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가 북진해 동마(銅馬), 중련(重連), 고호(高胡)의 군적(群賊)을 쳐부술 때 오한은 늘 돌격기병대 5천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섰는데 자주 앞장서서 성에 올라 진을 허물어뜨리곤 했다. 25년 하북(河北)이 평정되자 오한과 여러 장수들이 유수를 추대하니 이가 곧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오한을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하고 다시 무양후(舞陽侯)에 봉했다.
25년 유수가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로 즉위하면서 한의 부흥을 선언했지만 그를 따르는 세력은 크지 않았고 시대는 여전히 난세였다. 당시의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전한 말 각지에서 발생한 작은 반란들의 불길이 확대되어 중국 전역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전국이 도적의 소굴로 변했고 식량과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일상적인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의 부흥을 선언한 이상 이런 반란 세력을 하나씩 진압해 가는 것이 유수에게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었다. 바야흐로 전국 평정을 위한 악전고투의 10년이 시작되었고 오한을 비롯한 28장이 그 선두에 서게 되었다.
26(건무 2)년 봄에 오한은 대사공(大司空) 왕양[王梁, 방(房) 별을 관장]과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 대장군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 심(心) 별을 관장], 양화장군(揚化將軍) 견담[堅鐔, 위(危) 별을 관장],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 벽(壁) 별을 관장], 기도위(騎都尉)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 음식(陰識) 등과 함께 업성 동쪽 장수(漳水) 부근에서 단향적(檀鄕賊)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10만이 항복했다. 광무제가 사자에게 새서(璽書)를 보내 오한을 광평후(廣平侯)로 삼고 광평(廣平), 척장(斥漳), 곡주(曲周), 광년(廣年) 등 네 현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오한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업(鄴) 서산(西山)의 여백경(黎伯卿)과 하내(河內)의 수무(脩武) 등 자신들의 근거지에 있던 도적들을 모두 격파했다. 이에 광무제가 직접 오한의 병영에 행차하여 치하했다.
광무제는 다시 오한으로 하여금 남양으로 진격하여 완(宛), 열양(涅陽), 역(酈), 양(穰), 신야(新野) 등의 여러 성을 치게 했는데 모두 함락시켰다. 오한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황우수(黃郵水, 남양 신야현) 부근에서 진풍(秦豊)과 싸워 격파시켰다. 또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 실(室) 별을 관장]와 함께 창성(昌城) 오루(五樓)에서는 장문(張文)을, 신안(新安)에서는 동마(銅馬), 오번(五燔)을 공격했는데 모두 격파했다.
그 이듬해인 27(건무3)년에 오한은 봄에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과 호아대장군(虎牙大將軍) 합연[蓋延, 삼(參) 별을 관장]을 거느리고 지(軹)의 서쪽에서 청독을 대파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광악(廣樂)에서 소무(蘇茂)를 포위하였다. 이때 천자를 자칭한 유영(劉永, ?-27)01이 주건(周建)을 거느리고 군사 10만을 불러 모아 광악을 구원하게 하였다. 오한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오한이 말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쳐 군영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오한의 부상으로 한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주건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장수들이 오한에게 보고했다.
“대적(大敵)이 눈앞에 있는데 공께서는 다쳐 누우셨으니 뭇 장수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합니다.”
오한은 이에 의연히 붕대를 감고 일어났다. 그는 소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들을 격려했다.
“적의 무리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에 불과하다. 절의를 좇아 행동하고 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자들이 아니다. 승리는 양보할 수 없고 패멸(敗滅)엔 서로 구제할 수 없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그대들이 제후(諸侯)에 봉해지려는 순간이니 제군(諸君)들은 힘쓰도록 하라.”
앞서 오한이‘학문이 짧아 문장이나 말로 자신의 뜻을 빨리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때 오한이 한 말을 보면, 그의 평소 말재주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총사령관 오한의 격려에 병사들은 사기충천했다. 이튿날 주건과 소무가 병사들을 내보내 오한을 포위했다. 오한은 정병을 선발하여 황두(黃頭) 오하(吳河)와 오환(烏桓)의 돌격 기병 3천여 명을 뽑아 일제히 북을 치면서 진군케 했다. 한 차례의 접전 후 주건의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성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오한이 계속 쫓아가 성문 근처에서 싸우다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서 크게 격파했다. 이에 소무와 주건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오한은 두무(杜茂)와 진준[陳俊, 미(尾) 별을 관장]을 남게 하여 광악(廣樂)을 수비케 하고 자신은 추격을 계속했다. 오한은 곧 수양(睢陽)에서 유영을 포위하고 있던 합연을 도우러 갔는데, 그가 수양에 도착했을 때 유영은 이미 죽고 두 성(城)이 모두 항복한 상태였다.
