 동안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금강산 산신에게 빌어 옥동자를 얻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사랑바위를 지나면 길이 더욱 가파르게 경사진 가운데 계곡의 물과 숲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오직 집채 같은 바위들이 송곳처럼 차곡차곡 쌓여 하늘과 맞닿은 진풍경이 펼쳐진다. 비로봉 남쪽 암벽이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침식되어 무너져 내림으로써 경사진 산기슭에 집채 같은 돌사태가 차곡차곡 쌓여 성을 이룬 듯한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돌무더기 위로 오르다 보면 옆으로 창끝을 묶어세운 듯한 바위줄기가 비스듬히 뻗어 올라 그 끝이 비로봉 꼭대기에 닿아 있다. 이 바위줄기는 너비가 10미터, 길이는 1km에 달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은사다리 금사다리’이다. 톱날 같은 바위줄기는 마치 까마득한 하늘에 세워놓은 사다리 같은데, 여기에 아침 해가 비칠 때면 영롱한 은빛을 내고 저녁 해가 비치면 찬란한 황금빛을 뿌린다. 그래서 이 바위줄기는 하늘로 오르내리는 ‘은사다라 금사다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비로봉과 영랑봉이 잇닿은 등성이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들어서면 넓디넓은 방목지를 연상케 하는 평탄한 대지가 펼쳐져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이곳이 바로 비로고대(毘盧高臺)이다. 둘레가 약 4km인 비로고대는 마치 날카로운 창끝에 쟁반을 기울여 올려놓은 것처럼 비로봉 꼭대기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굽이쳐 내렸고, 갖가지 나무들이 얽혀 있어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다. 흙보다 돌이 많고 깎아지른 바위봉우리가 대다수인 금강산의 가장 높은 등마루에서 바위가 아니라 흙에 뿌리박은 수림을 보는 것은 실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특히 비로고대의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들은 한결같이 눕고 기고 엎드려 있어 그 이름도 누운소나무, 누운잣나무, 누운전나무 등 모두 ‘누운’ 자가 붙어 있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비로봉이고 보면 기후가 차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나무들이 위로 자라지 못하고 모두 옆으로만 뻗은 것이다. 이 밖에도 비로고대에는 우리나라의 고원지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많아 마치 잘 가꾸어 놓은 거대한 식물원을 연상케 한다.

 

 

 

 

비로고대에서 수백 길 아찔한 벼랑을 옆에 끼고 조금 더 가면 크고 둥글둥글한 바위들이 모여 불쑥 높아진 곳에 이르게 된다. 여기가 더 오를 데 없다는 명실공히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이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일만 이천 봉우리를 모두 거느리고 있고 정상에서 네 방향으로 능선이 갈라진다. 둥글넓적한 바위들이 모여 있는 비로봉의 한가운데에는 마치 배처럼 생긴 큰 바위 하나가 있다. 동해를 지나는 배들이 멀리서 이 바위를 보고 뱃길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 바위가 금강산의 봉우리 중의 봉우리인 ‘배바위’이다.

  해발 1,638m에 달하는 비로봉 정상은 일만 이천 봉이라 불리는 수많은 봉우리와 멀리 가물거리는 동해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금강산 최고의 전망대이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비로봉은 날씨와 계절, 시간에 따라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리 없이 나타난 구름이 산봉우리들과 골짜기를 휘감으면 그 많은 봉우리들이 망망한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의 모습으로 바뀌기 일쑤다.

비로봉의 전망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 동해의 해돋이다. 비로봉에 올라 아침을 맞으면 동해의 해돋이를 볼 수 있다. 동틀 무렵 동해의 하늘가에는 안개구름이 가리어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는데 문득 그 속을 뚫고 이글이글 타는 듯한 둥그런 해 바퀴가 불쑥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빛이 점차 사방에 비치면 아침 안개 속에 내·외금강의 뭇 봉우리들이 흰 이마를 빛내며 웅장하고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처럼 비로봉에서의 전망은 실로 그 웅대함과 장쾌함으로 인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산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만끽하게 해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임호(臨湖) 홍만적(洪萬迪, 1660~1708)은 비로봉에서 금강산의 절경을 바라본 소감을 이렇게 읊었다.

