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중 「논학문」에서이다. 이 글은 동학의 교조 수운 선생(水雲 崔濟愚, 1824~1864)이 관의 지목을 피해 전라도 남원 은적암(隱跡庵)이라는 산속 암자에 숨어 지내면서 쓴 글이다. 수운 선생이 용담(龍潭)에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달이 되지를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자, 이를 유심히 살피던 경상도 일대 유생(儒生)들이 수운 선생의 가르침이 서학(西學, 천주교)의 말류(末流)라고 지목을 하며, 서원(書院) 간에 통문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하여 수운 선생은 관의 지목과 함께 탄압을 받게 되고, 마침내는 경주 용담(龍潭)을 떠나 전라도 남원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볼 때에 전라도 은적암에서 썼다는 「논학문」이라는 글은 다름 아닌 수운 선생 자신의 가르침이 결코 ‘서학의 말류가 아니라, 우리의 학문인 동학이다.’라는, 즉 동학의 정체성을 밝힌 글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수운 선생은 이 글 중에서, 동학이 서학과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道雖天道 學則東學).”라고 천명하므로, 자신의 가르침은 천도를 궁구하는 학문으로서 서학과는 다르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수운 선생이 살던 조선조라는 시대에는 오늘의 ‘religion’이라는 서양어의 번역어인 ‘종교(宗敎)’라는 용어가 없던 때이다. 다만 이에 대응될 수 있던 말로는 ‘도(道)’, ‘학(學)’, ‘교(敎)’, ‘술(術)’, ‘법(法)’ 등이 있었다. 따라서 수운 선생은 자신의 가르침을 ‘도(道)로서의 천도(天道)’와 ‘학(學)으로서의 동학(東學)’으로 나누어 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동학은 천도를 궁구하는 학문의 이름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볼 때에 ‘동학’이라는 이름은 혹 많은 기존의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단순하게 서학에 대응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즉 ‘동학’은 ‘동방지학(東方之學)’의 준말로서, 우리의 오랜 문화적·학문적·신앙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일어난 학문을 말한다고 하겠다. 더구나 수운 선생이 조선조 정부에 체포가 되어 문초를 받을 때, 당시 취조관에게 “동학은 그 이름을 동국(東國)의 의(義)에서 취한 것(名之曰東學 取東國之義)”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보아, 이는 더욱 분명하다 하겠다.
그러나 수운 선생의 가르침들을 잘 고찰해 보면, 동학은 ‘다만 학문’으로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재래적 독서인(讀書人)들이 취하는 학문적인 태도를 벗어나, 오늘로 말하면 종교적인 수행(修行)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당시 유학자들이 취하고 있던 독서인으로서의 모습, 또는 수양인(修養人)으로서의 모습을 뛰어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동학은 학문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측면인 수련(修煉)을 통한 내면적인 깨달음, 나아가 신앙의 대상인 한울님이라는 신을 경배하고 또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총체성’의 명칭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동학’이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05년에의 일이다. 당시 동학의 3세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義菴 孫秉熙, 1861∼1922)은 수운 선생이 「논학문」에서 천명한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곧 동학이다.’라는 말을 근본으로 삼아, ‘학(學)’의 이름인 ‘동학’을 ‘도(道)’의 이름인 ‘천도’로 바꾸면서, ‘천도교’라는 ‘교(敎)’로 천명을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로서는 ‘천도’요, ‘학’으로는 ‘동학’이요, ‘교’로서는 ‘천도교’라는 의미가 된다. 즉 종래의 ‘종교’라는 이름과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던 시대에 ‘천도’를 궁구하는 ‘학’으로서의 ‘동학’을 종교의 이름인 ‘천도교’로 개명을 한 것이다.
천도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개명을 하므로, 조선조 조정으로부터 이단으로 탄압을 받던 동학은 한 종교로서 종교의 자유를 얻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으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허여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 차원에서의 조처를 기반으로 ‘동학’을 ‘천도교’라는 종교로 천명하므로 비공인이 된 채 숨어서 활동을 하던 동학이 사회적인 공인 아래 천도교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우리나라 내의 종교단체를 제외한 모든 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폐쇄시키는 정책 속에서도, 동학 · 천도교는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폐쇄의 조치로부터 그 제재를 받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의암 선생이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제의 동학이 곧 오늘의 천도교’인 것이다.
