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요람』의 제2장에서 우리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존칭과 그 존칭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는 최고신의 존칭임과 동시에 최고신과 만물의 관계, 그 권능 그리고 역사 가운데 강세하신 최고신에 대한 대순사상의 상제관(上帝觀)이 담겨 있다. 이러한 상제관에 대한 자각이 수도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본고에서는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좀 더 깊은 이해에 다가서 보고자 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분석을 위한 도구의 틀로서 체용의 원리를 적용한다. 체용(體用)은 중국철학에서 다루어진 중요한 철학 용어로 존재의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본체와 그 본체가 현상으로 드러나는 원리에 대한 철학적 설명방식이다. 서양사상에서 체용에 해당하는 개념으로는 실체와 기능(substance-function), 실체와 현상(substance-phenomena), 본질과 기능(essence-function)과 같은 용어가 있다. 체용은 존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으로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해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체와 현상 그리고 체용의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철학적 체계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체용은 종교적 영역에서는 절대신과 만물 사이의 원리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원이자 절대적인 본체는 절대신이며 그 아래 놓인 만물은 절대신에게서 비롯된 존재인 것이다. 그로써 절대신과 만물의 관계에 체용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다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주제를 다루기 위해 체용의 원리에 대한 개요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체용 개념이 발생해서 적극 활용된 중국불교와 중국유학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불교에서는 체용의 적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판단한 삼론종, 천태종, 화엄종, 선종, 법상종을 제시했으며, 중국유학에서는 체용이 본격적인 형태를 갖춘 송명시대부터 중국근대 그리고 현대의 유학을 제시했다. 또한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 각 종파와 학문의 중요 경전 가운데 체용이 언급된 중요 부분만을 발췌하여 제시하고 그 문장의 뜻을 분석하는 것으로 논거를 삼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전개 과정을 거쳐 중국불교와 중국유교의 활발한 학문적 전개 속에서 체용의 원리가 펼쳐진 풍부한 양상을 살펴보는 가운데 체용에 대한 이해는 좀 더 구체적이며 명확해질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대순진리회 요람의 ‘신앙의 대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체용(體用)에 대한 이해
1. 체용의 기본 원리
중국철학에서 체용이 철학적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왕필(王弼, 226~249: 중국 위나라 학자)의 현학(玄學: 중국 위진시대에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유가의 경서들을 해석하며 형이상학적 논변을 전개한 철학사조)부터이다.01 그러다가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와 중국불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활용되면서 더욱 구체적이며 체계적인 형태가 구축되었다.02 체용개념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체와 용을 하나로 종합하여 설명하고자 한 체용일여(體用一如) 혹은 체용일원(體用一元)의 논리로 삼론종, 천태종, 화엄종, 선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머지 하나는 체와 용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 체용별론(體用別論)의 논리로 법상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체용일원(體用一元)의 논리가 주자학과 양명학의 철학 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03
체용의 원리는 우주 만물의 근원과 존재의 원리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개념의 명칭은 다르지만 동서양의 사상사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따라서 체용의 원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의 깊이로 이어지며 아울러 인간이 우주 만물 가운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체용의 원리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체용은 존재하는 것의 본래의 것 혹은 존재의 근원과 그것이 드러난 현상 혹은 발현에 대한 이야기다. 체용의 원리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는 우주의 본체가 가진 총체적 속성들이 펼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본체라는 씨앗 속에 모든 요소들이 추상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그것이 구체적으로 발현되어 하나씩 전개된 것이 현상의 세계라는 나무이다.
체는 불변하며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것이며, 용은 변화하며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다. 체의 이러한 절대성과 무한성은 주로 절대자, 신(神)과 같은 존재의 특성으로 이야기되며, 용의 상대성과 구체성은 신 아래 펼쳐진 갖가지 만물이라고 이야기된다. 신의 전지전능한 권능 또한 이러한 절대성과 연관되며 군생만물의 종속성 또한 용의 상대성과 연관된다.
