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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 『전경』속 역사인물

대순진리회 회보

by 벼리맘1 2024. 1. 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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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張儀)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동학가사(東學歌辭)에 세 기운이 밝혀있으니 말은 소·장(蘇秦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두(李太白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도다. (교법 2장 42절)

 

 

이 구절에서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말과 지식, 문장에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장의(張儀, 기원전 328년경~309년경에 활약)는 소진(蘇秦, 기원전 334년경~317년경에 활약)과 더불어 언변(言辯)으로 전국시대를 풍미한 유세가(遊說家)이며, 진혜왕(秦惠王) 때 무신군(武信君)에 봉해졌다. 역사적으로 전국시대에 등장한 이러한 일군의 사상가들을 흔히 종횡가(縱橫家 또는 從衡家)01로 분류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상황

중국의 사회 구조와 제도가 처음으로 정립된 왕조는 주(周)왕조다. 주(周)는 하(夏) · 은(殷)의 뒤를 이어 요순시대의 이상 정치를 행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이상 사회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경 북방 견융(犬戎)족의 침입으로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기면서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475)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75~221)로 접어들게 된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천자국인 주왕실(周王室)을 받드는 봉건제가 약하게나마 유지되었으나, 전국시대에는 그마저 사라져 주왕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말 그대로 제후국끼리 싸워서 힘을 과시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풍조가 중국 전체에 만연하였다. 이러한 풍조를 조장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장의였다.

춘추시대의 수많은 나라가 난립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진(秦) · 초(楚) · 연(燕) · 제(齊) · 한(韓) · 위(魏) · 조(趙)의 일곱 나라가 주축이 되었으니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다. 전국칠웅 가운데 신흥 강국 진(秦)은 나머지 여섯 나라에 비해 훨씬 강성했다. 그래서 그 여섯 나라가 당면한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진과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세워서 자국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전국시대 당시 정치적 역학은 오로지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을 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중원(中原)의 세력 판도는 서북방의 신흥 강국인 진이 함곡관(函谷關)02 서쪽을 넓게 차지하고, 이에 대하여 동쪽에는 여섯 나라가 벽을 둘러치듯 거의 남북 종렬로 위치한 형태였다. 합종의 종(從)은 ‘종(縱)’, 즉 세로를 의미하며, 여섯 나라가 남북으로 동맹하여 진을 봉쇄하는 체제다. 연횡의 횡(衡)은 ‘횡(橫)’, 즉 가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각국이 개별적으로 진과 동서로 동맹 관계를 맺어 평화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말한다. 합종책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전개해 진의 동쪽 진출을 15년 동안 막은 인물이 소진이며, 이에 맞서 연횡책을 전개해 진의 전국통일을 도운 인물이 장의다.03

 

 

 

수학(修學)과 유세(遊說)

장의는 중원에서도 중앙에 해당하는 위나라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제나라로 가서 소진과 함께 종횡가의 원조인 귀곡자(鬼谷子)에게서 유세학을 배웠다.04 귀곡선생의 문하에는 이들 외에도 지난날 병법을 배운 방연(龐涓)과 손빈(孫臏)도 있었다. 소진과 장의는 귀곡선생으로부터 강태공이 주석한 『음부경(陰符經)』05과 ‘췌마술(揣摩術)’06을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07 이러한 공부는 유창한 말솜씨로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외교 전술을 펼쳐 천하의 판을 다시 짜는 데 필요한 방법들이었다.

학문 연마를 마친 두 사람 중에 먼저 출세한 사람은 소진이었다. 소진이 조나라에서 합종을 성사시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장의는 각 제후를 찾아다니다 초나라로 들어간다. 그는 초나라 재상 소양(昭陽)의 식객(食客)이 되어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연회에서 재상의 가보인 화씨벽(和氏璧)08이 사라졌다. 재상의 부하들은 장의를 의심했다.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불량하니 분명 재상의 화씨벽을 훔쳤을 것입니다.” 도난 사고가 보고되고 부하들이 장의를 붙잡아 매질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래도 장의는 화씨벽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고, 뚜렷한 증거도 없었으므로 소양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풀어주었다.

이 무렵 소진은 조나라 왕을 설득하여 합종을 약속받았지만, 진나라가 제후들을 공격하여 합종의 연대를 깨고 서로 등을 돌리게 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소진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나라에 힘을 쓸 만한 사람은 장의밖에 없었다. 소진은 장의에게 은밀히 심복(心腹)을 보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계획을 꾸몄다.

