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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76)』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3. 8. 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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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해원도수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8[戊申]년 12월, 상제님께서는 정읍 대흥리에서 계속 공사를 보셨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고부인(高夫人)에게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杖鼓)를 치시며 “이것이 천지(天地) 굿이니라.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요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를 무당도수라고 일러주셨다. 
  상제님께서 고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신 공사는 대개 도주님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무당도수 역시 도주님과 관계된 공사일 가능성이 크다. 무당은 위로 신령을 섬기면서 종교 의례인 굿을 펼쳐 신명과 사람을 엮어준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드시고 진법(眞法)을 짜셨으며, 그 진법의 법방에 따라 수도인과 신명들은 서로 엮어져 합일하고 수도하며 움직여나간다. 이와 같이 역할 면에서 천하 일등 무당과 도주님은 서로 통하고 있다.01
  이 공사를 마치신 후 상제님께서는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 하시니, 고부인이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02라는 글 한 수를 지으셨다. 다시 “내가 없으면 여덟 가지 병으로 어떻게 고통 하리오. 그중에 단독(丹毒)03이 크리니 이제 그 독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고부인의 손등에 침을 바르시며 “크나큰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고부인은 상제님께서 먼 곳으로 길을 떠나시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상제님의 이 말씀은 얼마 뒤 인간계를 떠나 천상계로 되돌아가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달 초순에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체면장(體面章)’이라는 글을 지어주셨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維歲次戊申十二月七日
道術 敢昭告于
惶恐伏地問安 氣體候萬死不忠不孝無序身泣 祝於君於父於師氣體候大安千萬伏望伏望04

 

 

  이 글은 충효열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군사부(君師父)의 도를 바르게 행함으로써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체면장이란 세상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로서의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기원하는 글인 듯하다.
  어느 날 문득 상제님께서는 안내성(安乃成, 1867∼1949)에게 손에 곤봉을 들고 마룻장을 치라고 하셨다. 안내성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상제님의 명을 따랐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은 을사조약(1905년)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한국을 침략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과연 이등박문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상제님의 말씀이 있은 뒤 약 9개월이 지난 1909년 9월 13일(양력 10월 26일) 새벽에, 이등박문은 러시아의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 역에 내리다가 안중근(安重根)에게 저격당해 죽음을 맞이하였다.05

 

 

 

 

 

이 무렵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양지 20장으로 책 두 권을 묶도록 시키셨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친히 그 책의 책장에 먹물로 손도장을 찍으시고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고 하셨다. 또 나머지 한 권에는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이라고 책명을 쓰시면서 “진시황의 해원도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책 한 권은 신원일의 집 뒷산에, 또 한 권은 황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다.
  중국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열국(列國)으로 난립하여 약육강식의 정복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는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혼란을 잠재우고 중국을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한 영웅이 바로 진(秦)나라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259∼기원전210)이었다. 진시황은 지방의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자기 지역을 통치하는 봉건제를 폐지한 뒤, 천하를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각 지역을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함으로써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이룩하였다. 또 상업을 장려하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사실상 오늘날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연합국가’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이렇게 보면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의 업적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 즉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하여 죽였다는 이유로 폭군이자 역사의 죄인으로 악명이 높았다.

 

 

 

 

상제님께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의 해원공사를 보셨다고 하면, 당연히 그 역사적 인물은 어떤 원(冤)을 가졌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상제님께서 진시황의 해원도수를 보셨다는 사실에서, 진시황에게도 그간 어떤 억울한 사정이 있었음이 인정된다. 그리고 그 억울한 사정은 상제님께서 진시황 해원공사에 쓰신 글귀인 ‘의약복서종수지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의약복서종수지문’은 그가 일으킨 분서갱유 사건에 등장하고, 분서갱유는 진시황에게 폭군이라는 이미지를 가져다 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분서갱유로 인해 진시황이 폭군이라는 오명을 입은 것에 대해, 진시황의 어떤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임을 밝혀주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시황이 지닌 이미지를 잠시 머리에서 내려놓고 분서사건에 대해 다시 살펴보자.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인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흥기하여 저마다의 사상을 내세우고 있었다. 통일제국 진이 들어서면서도 이런 분위기는 여전했는데, 당시 진의 승상이었던 이사(李斯)는 통일국가의 기틀이 아직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정한 사상의 통일이 필수라고 보고 진시황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사물의 가치기준을 분명히 했으며, 또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에 올라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여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폐하가 정하신 법을 비난하고, 포고를 내어도 비난하며, 나아가서는 그 불만을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서 제멋대로 떠들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폐하의 명령에 이의를 표시함으로써 그것을 기화로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고, 군주를 비방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또 도당을 만들어 이런 일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머지않아 위로는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이고, 아래로는 당파의 세력이 강성하게 될 것입니다.”06
  실제로 제자백가는, 그 가운데서도 유독 유가(儒家)의 유생들은 옛날의 제도를 들먹일 뿐 건설적인 건의는 하지 않은 채 진의 통일개혁정책을 비판만 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심을 자극하여 통일제국의 기초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또한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의 열국의 역사기록들에는 진에 대한 비방이 많았다. 이 기록들은 진에게 멸망당한 각국의 후예들에 의해 진에 대한 적개심을 배양하는 교재로 사용될 것임이 자명했다. 이런 상황을 모두 파악한 이사는 진시황에게 다시 다음의 여덟 항목을 정책으로 시행해 나갈 것을 건의하였다.07