2. 동학 . 천도교의 창도와 역사
동학의 창도는 다각적인 면에서 고찰되어 왔다. 그 창도의 동인으로 첫째 조선조 후기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인 부패의 모습을 들고 있다. 즉 19세기 조선조 사회가 안고 있던 부정부패는, 그 역의 방향에서 새로운 변혁의 의식을 불러왔고, 이에 따라 동학이라는 새로운 변혁적인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이의 견해이다.
둘째로는 수운 선생이 재가녀(再嫁女)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신분 문제 때문이었다는 면도 재기되고 있다. 즉 수운 선생이 근암공(近菴公) 최 옥이라는 양반 집안의 자손이지만, 그 어머니가 재가녀이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그 기량을 펼 수 없었고, 그러므로 기존의 사회적인 모순을 극복하고자 새로운 가르침인 동학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 이의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부패한 시대에 신분적인 제한으로 인하여, 그 불만이 더욱 증대된 한 젊은 지식인인 수운 선생이 조선조라는 봉건적 질서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고자 내놓은 가르침이 동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창도된 동학은 조선조 사회가 안고 있는 봉건적 질서인 신분제도를 타파하고자 ‘평등사상’을 세상에 내놓았고, 나아가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사상’을 내놓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은 위난의 한국 근대사를 거치면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교조신원운동,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혁운동, 3·1 독립운동,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 등 수많은 시민운동, 문화운동, 독립운동 등을 펼쳐나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3.1운동_대한문 앞에서 광화문 쪽으로 몰려가는 만세 인파 / 자료: 1921년 상해대한적십자회 발행 ‘3.1운동 영문 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결국 이와 같은 견해는 동학의 창도 및 그 전개를 정치사회적, 혹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 된다. 따라서 동학은 그 창도에서 전개까지 종교적이고 또 신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 사회적인 면이 보다 크게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동학은 종교이기보다는 사회개혁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그 일반이다.
그러나 수운 선생이 경신년(庚申年, 1860) 4월에 겪게 되는 종교체험, 또는 수운 선생이나 동학의 2세, 3세 교주인 해월 선생(海月 崔時亨, 1827∼1898), 의암 선생 등이 남긴 가르침을 살펴보면, 동학은 단순한 사회운동의 성격만을 지닌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즉 종교적인 체계와 함께, 종교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룩한 사회사상과, 이를 근거로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펼쳐나간, 매우 ‘총체적인 무엇’임을 알게 된다.
먼저 수운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가르침을 얻고자 10여 년의 시간을 세상을 떠돈다. 이와 같은 주유팔로(周遊八路)를 통해 당시 수운 선생이 인식하고 있던 세상의 어지러움이란, 단순하게 지배계층인 양반 관료사회의 문란으로 인하여 피지배계층인 평민과 천민이 억압을 당한다는, 이원적(二元的) 대립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수운 선생은 당시의 시대적 타락상은 양반이나 상민을 막론한 모두의 총체적인 타락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운 선생은 그의 저서인 『용담유사』를 통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권력자나, 돈을 산같이 쌓아 놓고 있는 부자나, 심지어는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패가자(敗家者), 뿌리 없이 떠도는 사람들까지 모두 자기 하나만 살려고 하는 타락한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그러므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타락한 이기주의’인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태가 당시의 시대상을 타락시켰고, 나아가 위기로 몰아가게 되었다고 수운 선생은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들어오는 서양 ·서학은 이러한 각자위심의 세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수운 선생은 설파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운 선생의 시대에 대한 인식은 도덕적 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 시각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수운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제도의 변혁이나 정치적 변혁을 통해 개혁하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에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므로,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수운 선생은 이와 같은 견지에서 세상 사람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도를 구하고자 세상을 떠돌게 되었고, 마침내 을묘년(1855) 봄 처가 동네인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어느 이인(異人)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는다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의 사건을 동학에서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이 을묘천서는 수운 선생이 지금까지 행해오던 구도(求道)에의 획기적인 전환이 되기도 한다. 