심복의 정체를 모르는 장의는 “소진이 재상이 되었으니 옛 친구의 도움을 청해보는 게 어떻겠는가?”라는 심복의 말을 듣고 난 뒤 곧바로 조나라로 가서 소진에게 만나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재상 소진은 문지기에게 그를 들여보내지도 말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렇게 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장의는 정무로 바쁜 소진을 만날 수 있었다. 소진은 장의를 뜰 한구석에 앉게 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장의를 천거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꾸짖고는 돌려보냈다. 장의는 옛 친구에게 도움은커녕, 모욕을 당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의는 제후들 가운데 섬길 만한 자는 없지만, 진나라라면 조나라와 소진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간다.

장의의 처지와 미천한 신분으로는 진나라 왕을 만날 수 없었다. 진나라에서 만난 후원자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장의는 번듯한 행색으로 차려입고, 왕에게 바칠 예물인 폐백(幣帛)을 준비하여 수레를 타고 진나라 수도로 들어갔다. 마침내 장의는 진혜왕을 만날 수 있었고, 혜왕은 그에게 객경(客卿)09의 벼슬을 내렸다. 장의는 자신을 도운 후원자에게 신세 진 것을 갚으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저는 조나라 재상 소진의 가신입니다. 소군(蘇君)께서는 합종의 맹약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선생께서 진나라 조정을 장악하기를 원하여 선생을 몹시 화나게 하고, 저를 몰래 선생에게 파견하여 필요한 비용을 대주고 벼슬에 오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소군의 계책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등용되셨으니,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의가 감복하여 말했다. “내가 소진만 못 한 것이 분명하오. 내가 소진의 책략으로 진나라에 등용되었는데, 어찌 조나라를 치겠습니까? 소진이 살아있는 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내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소진과 장의는 동문수학한 상대를 서로 배려하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장의는 진나라 재상이 되었고, 진나라에 등용된 지 15년이 되었다. 소진이 조나라에서 실각하기 전까지 장의는 합종을 깨지 않았다. 소진이 조나라에서 실각하여 떠났으므로 장의는 합종을 깰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10 그 무렵 진혜왕(秦惠王, 또는 秦惠文王)은 촉을 공격하여 진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진나라는 더욱 강성해졌다.

진혜왕 10년에 장의는 진혜왕에게 연횡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지금 천하는 6국이 합종을 하여 우리 진에 대항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15년 동안이나 함곡관(函谷關)을 나가서 중원을 경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합종을 깨고 연횡을 이루어 천하를 도모해야 합니다. 연횡은 6국을 하나씩 진에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진혜왕은 장의의 연횡론에 찬성했다. 장의는 지리적으로 진과 경계한 자신의 조국 위나라에 대해서는 6국 동맹에서 탈퇴해 진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였다. 위애왕(魏哀王)은 맹약을 깰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장의는 위나라를 위협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먼저 한나라를 공격하여 8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장의는 다시 위애왕을 설득하였고, 위나라는 마침내 장의의 위협에 굴복하여 합종을 깨고 진나라에 화친을 청하였다.