 

 

봉래산 꼭대기에 나 홀로 서니, 하늘과 땅 사이 아득하구나.

동남쪽은 오직 바다 있으나, 서북쪽은 다시 산도 없어라.

저절로 가슴이 후련해지니, 어찌 조화옹(造化翁)이 한가했겠나.

가련한 진시황·한무제, 한갓 꿈속에서나 올랐었겠지

- 『임호유고』 「비로봉」

 

 

 

  한편,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언덕 위에는 신라 최후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묘가 있다. 천년 사직을 차마 버릴 수 없어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금강산에 들어왔다가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던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서기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태자는 아버지의 뜻을 바꾸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부왕(父王)이 결국 신라를 고려에 맡기자 태자는 굴욕적인 조치에 불복하고 재기를 다짐하며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경주를 떠나올 때 그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남동생은 출가하여 범공(梵空) 스님이 되었고 공주는 외로이 살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훗날 시호(諡號)01를 효목(孝穆)이라 하였다.

  태자와 군사들이 오랜 시간 동안 행군하여 내금강에 도착하자 장안사에 머무르고 있던 대륜 법사가 미리 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태자는 고려군에 대항하여 계속 싸울 것인지, 아니면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만 출가하여 승려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대륜 법사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나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네 주민들은 결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태자의 의로운 마음에 감복하여 그를 도와서 군사들과 명경대 입구와 영원동에 이르는 구간에 산성을 쌓았다. 이때 쌓은 성을 태자성이라 부르고 그가 머물던 곳을 ‘아랫대궐터’와 ‘윗대궐터’로 불렀다. 아랫대궐터 옆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넓은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태자가 타던 용마를 묶었다고 하여 ‘계마석(繫馬石)’이라 불렀다. 이후 태자는 대륜 법사의 설득으로 내금강 입구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해산하고 그들을 귀향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려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첩보를 접한 태자는 그들과 맞서 싸울 군사가 턱없이 부족한 터여서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그가 시종들과 망군대로 올라가 살펴보니 고려의 군사가 내금강 입구 내금리 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태자는 즉시 사람을 시켜 횟가루를 가져오도록 하여 명경대 앞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황천강 물줄기에 횟가루를 풀어놓게 하였다. 이때 고려의 군사는 대열을 정비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강물에서 흰색 쌀뜨물이 흘러내려 오자 매우 놀랐다. 횟가루를 쌀 씻은 물로 오인한 고려군은, 산골짜기에 신라의 대군이 숨어 있다고 판단하여 그만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아무 탈 없이 수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태자는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느꼈다. 그 사이 태자는 화려한 복장을 벗고 오직 삼베옷[麻衣]만을 입고 초식(草食)으로 연명하며 지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다. 이런 그가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에 올라가서 이제 모든 것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묶어 두고 멀리 신라와 개경 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하자 마의태자의 몸도 천천히 죽어 갔다. 그러자 그가 타던 용마도 따라 죽어서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비로봉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1.4km 정도 내려가면 길 서남쪽 비탈진 언덕에 마의태자릉(麻衣太子陵)이 있다. 무덤은 다듬은 돌로 2단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보통 무덤보다는 약간 큰 높이 1.5미터 둘레 10미터의 봉분이 덮여 있다. 그 앞에 ‘신라 마의태자릉’이란 비석이 서 있고, 옆에는 태자의 애마(愛馬)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龍馬石)이 있다. 훗날 마의태자가 머물던 곳에 들른 사람들이 그의 충정을 기려 ‘동경의열북지영풍(東京義烈北地英風)’이란 글자를 아랫대궐터 입구 바위벽에 새겨 놓았다. 여기서 ‘동경(東京)’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뜻하고, ‘북지영풍(北地英風)’은 후세인들이 깊은 산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삼베로 옷을 만들어 입었던 태자의 꿋꿋하고 의연한 태도를 칭송한 표현이라고 한다.

 

 

 


 

01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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