즉 수운 선생은 10여 년을 떠돌며 자신의 밖에서 도를 구하고자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이 을묘천서 이후 이러한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자신의 내면, 또는 절대자로부터 도를 구하는 태도로 전환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곧 수운 선생이 지금까지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도를 찾아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면, 을묘천서 이후부터는 매우 종교적으로, 그러므로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기천(祈天)을 통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을묘천서 이후 수운 선생은 세상을 떠돌며 도를 구하던 것을 멈추고, 양산 천성산(千聖山)에 자리한 내원암(內院庵), 자연 동굴인 적멸굴(寂滅窟) 또는 자신의 고향인 경주 용담(龍潭) 등지에서 기천(祈天)을 통한 수련을 감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기천을 통한 수련의 결과 수운 선생은 경신년 4월 한울님을 만나고 또 한울님과 대화를 한다는 신체험(神體驗)을 통해, 결정적인 종교체험(religious experience)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운 선생의 종교체험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의 개안(開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운 선생은 이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이라는 궁극적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고,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 보아 동학의 창도는 그 외양상 조선조 사회가 지닌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배경이 매우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보다 본원적인 면에서, 수운 선생의 신체험(神體驗)을 통한 종교체험이라는, 종교 사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동학이 다만 사회사상이나 운동만이 아니요, 또한 단순한 종교만이 아닌, 이 양자를 모두 종합적으로 포함하는 사상이며, 운동이며, 나아가 신앙이며, 또 종교임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창도된 동학은 조선조 조정에 의하여 교조인 수운 선생이 참형을 당하게 되자, 고난의 역사 속을 걷게 된다.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道統)을 물려받은 해월 선생은 관의 지목을 받으며 36년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어우러지는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산간 마을 50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36년간의 도피 생활은 다만 도피만이 아니었다. 36년간 산간을 떠돌면서 흩어진 동학교도들을 다시 모아들이고, 교단을 조직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90년대에 이르러서는 교조인 수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고자 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조선조 조정을 향해 전개할 수 있을 정도의 교세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교조신원운동에 이어 1894년 고부의 전봉준이 이끄는 봉기를 필두로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혁명을 일으킨다.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까지 함락하였으나, 조선조 조정이 외세인 청나라에 구원을 청하므로,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게 되고, 일본군과 관군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채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해월 선생은 체포가 되어 순도를 한다. 그러므로 동학교단은 또 한번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3세 도통을 이은 의암 선생에 의하여 동학은 천도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일제의 강제합병에 저항하여 기미 3·1 독립운동을 일으킨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인하여 기미 3·1 독립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임시정부를 이룩하는 기초가 되어 오늘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바탕이 되었다. 이와 같이 동학 천도교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많은 사회운동, 구국운동을 펼쳐 왔다.
기미 3·1 독립운동 이후, 천도교는 한편으로는 문화운동을 일으키므로 1920년대 이후 『개벽』, 『별곤곤』, 『어린이』,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한국근대기의 문화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그런가 하면, 수운 선생과 해월 선생의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환으로 어린이운동을 일으키므로, 오늘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어린이날의 그 처음을 열어놓았다. 또한 여성운동을 펼치므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는 계기를 이룬다.
동학 천도교는 19세기라는 혼란과 위기의 시대에 창도되어 한국의 근대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우리나라 초유의 민회(民會)를 열어갔는가 하면, 동학혁명을 통하여 반외세의 자주정신을 일깨워주었다. 그런가 하면 기미 3·1 독립운동 등을 통하여 독립과 구국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동학 천도교의 역사는 다만 한 종교단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3. 시천주의 모심과 사인여천의 섬김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수운 선생은 한울님으로부터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심법을 받는다. 이렇듯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심법을 바탕으로 한울님이라는 신이 초월된 공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모시고 있으며 동시에 우주에 편만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내가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자신의 중심 사상으로 삼는다.