진이 제를 치려고 하자, 제와 초는 합종을 맺는다. 이에 장의는 먼저 초회왕(楚懷王)을 만나 상(商)과 오(於)의 땅 6백 리를 바친다고 속여 초와 진의 동맹을 성사시킨다. 물론 진나라로 돌아온 장의는 6백 리의 땅은커녕 한 뼘도 주지 않고 초와 제를 이간질했다. 장의의 이간질로 초와 제는 절교를 선언한다. 장의는 초회왕을 속인 죄로 자신에게 화가 난 회왕의 노여움이 풀려야 초와 진의 연횡이 가능하리라 판단하여 자진해서 초나라에 인질로 잡혀간다. 장의는 초나라에서 자신의 측근 근상(靳尙)을 매수하고, 근상과 회왕의 부인 정수(鄭袖)를 통해 회왕의 노여움을 풀고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장의는 초나라를 떠나기 전에 초회왕에게 이렇게 설득한다. “… 천하의 제후들 가운데 남보다 늦게 복종하는 자는 먼저 망할 것입니다. 또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 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 떼의 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진은 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 땅의 형세로 보아도 서로 가깝게 지내야 할 사이입니다. 왕께서 진심으로 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신다면, 신은 진의 태자를 초에 볼모로 보내고 초의 태자를 진에 볼모로 보내겠습니다. 또 진의 왕녀를 왕의 시첩으로 삼게 하고, 1만 호(戶)의 도읍을 바쳐서 왕의 탕목읍(湯沐邑)11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초와 진은 형제의 나라가 되어 영원히 서로 정벌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장의는 맨 먼저 자신의 조국 위나라와 진나라의 화친을 시도했다. 그리고 초나라 회왕을 설득해 배후의 위협을 없앤 다음, 한나라 위후(威侯)→제나라 민왕(湣王)→조나라 무령왕(武靈王)→연나라 소왕(昭王)에 이르기까지 협박과 회유로 합종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장의의 연횡이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6국의 동맹이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의는 동맹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한쪽 귀퉁이를 무너뜨린 다음, 그 탄성을 이용해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동맹 전체를 와해시켰다. 이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원교근공’이란 멀리 떨어진 제후국과는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인접한 제후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으로, 진이 중국을 통일[기원전 221년]할 때까지 국시(國是)로 삼았다.

 

 

장의의 죽음

6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연과 진의 연횡을 성사시킨 장의는 이 일을 알리기 위해 진으로 간다. 그러나 그가 미처 진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혜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하게 된다. 진무왕(秦武王)은 태자 시절부터 장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왕이 되자 신하들 대부분이 장의를 헐뜯었다.

장의는 자기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진무왕을 직접 찾아가 사태를 해결하려 하였다. “동쪽에 큰 변란이 있어야만 왕께서 제후들의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나라가 진나라에 가장 많은 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제나라 왕이 저를 무척 미워합니다. 제나라는 제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위나라로 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제나라는 반드시 위나라를 정벌할 것입니다. 위나라와 제나라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왕께서 한나라로 들어가고, 군사를 함곡관 밖으로 출병하여 공격은 하지 않으면서 주나라를 압박하면, 주나라는 왕권을 상징하는 제기(祭器)를 내놓을 것입니다. 천자를 끼고 천하의 토지와 호적을 살펴서 제후들을 호령하는 것이 왕자(王者)의 사업입니다.”

진무왕은 장의의 말을 그럴듯하다고 여기고는 장의를 위나라로 보냈다. 제나라는 과연 대군을 파견해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애왕이 두려워하자, 장의는 자신이 제나라 군대를 퇴각시키겠다며 애왕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신(家臣)인 풍희(馮喜)를 제나라로 보내 제민왕을 달래도록 하였다.

“왕께서 정말 장의를 미워하신다면 위나라를 공격하지 마십시오. 장의는 진나라를 떠날 때 진왕에게, 제나라가 자신이 가는 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그 틈에 주나라 수도로 진군하여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지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진왕이 그를 위나라로 보냈는데, 지금 왕께서 위나라를 공격하면 장의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제민왕이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그래서 위나라 공격을 중단했으며, 장의는 위나라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12 소진의 비극적인 죽음과는 대조적인데, 전국시대 말기를 화려하게 주름잡았던 풍운의 책략가가 맞은 죽음치고는 차라리 무미건조했다.

 

 

장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장의의 연횡책은 철저하게 ‘힘의 논리’다. 반면에 국력은 약하지만, 지리적 이점과 군사들의 사기와 국왕의 통치력 등을 분석한 다음 동맹으로 6국을 설득하던 소진의 논리는 정교하다. 그러나 장의의 논리는 소진에 비해 거칠기는 하지만 설득력이란 면에서는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소진이 열거한 각국의 장점을 철저하게 반대 논리에 따라 약점으로 지적한 부분은 그 당시 제후들이 연횡책을 따른 이유이며, 웅변과 관련하여 『전경』에 장의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종의 제국주의 정책을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진나라에 대해서 힘이 약한 여섯 나라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정책은 연합해서 대항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장의는 진나라의 신하로서 진나라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였으므로, 여섯 나라에 궁극적으로 멸망하는 길을 택하도록 설득한 것이다. 강압적이고 기만적인 외교술로 제후국들을 무력화하는 데 앞장섰던 장의는 훗날 진시황(秦始皇)의 천하 통일[기원전 221년]에 이바지하였지만, 역설적으로 힘과 모략을 앞세운 장의의 외교술은 진나라의 멸망[기원전 206년]을 앞당긴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열전』(上),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5.