 

 

- 첫째,
사관이 가지고 있는 문서 중에서 진(秦)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태우도록 하십시오. 
- 둘째,
박사관(博士官: 학식이 뛰어난 학술고문관)이 아니면서
『시경』, 『서경』 및 제자백가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면
모두 관청에 바치게 한 후 지방관으로 하여금 태우게 하십시오.
- 셋째,
감히 『시경』, 『서경』을 들먹이며 토론하는 자는 저자거리에서 처형시키십시오.
- 넷째,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는 자는
족형(族刑: 삼족을 멸하는 형벌)으로 처벌하십시오.
- 다섯째,
만약 관원이 이를 알고도 벌하지 않는다면 같은 죄로 처벌하십시오.
- 여섯째,
이 법령이 하달된 후 30일이 지나도 불태우지 않는 자는 흑형(黑刑: 얼굴에 낙인을 찍는 형벌)에 처한 후 성단(城旦: 장성 건설의 노역)으로 삼으십시오.
- 일곱째,
의약(醫藥)·복서(卜筮)·식수(植樹 즉 農耕)에 관한 것은
태우지 않아도 되도록 하십시오.
- 여덟째,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십시오.

 

 

이에 따라 진시황은 의약과 복서, 농경에 관련된 책을 제외한 다른 책은 불태우게 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사건이다. 상제님께서 쓰신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은 당시 불태우지 않아도 되었던 서적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시행하도록 한 분서는 오로지 학자를 탄압하고 학문을 없애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사의 건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학식이 뛰어난 박사관들은 유가의 서적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을 자유롭게 소지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분서의 근본적인 목적은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통일제국의 통일정책에 반하는 논리를 생산해내는 학문적인 흐름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분서로 인해서 일시적인 학문의 위축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그보다는 통일제국 사회와 민생의 안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일의 전후·본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분서’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시황을 폭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유학자들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는 ‘갱유(坑儒)’에 대해서 살펴본다. 앞서 말한 대로, 진시황 당시의 유학자들은 통일정책에 대해 비판만 가하는 등 통일제국의 입장에서는 가시 같은 존재들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진시황은 군주를 비방하며 유언비어로 백성을 문란하게 만들고 있던 함양(咸陽) 지역의 유생들을 붙잡아 460여 명은 생매장시키고08 일부는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09 이것이 소위 ‘갱유’라는 것이다.
  갱유는 진시황을 포악한 군주로 보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갱유사건 때 희생된 유생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기축옥사(己丑獄事) 때는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선비들의 수만 해도 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10 이 외에도 갱유사건 때 죽은 희생자들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한 정치적 사건을 역사에서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시황은 세간에서 오해받듯이, 전국의 모든 유생을 죽이거나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갱유는 함양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그 규모도 다른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전국의 유생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징계해야만 했다. 통일제국의 기초가 아직 부실하고 정복당한 망국 유민들의 불만이 높던 시절에 유생들의 행위를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곳곳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 번져나갈 것임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시황이 선택한 방법은 제국의 수도인 함양 지역의 유생들 일부를 죽임으로써 전국의 유생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11 물론 이런 이유가 진시황의 갱유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의 전후와 본말을 감안하면 유독 진시황이 중국 역사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생매장시킨 폭군이었다는 세간의 오해는 좀 심한 감이 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단행하였으며, 그 정책 때문에 학문이 위축되고 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분서갱유가 상당히 강압적이고 극단적인 정책임은 분명했지만,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균형 있는 시각에서 기록했어야 한다. 그래야 진시황에 대한 공과(功過)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진이 멸망한 뒤 새로 들어선 통일국가는 한(漢)이다. 한은 새 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전 정권이었던 진의 실정을 과대하게 부풀려 부각시켜야 했다. 마침 진시황은 부국강병을 위해 법가(法家)의 사상을 추구하는 입장이었고, 고루한 공론만 일삼는 유가(儒家)의 유생들을 싫어했으며 『시경』과 『서경』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한은 이것을 구실로 진시황을 폭군으로 매도했다. 당시 한은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유가의 사상을 채택하였고 역사 기록 역시 유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진시황의 치적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평가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12 결국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 오명은 무려 2천 년 동안 진시황이 손가락질 받도록 만들었다. 이런 불공평한 처우는 진시황으로 하여금 하나의 원(冤)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13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 때, 이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일 자체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그 일의 맥락과 선후·본말을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 그 일을 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할 때 과연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아무리 일의 명분이 좋았더라도, 일을 행할 때 품었던 마음이 바르지 못했다면, 일을 한 사람과 그 일의 가치는 떨어진다. 반면에 일을 도모하다 성사시키지 못하고 실패했더라도, 그 일을 할 때의 마음가짐이 훌륭했다면, 그 일을 도모한 사람의 가치는 더 없이 높아진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수십 만 명을 상해케 하였고 그 자신도 전투에 져서 처형을 당했다. 한 마디로 전봉준은 백전백승을 보장하는 유능한 장수는 못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는 오직 그의 마음을 보셨기에 그를 무능하고 부족하다 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만고의 명장으로 인정해주기까지 하셨다.14 전봉준이 높게 평가받도록 만들었던 그 잣대가 진시황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진시황의 본 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상제님께서 진시황이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셨던 사실에서, 진시황에게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본 모습이 따로 있었음이 분명히 인정되기 때문이다.