동학은 바로 ‘시천주’의 ‘모심’을 그 근본사상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시천주란 곧 ‘사람과 신과의 관계 지음’이다. 선천(先天)의 가르침과 같이 ‘신(神)’이라는 궁극적 존재가 인간과는 다른 초월적인 공간에 있으므로, 나와는 분리되어 있고 그러므로 나를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숨 쉬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을 밝힌, ‘나와 신과의 관계 지음’의 새로운 모습, 곧 ‘신과 나와 관계 지음’의 새로운 인식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시천주에 의한 신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참나’이며, 동시에 내가 태어난 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우주만유 모두 근원적으로 무궁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나와 만유(萬有)와 우주’는 궁극적으로 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공동체적 삶’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천주를 근간으로 수운 선생은 동학의 인간관, 우주관, 신관 등을 정립하기도 한다. 곧 무궁한 존재인 한울님을 내 안에 모셨으므로, ‘나’라는 유한적 존재가 궁극적으로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그러한 ‘동학의 인간관’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우주는 곧 모든 생명체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커다란 하나의 생명체라는 ‘동학의 우주관’을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섭리가 곧 신의 작용이며, 동시에 신이 현현(顯現)된 면모라는 ‘동학의 신관’을 확립하기도 한다.
또한 수운 선생은 이러한 시천주 사상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만인평등주의를 세상에 내놓았다. 즉 당시 사회적으로 그 신분이 천한 사람이나 존귀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본원적으로 한울님이라는 무궁한 존재를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무궁한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신분의 차별이 분명한 당시 봉건사회 속에서 보다 획기적으로 수운 선생이 자신의 도를 대사회적인 면으로 펼칠 매우 강력한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당시 빈천(貧賤)의 삶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며, 잠재되어 있는 민중이 새롭게 눈을 뜨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당시의 혼란으로 점철되는 시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주체는 부귀(富貴)에 해당되는 집권층만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빈천(貧賤)한 민중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켜주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를 근간으로 하여 ‘사람을 한울님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윤리가 동학 천도교에는 나오게 된다.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은 해월 선생의 가르침이다. 해월 선생은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는 예로 ‘며느리’와 ‘어린아이’를 들고 있다. 이미 유명해진 이야기로 청주 서택순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베를 짜는 며느리를 일컬어 한울님이 베를 짠다는 가르침을 편다. 이 해월 선생의 가르침에는, 비록 사회적·가정적으로는 시아버지의 신분이지만 그 며느리를 대할 때에는, 이 며느리를 한울님으로 대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또한 해월 선생은 이어서 집안의 부인들이 어린아이를 경솔하게 때리지 말라고 가르친다.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한울님이 싫어하고 또 기운이 상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해월 선생의 가르침은 당시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불평등의 고통을 받고 있는 계층인 여성, 특히 며느리, 어린아이 등만의 인권회복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성도 어린이도 남성이나 어른과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이들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상대적 존중이 아닌, 이 상대성을 뛰어넘는 남성도 여성도,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본원적이고 또 전일적 존중의 의미가 담긴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해월 선생의 가르침은 근원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 역시 그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이며, 또한 무궁한 우주와 서로 같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아버지가 모신 한울님이나 며느리가 모신 한울님이나, 어른이 모시고 있는 한울님이나 어린이가 모시고 있는 한울님이나 모두 같은 한울님이며, 따라서 어른이나 어린이나, 시아버지나 며느리나, 모두 우주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서로 같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비록 시아버지라고 해도 그 며느리를 본원적인 면에서는 한울님 같이 섬겨야 하며, 어린아이를 때리면 이는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요, 따라서 한울의 기운이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훗날 천도교에서 펼치는 ‘여성운동’이나 ‘어린이 운동’의 중요한 근본정신이 되었다.
해월 선생의 가르침인 사인여천에는 실상 ‘섬김을 받는 존재가 한울님같이 존귀하다.’는 생각도 중요하지만, ‘상대를 한울님같이 섬길 수 있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교훈이 깃들어 있다. 즉 해월 선생의 가르침인 사인여천의 ‘섬김’은 시천주가 지닌 한울님 마음과 기운을 회복하고, 또 이를 변치 않는 ‘모심’의 사회적 실천이 된다. 따라서 이 사인여천의 ‘섬김’에는 오늘 우리 현대 사회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문제’가 담겨져 있다.