·유향 편, 『전국책』 1, 임동석 역주, 서울: 동서문화사, 2011.

·김영수, 『지혜로 읽는 사기』, 서울: 푸른숲, 2002.

·이인호,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 서울: 천지인, 2007.

·이수광,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중국편 上, 서울: 일송-북, 2002.

·조면희, 『전국시대 이야기(上)』, 서울: 현암사, 2007.

·조성기, 『새롭게 읽는 전국책』 1, 서울: 동아일보사, 2004.

·오카자키 유미 외 2명, 『영웅의 역사』 2, 이재정 옮김, 서울: 솔, 2000.

·김승동 편저, 『도교사상사전』, 부산: 부산대학교출판부,, 2004.

·《대순회보》 101호, 「전경 속 역사인물- 소진」 참조.

 

 

 


01 합종연횡가의 줄인 말이다. 합종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소진과 그의 두 동생인 소대(蘇代)와 소려(蘇厲)다. 연횡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장의와 진진(陳軫), 서수(犀首) 등이다.

02 지금의 중국 허난성(河南省) 신안현(新安縣)이며, 허난성 서북부에 있어 동쪽의 중원(中原)으로부터 서쪽의 관중(關中: 陝西)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이다. 진의 경계를 함곡관 대신 허난성 낙녕현의 효산(崤山)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진 이외의 나머지 6국이 효산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여섯 나라를 ‘산동 6국’이라 불렀다.

03 장의에 관한 자료는 주로 한대(漢代)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과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주로 이 두 기록을 중심으로 보완 정리하였다.

04 유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혹은 일어난 전쟁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각 제후국을 찾아다니며 다른 나라와 연합하든지 전세가 불리할 경우 차라리 땅을 떼어 주어 전쟁으로 치러야 하는 살상을 막고 실리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05 병가(兵家)에 속하는 『주서음부(周書陰符)』와 도교에 속하는 『황제음부(皇帝陰符)』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도장(道藏)』에 남아 있는 『황제음부』로 강태공(姜太公) · 범려(范蠡) · 귀곡자(鬼谷子) · 장량(張良) · 제갈량(諸葛亮) 및 당나라 이전(李荃)과 장과로(張果老)가 주석을 달았다. 주요 내용은 천인합발(天人合發) · 만변정기(萬變定基)의 이치를 천명하고, 음양상승술(陰陽相勝術)에 근거해서 치국(治國)과 용병(用兵)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道家) · 종횡가(縱橫家) · 병가(兵家)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06 췌정마의술(揣情摩意術)은 오늘날 심리 연구의 일종으로 상대방의 감정과 의지를 헤아려 그 마음을 읽고 유도 조종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07 사마천의 「장의열전」에는 장의가 구체적으로 공부한 내용에 대해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에게 가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므로 소진이 공부한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유추할 수 있다.

08 옛날 초나라 문왕때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하남성 형산(荊山)에서 캔 옥으로 일정한 영토와 맞바꿀 만큼 초나라 왕실 최고의 보배로 내려왔다. 변화(卞和)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화씨벽으로 부르게 되었다.

09 주로 정치 · 외교 고문 또는 자문 역할을 외부 인사에게 맡기면서 나타난 특수한 제도. 각국의 정보와 풍부한 외교경험을 소유한 인물이 주로 발탁되었다.

10 소진이 연나라를 거쳐 제나라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그가 죽은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317년 설과 기원전 284년 설이 있다. 장의가 소진이 살아 있는 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한 맹세와 그의 활약상을 비교해보면 기원전 317년 설이 유력하다. 물론 장의의 맹세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합종책이 있은 다음 연횡책이 나온 것이 틀림없으므로 소진이 죽은 연대는 기원전 317년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11 천자가 조회 온 제후에게 목욕재계하는 데 사용하라고 내린 땅. 그 뒤로 왕은 물론 왕비와 공주 등의 개인 소유의 토지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장의가 탕목읍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힘의 논리에서 진이 우위에 있으므로 진이 탕목읍을 내린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12 『사기』의 「육국 연표(六國年表)」와 「위세가(魏世家)」를 보면, 장의는 위애왕(魏哀王) 10년, 진무왕(秦武王) 2년, 즉 기원전 309년에 죽는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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