28(건무4)년에 오한은 진준 및 전장군(前將軍)02 왕양(王梁)을 거느리고 임평(臨平)에서 오교(五校)를 격파하고 동군(東郡)의 기산(箕山)까지 쫓아가 섬멸시켰다. 오한은 북으로 청하(淸河), 장직(長直) 및 평원(平原)의 오리(五里)를 쳐 모두 평정시켰다.
오한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는데 그는 단지 싸움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다음은 오한의 사리판단이 참으로 현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시기에 격현(鬲縣, 산동성 陵縣)의 호족(豪族)인 다섯 성씨(姓氏)들이 공모하여 현의 수장을 쫓아내고 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그들을 쳐부수자고 했다. 반란이 일어났으니 진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한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부하 장수들에게 엄중 경고했다.
“격현에 반란이 발생한 것은 모두 수장(守長)의 죄이다. 감히 가벼이 군대를 내보자는 자는 베어버리겠다.”
그리고 격문을 격현에 보내어 그 수장을 잡아들이게 하고 사람을 시켜 성중의 사람들에게 사과하게 했다. 반란을 주동한 다섯 호족들은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투항했다. 여러 장수들이 탄복하면서 말했다.
“싸우지 않고도 성을 항복시켰으니 저희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오한과 같이 단순히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파악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 해 겨울에 오한은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과 한충대장군(漢忠大將軍) 왕상(王常)을 거느리고 평원(平原)에서 부평(富平)과 획색(獲索)을 격파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9(건무5)년 봄에 도적들이 5만 무리를 이끌고 밤중에 오한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군중이 놀라 법석을 떨었으나 오한은 누운 채로 있으면서 동요되지 않으니 군영의 동요도 이내 평정되었다. 군영이 평정을 되찾게 되자 오한은 곧바로 정병을 편성하여 도적들을 습격하게 하여 그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잔당을 쫓으면서 마침내 무염(無鹽)까지 이르렀는데 발해(勃海)에서 격파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또 동헌(董憲)을 무너뜨리고자 구성(朐城, 강소성 東海縣 남쪽)을 포위하고 이듬해 봄에 성을 함락시켜 동헌을 참수했다. 동방이 평정됨에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파촉을 평정한 오한
오한이 전투에서 언제나 이긴 것은 아니었다. 외효(隗囂, ?-33)03와 공손술(公孫述, ?-36)04의 반란은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외효가 자신의 근거지인 감숙(甘肅)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한은 장안의 서쪽에 주둔해 있었다. 32(건무8)년 오한은 광무제가 농(隴, 현재의 감숙성)에 행차하자 그를 호위하였고 서성(西城)에서 외효를 포위했다. 이때 광무제는 오한에게 조칙(詔勅)을 내렸다.
“여러 군에서 온 갑졸들은 단지 앉아서 양식만 소비할 뿐이며,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라도 있게 되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여 패배하게 될 것이오. 마땅히 모두 해산시켜야 하오.”
그러나 외효의 정벌에 몰두했던 오한은 광무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도 있듯이 군대의 숫자는 많은 쪽이 작전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무제는 하나의 전쟁을 책임진 장수로서가 아닌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오한이 아무리 전쟁에 능하다고 해도 광무제와 같이 멀리를 내다보는 안목은 없었다. 광무제의 예상대로 오한군의 양식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관리와 병사들은 피로해져서 도망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오한군의 전력이 약화되었을 때, 외효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 공손술의 공격으로 오한은 결국 패배했다.
35(건무11)년 봄에 오한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을 이끌고 공손술을 치러 떠났다. 잠팽이 형문(荊門, 호북성 형문현의 남쪽)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강관(江關)으로 진격해 들어갈 즈음에 오한은 이릉(夷陵)에 머물며 노요선(露橈船)을 갖춘 뒤 남양(南陽)의 병사들과 감형 모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때 잠팽이 공손술이 파견한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오한은 잠팽의 병사들을 병합하여 거느렸다.