4. 다시 개벽, 천리와 인사의 부합
수운 선생은 경신년(1860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이라는 신을 만난다. 따라서 ‘직접신관(直接神觀)’을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운(時運)이라는 ‘영원회귀의 시간관’ 또한 지니고 있다. 이 양자는 실상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닌다. 직접신관은 인격신의 존재를 상징하는데 반하여, 영원회귀의 시간관에서 제시하는 신관은 우주규범이 의인화된 신이 된다. 많 은 종교학자들이 논구한 바와 같이 동학·천도교의 신관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신의 모습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동학·천도교가 지닌 신관은 그의 개벽관(開闢觀)에도 그대로 작용되고 있다. 수운 선생은 『용담유사』에서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동일한 구절을 각기 다른 편을 통해 두 번 언급하고 있다. 한 번은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서 언급하고 있고, 다른 한 번은 「안심가(安心歌)」 중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고, ‘다시 개벽’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그 발화자가 서로 같지를 않다. 「안심가」에서는 수운 선생 스스로 발화자로서, 자신의 자질(子姪)이나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수운 선생으로 상정되는 화자(話者)가 세상을 떠돌다가 금강산 상상봉에 잠깐 앉아 잠이 든 사이에 꿈속에서 만난 신선의 옷을 입은 어느 도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즉 이때의 발화자는 수운 선생이 만난 ‘어느 도사’이다.
『용담유사』는 각기 다른 여덟 편의 노래로 된 가사집(歌辭集)이다. 이 중 「안심가」는 수운 선생이 자신의 가솔을 비롯해 제자들에게 이내 머지않아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이에 비하여 「몽중노소문답가」는 수운 선생이 을묘년인 1855년 초봄 처가 동네인 울산(蔚山) 유곡동(幽谷洞)에 있는 어느 초당에서 이인(異人)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는다는, 을묘천서(乙卯天書)의 사건을 비유해서 부른 노래로 보고 있다. 즉 「안심가」는 ‘이제 다시 개벽이 될 것이니, 그 날이 올 때를 대비하라.’는, 제자들을 향한 수운 선생 자신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노래라면, 「몽중노소문답가」는 수운 선생이 꿈속에서 만난 어느 이인으로부터 ‘이제 다시 개벽이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노래가 된다.
수운 선생이 꿈속에서 만났다는 우의(羽衣)를 입은 도사는 수운 선생이 종교체험을 통해 만난 신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구절은 같은 『용담유사』의 한편인 「용담가(龍潭歌)」에도 나오고 있다. 수운 선생이 경신년(1860)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할 때 “개벽(開闢)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본다면, 한울님이라는 신은 ‘다시 개벽’이 ‘십이제국 괴질운수’의 끝에 시운에 의하여 온다는 사실을 알려준 존재가 된다. 즉 ‘다시 개벽’은 시운이라는 우주 변화의 틀, 그 운행에 의하여 오는 것이고, 한울님은 이 다시 개벽의 때가 다가옴을 알려준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한울님이라는 신은 다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존재일 뿐, ‘다시 개벽’의 주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한울님이라는 신은 우주 변화의 틀을 주재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주 변화의 틀 그 자체가 한울님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재’라는 의미보다는, 만유와 함께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지속하고 있는, 그러한 ‘우주 변화 그 자체’가 한울님이라는 말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된다. 이렇듯 동학은 직접신관에 의한 인격신과 영원회귀의 시간관에 의한 우주규범이 의인화된 신관 모두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한울님의 무궁한 변화이며 동시에 우주의 비밀인 시운에 의하여, 이내 다가올 ‘다시 개벽’을 한울님이 직접 수운 선생에게 일깨워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수운 선생은 이제 머지않아 시운에 의하여 ‘다시 개벽’이 될 것이니, 세상의 사람들은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다시 개벽’의 일은 한울님의 일이며 천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시 개벽’을 맞이하고 또 바르게 우리 삶 속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역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수운 선생의 다시 개벽에 대한 지론이다.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부합(符合)되어야 만 비로소 이 지상에 올바른 ‘다시 개벽’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뜻에서 수운 선생은 「교훈가」에서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라고 노래하였으며, 「용담가」에서 한울님 역시 수운 선생에게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라고 말한 것으로 풀이 된다.