 

 

 


01 상제님의 공사는 폭 잡기가 매우 어려워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범인(凡人) 수준에서의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무당도수를 알기 위해서는 무당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사실 춤이나 장고, 재인 등과 같은 주변 장치들이 있다고 해도 무당은 무속의 ‘무녀(巫女)’라는 표면적 의미 외에 또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를테면 무당은 이 당(黨) 저 당(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당(無黨)’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상제님 화천 후 차경석, 김형렬, 박공우 등의 종도들은 우후죽순처럼 저마다의 종교를 창립하였다. 도주님께서는 계시로써 천명을 받드시고 종통을 세우셨기 때문에, 상제님 종도들이 만든 파벌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 당(黨) 저 당(黨)을 다 버린 무당(無黨)으로 볼 수 있으니, 무당(無黨)이신 도주님께 빌어야 살 길이 열리게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02 말없이 헤어질 때의 정은 달과 같으나, 때가 되면 다시 올 것을 조수가 밀려드는 것처럼 믿는다.
03 헐거나 상처 난 피부 속으로 세균이 침투하여 생기는 병증. 때로 물집이 생기고 터지면 누런 물이나 고름이 나온다.
04 황공스럽게 땅에 엎드려 몸과 마음을 살펴 문안을 드리옵니다. 불충하고 불효하며 두서가 없는 이 몸은 만 번 죽을 것이오나 임금께, 부모께, 스승께 눈물로 축원하옵니다. (임금, 부모, 스승의) 몸과 마음이 크게 평안하기를 천 번 만 번 엎드려 빌고 또 엎드려 비옵나이다.

05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96호, 「안중근의 생애와 의거」; 『대순회보』 112호, 「금강석 같은 충의(忠義)의 얼, 적을 감동시키다」 참조.

06 사마천 지음, 최대림 번역, 『史記(本記ㆍ世家)』,  홍신문화사, 1996, p.35.
07 이상기,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대한 시말」 『중국어문』 14,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1993, pp.201-202.
08 물론 진시황이 460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것이 아니라 처형하였거나 또는 학문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09 사마천 지음, 앞의 책, p.38.
10 18세기 중엽에 남하정(南夏正)이 저술한 『동소만록(桐巢漫錄)』 券1에 기축옥사 때 죽은 자가 1,0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己丑鄭逆之獄 … 蔓延三載 死者幾千餘人.”
11 이상기, 위의 글, pp.204-205 참조.
12 이상기, 위의 글 참조.
13 물론 진시황에게는 불로장생을 이루지 못했다는 또 다른 원(冤)이 있다. 주지하듯이,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얻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지만 실패했다.
14 공사 1장34절 참조.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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