36(건무12)년 봄에 오한은 공손술의 부하인 위당(魏黨), 공손영(公孫永)과 어부진(魚涪津)에서 접전하여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무양(武陽)을 포위했다. 위협을 느낀 공손술이 그의 사위 사흥(史興)에게 오천의 군사를 주어 무양을 구원하도록 했다. 오한이 사흥을 맞아 그 무리를 모두 베고 건위(犍爲)로 들어가 경계로 삼았다. 여러 현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자 오한은 진군하여 광도(廣都)를 쳐 함락시켰다. 또 경기병을 보내어 성도(成都)의 시교(市橋)를 불태웠다. 이후에 무양 동쪽의 여러 작은 성들이 모두 항복했다. 오한이 계속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광무제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성도(成都)에는 10만 군사가 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광도를 굳게 지키면서 그들이 와서 공격해 오기를 기다릴 일이지 그들과 더불어 싸우지 말라. 만일 그들이 감히 오지 않으면 공이 병영을 옮기면서 뒤를 쫓으라. 모름지기 그들의 힘이 피폐되었을 즈음에 격파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된 성공에 고무된 오한은 광무제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한이 전세의 유리함을 틈 타 스스로 보병, 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강의 북쪽을 의지하여 병영을 짓고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부장(副將)인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에게 만여 명을 주어 강 남쪽에 주둔케 했는데 양 진영의 거리가 20리 남짓 되었다. 광무제는 이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오한을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에게 천조만단으로 칙서를 보내나니 무슨 생각으로 일에 임함이 그리 혼란한가? 이미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으며 유상과 병영을 달리하고 있다. 일에는 완급이 있을 터 다시는 서로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적들이 군대를 내어 그대를 에워싸고 많은 병사들로 유상을 공격할 경우 유상이 무너지면 그대도 패하게 되리라. 다행이 아직 아무 일도 없으니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라.”
그런데 조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광무제의 예견대로 공손술이 그 휘하의 장수 사풍(謝豊)과 원길(袁吉)에게 약 10만의 병사를 주고, 20개 진영으로 나누어 동시에 오한을 공격토록 했다. 또한 별도로 만 명 정도의 군대를 편성하여 유상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광무제의 예상대로 적은 오한의 군대가 서로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오한이 그들과 더불어 하룻 동안 대전을 치뤘으나 패했고, 마침내 사풍이 오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오한이 이에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독려하였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이리저리 천리를 떠돌며 전쟁을 치러왔다. 머무는 곳에서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니 마침내는 적진이 깊이 들어와 그 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유상과 더불어 두 곳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으니 서로의 세(勢)가 이미 접하지 않고 그 화(禍)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이에 병사들을 잠수시켜 강 남쪽에 있는 유상에게로 가 합군하여 저들을 막을 생각이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사람마다 스스로를 위해 싸운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패하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패의 길이 이 일전에 있다.”
모든 장수들이 함께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난국을 타개할 해법은 늦었지만 광무제의 전략에 따르는 것이었다. 오한이 병사들과 말을 배불리 먹이고 군영을 닫고는 3일 동안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를 끊이지 않게 했다. 밤에 재갈을 물리고 병사들을 인솔해 유상과 합군했다. 사풍은 오한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뒷날 군대를 나누어 강 북쪽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남쪽을 공격했다.
오한의 병사들이 그들을 맞아 하루 종일 싸웠는데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사풍과 원길을 처단했으며 무기를 노획하고 5천여 명의 병사를 베었다. 이미 광무제는 광도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오한이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 공손술의 공격에 대비한 것은 전적으로 광무제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오한은 전황을 상세하게 보고 했는데 스스로를 심히 책망한 것이었다. 광무제가 이에 답하였다.
“그대가 광도를 돌아간 것은 매우 잘한 것이다. 공손술은 유상을 공략하려고 대들지 않고 그대를 치려고 들 것이다. 만일 그들이 먼저 유상을 공격할 경우 광도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보병, 기병을 모두 이끌고 광도로 가 때맞추어 위기를 구원하면서 반드시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광무제의 지시대로 오한은 광도와 성도를 오가면서 공손술과 여덟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연이은 패배로 천자를 자칭했던 공손술이 직접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공손술이 성문을 나와 오한군과 대전을 펼쳤는데, 오한은 호군(護軍) 고오(高午)와 당감(唐邯)에게 수만 명의 정예 병사를 주어 대적하게 했다. 공손술의 병사들이 패하여 도주하자 고오가 공손술의 진영을 흩트리고 그를 잡아 죽였다.
이듬해인 37(건무12)년 정월에 오한이 완(宛)에 이르렀을 때 광무제가 조서를 내려 집에 둘러 선영도 찾아보게 하고 곡식 2만 곡(斛)을 하사하였다.
39(건무15)년에 오한은 양무장군(揚武將軍) 마성[馬成, 항(亢) 별을 관장]과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 흉노를 격파했다. 또한 후속 조처로 흉노의 침입이 잦은 안문(鴈門), 대군(代郡), 상곡(上谷)의 관리와 백성 6만을 거용(居庸)과 상관(常關) 동쪽에 옮겨 살도록 했다.
42(건무18)년 촉군(蜀郡)의 장수 사흠(史歆)이 성도(成都)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면서 태수 장목(張穆)을 공격하였다. 사흠의 공격으로 장목이 성을 버리고 광도(廣都)로 도망하자 사흠이 각 군현에 격문을 띄웠는데 탕거(宕渠)의 양위(楊偉), 구인(胊月忍)의 서용(徐容)이 각기 수천 명의 병사를 일으켜 이에 동조했다. 사흠은 이전에 잠팽의 호군으로 있으면서 군대의 제반 사무를 익힌 자였다. 광무제는 오한에게 유상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장궁(藏宮), 그리고 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그를 토벌토록 했다.