‘좋은 운수’는 바로 시운에 의하여 돌아온 천리가 된다. 그러나 이 천리에 의하여 돌아온 운수에 의한 올바른 다시 개벽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닦아 도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닦아 이루는 도덕’이 바로 인사(人事)가 된다. 그런가 하면, 한울님의 뜻도 ‘노이무공(勞而無功)’ 곧 노력을 해도 이룩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인사가 지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인사에 지극한, 나아가 지극한 마음으로 수련에 정진하므로 도와 덕을 닦는 데에 이른 수운 선생을 만나 비로소 성공을 하게 되었다고 한울님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리와 인사가 부합하므로 이룩하는 다시 개벽의 세상을 수운 선생은 『용담유사』 중에서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춘삼월 호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심수도(正心修道)이다. 동학 천도교에서는 수도의 방법으로 주문수련을 강조한다. 주문은 『동경대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呪文者 何 至爲天主之字)’이다. 주문이 함유하고 있는 한울님을 지극히 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한울님의 뜻, 곧 천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울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주문을 염념불망(念念不忘)하므로 행하는 주문수련(呪文修煉)을 통해, 도달하는 마음의 경지를 동학에서는 ‘수심정기(守心正氣)’라고 한다. 일찍이 이 수심정기에 관하여 수운 선생은 『동경대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의예지는 선천의 성인이 가르치신 바이요, 수심정기는 내 오직 다시 바꾸어 정한 것이다.(仁義禮智 先聖之所敎 守心正氣 惟我之更定)
이와 같은 수운 선생의 수심정기에 관한 언급에 이어 해월 선생은 “만일 수심정기가 아니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若非守心正氣 則仁義禮智之道 難以實踐也)”라고 말하고 있다. 이른 바 사단(四端)이 되는 인의예지를 마음에 회복하고 또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필히 수심정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단은 곧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본성이다. 따라서 동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단은 해월 선생이 시천주의 ‘시’를 해의한 내유신령(內有神靈), 곧 ‘처음 태어난 아이의 마음(落地初赤子之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인의예지의 사단을 회복하고 또 회복한 이 인의예지를 지키는 것을 ‘수심(守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이 회복하고 지키는 인의예지를 바르게 실천하는 것을 곧 ‘정기(正氣)’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수심정기’란 시천주의 자각을 통해 회복한 한울님 마음을 지키므로 우주적 질서를 내 안에서 회복하는 길이요(守心), 나아가 한울님 기운을 바르게 하여 이를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우주 운행의 법칙에 매우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길(正氣)이라고 하겠다. 즉 주문수련을 통하여 마음을 새롭게 열고, 열린 마음으로 만유와 교유하므로, “한울님 마음을 지키고, 한울님 기운을 바르게 하면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게 되고, 한울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자연한 가운데 한울님 경지에 이르게 됨(守其心正其氣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월 선생은 ‘수심정기’ 네 글자를 “선천 오만 년 동안 하늘과 땅의 끊어졌던 기운을 다시 이어주고 보충하는 것(守心正氣 四字 更補天地隕絶之氣).”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문수련을 통해 이와 같은 수심정기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천리를 따라 살게 되고, 그러므로 인사와 천리가 자연스레 부합하게 된다는 것이 동학 천도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시운에 의하여 오게 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인 ‘다시 개벽’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심’을 통하여 ‘한울님 마음과 한울님 기운’을 회복하므로 수심정기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섬김’을 통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나아가 우주 만유에의 상생과 조화를 이룩되는 것이 바로 ‘다시 개벽’의 세상이라고 동학 천도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모심’과 ‘섬김, 이는 바로 우주적 질서인 천리와 삶의 도리인 인사가 부합하는 길이며, 동시에 만유를 ‘살림’의 길로 이끄는 길이 된다. 이가 곧 동학 천도교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지는(此是開闢之運 開闢之理故也 新乎天 新乎地 人與物 亦新乎矣)” 마음의 개벽, 사회의 개벽, 우주의 개벽인 ‘다시 개벽’의 길이다. 동시에 상생과 조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이루려는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이룩하는 길이기도 하다.