오한이 무도(武都)로 들어가 광한(廣漢), 파(巴), 촉(蜀)의 세 군(郡) 병사를 징발하여 성도를 포위했다. 백여 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사흠을 처단했다. 오한이 반란의 주동자를 제거한 뒤에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 파군(巴郡)에 이르자 양위와 서용은 두려워하여 흩어졌다. 오한은 이번 반란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2백여 명을 처단하고 그 잔당과 수백의 여염집을 남군(南郡)과 장사(長沙)로 이사시키고 돌아왔다.
오한의 인품과 평가
오한의 성품은 강직하고 힘이 있었다. 광무제를 수행하여 매번 정벌에 나설 때면 항상 황제 곁을 지키곤 했다. 또한, 다른 장수들은 전황이 불리해지면 대개는 두려워하며 상도(常道)를 잃었으나 오한은 태연하게 무기를 정돈하고 다듬으며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켰다. 광무제가 때때로 사람을 파견하여 대사마 오한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고 오게 했다. 명을 받은 신하가 돌아와서 말하길 전쟁에 쓸 도구를 수리하고 있다고 보고 하니 광무제가 감탄하여 말했다.
“오공(吳公)은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하니, 위엄 있는 모습이 국가를 대적할 만하다”
신하의 보고대로 오한의 군대는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오한의 군대는 아침에 황제의 조서를 받으면 저녁에는 군대를 인솔하여 이동할 수 있었는데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오한이 조정에 있을 때는 밝게 살피고 신중하게 처신했는데 그의 이런 모습은 가정사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일찍이 오한이 출정을 떠났을 때 그 처(妻)가 농지를 사들였는데 오한이 돌아와서 이를 꾸짖었다.
“군대가 밖에 있고, 관리와 병사들이 부족한 판국에 무슨 일로 그리 많은 전택(田宅)을 사 모으느냐.”
오한은 그의 처가 사 모은 밭과 가옥을 모두 형제들과 외가에 주었다. 오한의 처가 밭과 집을 사들인 것은 당시로서는 크게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한의 이런 언행이야말로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시는 위기의 시대였다. 그러나 사회적 위기는 하나의 큰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재산 축적에서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평시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헐값의 밭과 가옥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헐값으로 매입한 전답은 사회가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면 제 값을 받을 수 있고 그 차액은 실로 작지 않았다. 오한은 천하대란을 기회로 그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국가 최고위직에 있는 이라면 이 정도의 도덕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오한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신중하게 처신했고 이런 이유로 항상 직분을 맡을 수 있었으며 끝까지 공명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44(건무20)년에 오한의 병이 심하였다. 광무제가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여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오한이 대답했다.
“신이 어리석어 아는 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신중하게 처리하셔서 사면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오한의 말은 자신에게 많은 잘못이 있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보통 황제가 와서 이렇게 물을 때는 자신의 사후에 관한 부탁을 하는 예가 대부분인데 오한은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어 사죄하고 있는 것이다. 오한이 죽자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애도를 표하고 시호를 충후(忠侯)라 했다. 담당 관리들이 오한의 시호(諡號)를 무(武)로 하길 청했으나 광무제의 특별 지시로 충후로 정해졌다. 광무제가 오한의 시호를 변경토록 한 것은 그의 공로가 단지 전쟁에 나가 장수로서 국가에 보답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한의 유언을 보면 누구라도 그가 참으로 충성된 신하였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장례는 광무제의 지시로 전한(前漢)의 대장군 곽광(霍光)의 고사에 의거하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후한서』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광무제에게 발탁된 이래 항상 국가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황제의 신임을 잃지 않았던 오한의 풍모를 극찬하고 있다. 『논어』 「자로」편을 보면 “강직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것은 인(仁)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인용하여 이 말이 오한에 비견될만하다는 것이다.05 실로 오한은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할 말은 했고, 강하고 굳세면서도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심지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자신의 허물을 드러낸 오한의 최후를 보면서 『사기』의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06 (오한 끝)
01 22년 경시제(更始帝)에 귀순하여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경시제의 정치가 혼란하자 동헌(董憲), 장보(張步) 와 연합하여 성을 공략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여 천자를 자칭했다. 26(건무 2)년 광무제가 합연(蓋延)을 파견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다음해인 27(건무 3)년 부장 경오(慶吾)에게 피살되었다.
02 이전의 장군이란 의미가 아닌 선봉장의 뜻이다.
03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경시제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제를 협박하여 그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04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제(更始帝)가 선 이후 경시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장군(輔漢將軍)이라 칭하고 촉군태수(蜀郡太守)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니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