5. 수행과 신앙 방법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는 두 가지가 있다. 즉 경배하는 신의 은총을 바라며, 신을 믿고,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신앙’에 치중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로는 어떠한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여 그 의미를 밝혀내고자 ‘수행’에 치중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있다. 대체로 모든 종교가 이러한 두 가지 종교행위를 모두 병행하고 있으나, 서양의 종교는 보다 ‘신앙’에 치중을 하고 있다면, 동양의 종교는 보다 ‘수행’에 치중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동학 천도교의 종교적 행위는 어느 한 가지에 치중하지 않고 ‘수행과 신앙’ 두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다. 동학 천도교는 수운 선생의 심법(心法)이 해월 선생에게 이어졌고, 또 의암 선생과 춘암 선생(春菴 朴寅浩, 1854∼1940)에게 이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수행과 신앙의 방법들이 확립된 것은 의암 선생 때에 이르러서이다.
먼저 의암 선생은 수운 선생과 해월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 ‘수행과 신앙’의 방법으로 오관(五款)을 제정하였다. 오관은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祈禱)의 다섯 가지로, 동학 천도교인이 행해야 할 종교적 의식(儀式)과 수행의 방법들이다. 주문은 곧 동학 천도교의 주문을 읽으며 수련에 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청수는 매일 하오 9시에 모시는 기도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도란 일정한 날과 기간을 정하여 놓고 드리는 특별기도와 같은 것을 말하고, 시일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奉行)하는 종교적인 집회를 말한다.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 한 식구 당 한 숟갈씩 정성으로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헌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종교적인 행위인 오관에는 궁극적으로 ‘수행과 신앙’이 모두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먼저 동학 천도교의 수행방법은 바르게 앉아서 눈을 감고 오관의 하나인 주문(呪文)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그 방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 천도교의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문(呪文)이 된다.
『동경대전』 「논학문」에 의하면, 주문은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이라고 되어 있다.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울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 주문을 통하여 한울님의 섭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인 이 우주, 곧 한울님과 합일(合一)을 이루고자 하는 수행이 곧 동학 천도교의 수련이 된다.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어 한울님의 덕을 체득하고, 그러므로 바른 마음과 기운을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곧 동학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인 것이다.
천도교의 주문에는 강령주문(降靈呪文)으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의 8자와 본주문(本呪文)으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13자가 있다. 강령주문이란 한울님의 기운과 내 기운이 서로 융화일체(融化一體)가 되고자 하는 주문이고, 본주문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한울님의 무궁한 가르침을 받고, 나아가 한울님의 덕(德)에 이르러 한울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주문이다.
이와 같은 강령주문과 본주문을 합하여 동학·천도교에서는 통상적으로 ‘주문(呪文)’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동학 천도교의 주문은 모두 ‘스물한 자’가 된다. 이 21자 주문에 대해서는 『동경대전』 「논학문」 중에 수운 선생 스스로 해의한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 21자의 주문 속에는 수운 선생의 가르침, 곧 동학·천도교의 모든 교의(敎義)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즉 주문 21자는 동학·천도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주문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것을 동학·천도교에서는 ‘수련(修煉)’, 곧 ‘수도(修道) 연성(煉性)’이라고 한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서울
이러한 수행방법과 함께 동학 천도교에는 그 종교적인 행위로 ‘심고(心告)’라는 것이 있다. 이 심고(心告)는 다름 아닌 한울님에게 기원(祈願)하고 서원(誓願)하는 ‘신앙의 방법’이 된다. 해월 선생의 법설인 「내수도문(內修道文)」에 의하면, 천도교인은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심고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 즉 잘 때 “잡니다.” 하고 마음으로 고(告)하고, 일어날 때 “일어납니다.” 하고 마음으로 고하고, 물 길러 간다거나 방아 찧으러 간다거나 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동을 시작할 때와 끝마쳤을 때에 이와 같이 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종교적 의식(儀式)이나 행사 때에도 이 심고로써 그 시작을 하고 또 그 끝을 맺는다. 이렇듯 동학 천도교인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내가 모신 한울님께 고하므로, 한울님과 함께 모든 일을 시작하고 끝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오관을 설명할 때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천도교인은 오후 9시에 청수(淸水)를 받들어 놓고 기도식(祈禱式)을 봉행하는 종교의식을 갖는다. 이 기도식 역시 경배(敬拜)의 대상인 한울님께 기원(祈願)과 서원(誓願)을 드리는 의식이 된다. 또한 매일 드리는 하오 9시 기도식 이외에, 특별한 목적과 서원을 정해 놓고 일정 기간 특별 기도를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이를 ‘특별기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기도와 심고는 주문과 함께 동학 천도교의 중요한 종교적 행위라고 하겠다. 즉 주문이 종교적인 수행을 행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면, 기도와 심고는 기원과 서원을 담은 신앙체계라고 하겠다. 즉 동학·천도교는 바로 이와 같이 주문과 심고, 기도라는 방법 등을 통하여 ‘수행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의 종교적 행위를 모두 겸하고 있는 종교이다.
이러한 주문과 심고·기도를 통한 종교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한편, 동학·천도교에서는 그 실천 방법으로 성(誠)·경(敬)·신(信)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신에 관하여서는 수운 선생이 경전 곳곳에 말씀을 해 놓았지만, 특히 『동경대전』 「좌잠(座箴)」에 명기하고 있다.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나, 많은 말로 그 뜻을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 경 신 세 글자에 있다.
즉 한울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信)’과 이 믿음을 통하여 끊이지 않고 ‘정성(誠)’을 드리고, 그러므로 우러나게 되는 ‘공경(敬)’을 생활 속에서 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곧 동학 천도교의 종교적 수행이며 또 신앙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일상적 삶 속에서 성·경·신을 통하여 생활을 하며, 주문을 통한 수련(修煉)과 심고(心告), 또한 기도(祈禱)를 통하여 수행과 신앙생활을 해나감으로써 동학·천도교인은 한울님으로부터 품부(稟賦)받은 그 마음을 회복하고, 그 회복한 마음을 지키는 ‘수심(守心)의 경지’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과 융화일체를 이룬 기운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정기(正氣)’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함을 동학·천도교에서는 곧 ‘수심정기(守心正氣)’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주문과 심고·기도를 통하여 생활 속에서 성·경·신을 실천하고, 나아가 수심정기(守心正氣)를 통하여 잃어버린 본성(本性)을 회복함으로써 종교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적 깊은 경지 속에서 잃어버린 본성을 다시 회복하고, 이 본성에의 회복을 통하여 우주적 섭리에 합일할 수 있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데에 바로 동학 천도교 ‘수행과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끝으로 동학·천도교의 현황 및 조직체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천도교의 대표기관은 천도교중앙총부이다. 천도교는 중의제(衆議制)에 의한 민주적 중앙집권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중앙총부의 체제는 이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교령사(敎領司)·현기사(玄機司)·종무원(宗務院)·종의원(宗議院)·감사원(監査院) 등의 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교화행정기구와 또 하나는 정신지도기구인 연원회(淵源會)라는 속인제(屬人制) 조직이 있다.
중앙총부의 최고 결의기관은 3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전국대의원대회이다. 여기서 교단의 대표인 교령을 비롯해서 감사원장 등 주요 교직자를 선출하며, 교령이 지명한 종무원장을 인준한다. 중앙총부 산하에는 각 지방에 교구(敎區) 및 전교실(傳敎室)이 있어 교구장을 중심으로 교인들의 교화 및 포덕(布敎)을 담당한다. 또한 시일(侍日: 일요일)에는 교구별로 교인들이 교당에 모여 시일식(侍日式), 즉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거행하며, 그 밖에 교인들의 수련 및 수행을 위한 수도원이 전국 곳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