또한, 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합일점이며 중심이다. 근원으로부터 펼쳐진 현상의 존재는 각각 독립적 개체가 되는데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었지만 현상계에서는 서로 간의 구분이 생기며 대립이 발생하기 쉽다. 그것은 본체와 근원이라는 합일점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합일점을 상실하면 해체되고 분산되기 마련인데, 이 때 체용의 원리는 통합의 원리가 된다.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존재를 중심과 매개해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용의 원리는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체용일원(체용일여)과 체용별론이다. 체용일원은 체와 용을 하나로 묶어 시공간적 거리를 두지 않는 설명 방식이며 체용별론은 시공간적 거리를 두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체용일원은 이상과 현실의 결합 내지는 지상과 천국의 공존이라 할 수 있다. 체용별론은 체와 용의 차원이 분리되어 천상과 지상,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이러한 두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용의 근본이치, 즉 만물이 본체를 중심으로 펼쳐졌으므로 서로가 하나의 뿌리에 기거한다는 원리와 그로부터 만물의 총체성, 화합, 조화, 상생의 주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체용의 원리에서 한 가지 논란이 될 만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신과 만물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본체인 신으로부터 만물이 펼쳐졌다면 신과 만물이 한 몸이므로 동격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인도철학의 불일불이(不一不二)설과 불이일원(不二一元)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불일불이설은 인도철학의 주류인 베단타학파의 학설로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만으로부터 아트만이 생겨났으므로 양자는 동일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동일하지 않다는 학설이다. 불이일원설은 베단타학파의 샨카라(Sankara, 700~750: 중세 인도의 종교가이자 철학자)가 범아일여(梵我一如: 우주의 본질과 개인의 본질은 같다는 사상)를 토대로 주장한 학설로 본체인 브라만과 만물인 아트만은 하나로서 동일하다는 학설이다.04 이러한 두 주장의 대립은 종교적인 측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종교적 입장은 신성(神聖)의 지위를 보장할 여지가 있는 불일불이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중국불교의 체용
(1) 삼론종05(三論宗)
삼론종에서 체용은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에서 나타난다. 길장(吉藏, 549~623: 수나라의 삼론종 승려)의 이제합명중도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지금 비진비속(非眞非俗)으로 이제(二諦)06의 체를 삼고 진과 속으로 용을 삼아 리(理)와 교(敎)라고 부르고, 또 중(中)과 가(假)라고 부르는 것을 밝히겠다. 중과 가는 명칭을 중시한 것이고, 리와 교는 리와 교가 되는 것을 중시한 것이고, 체와 용은 체와 용이 되는 것을 중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不二)를 체로 삼고, 이(二)를 용으로 삼는다.”07라고 제시되는데, 여기에서 이제합명중도의 핵심은 진제와 속제를 용(用)으로 보고 비진비속을 체(體)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비진비속(진도 속도 아닌 상태)이 진리의 원형이므로 불이(不二: 둘이 아님)인 체에 대입되며, 진제와 속제는 비진비속이라는 진리의 원형이 전개된 두 개의 양상이므로 이(二)인 용에 대입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의 앎과 중생의 앎도 결국은 하나의 원형 즉 비진비속의 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것은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던져진 문제인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국 중생과 부처는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길장은 비진비속을 체로 진과 속의 이제를 용으로 보면서, 중과 가 그리고 리와 교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확장한다. 중과 리는 체로서 근원에 위치하며 그것이 발현되어 가와 교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본래적 진리는 위치에 있어 어느 곳에도 치우쳐 있지 않으므로 중(中)이며, 모든 현상의 원리이므로 리(理)인 것이다. 가(假)는 원형의 작용으로 늘 변화하므로 거짓된 허상이 되며 교(敎)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삼론종은 이와 같이 참된 앎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와 용의 개념을 비진비속과 이제, 중과 가, 그리고 리와 교에 대응하여 논리를 확장한 것이다.
(2) 천태종08(天台宗)
천태종을 개창한 지의(智顗, 538~597)는 모든 것이 한 마음에 귀속된다는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09을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공(空), 가(假), 중(中)을 일심으로 관한다는 일심삼관설(一心三觀說)10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본체와 현상, 즉 체와 용을 구분하지 않는 지(知)를 지향한 의도이다. 본체와 현상이 모두 일념에 속하므로 그 구분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본체와 현상을 물과 파도에 비유하면 본체인 물 그 자체는 파도가 없는 순수한 선이다. 다만 그것이 파도로 드러났을 때 악이 파생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체와 용을 분리할 때 악의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담연(曇延, 516~588)은 체용의 합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삼천(모든 세계)이 리(理)에 있으면 똑같이 무명(無明: 번뇌와 무지)이라고 부른다. 삼천이 과(果: 원인에 따라 일어나는 결과)를 성취하면 모두 상락(常樂: 열반의 네 가지 덕)11이라고 칭한다. 삼천에는 고치는 것이 없으므로, 무명이 바로 명(明)이다. 삼천이 모두 상(常)이므로, 체도 갖추고 있고 용도 갖추고 있다.”12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삼천에는 무명이 바로 명이다.’와 ‘체도 갖추고 있고 용도 갖추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삼천, 즉 세계를 리(理)로써 관통하면 체와 용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세계의 모습, 즉 체용의 일체된 작용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일념이라고 하며 이 일념 속에서 열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3) 화엄종13(華嚴宗)
『화엄경』에 의하면 화엄의 사상은 모든 존재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로 연결된 그 자체가 바로 불성(佛性)이라는 것이다. 이 근본 사상이 우주론(宇宙論: 우주 만물에 대한 이론)으로 드러난 것이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이며 인성론(人性論: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대한 이론)으로 드러난 것이 성기설(性起說)이다. 법계연기설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는 겉으로 볼 때 개개의 존재들이 아무 상관없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존재의 실상은 서로 완전한 관계성 속에서 하나의 총체적 존재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므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 모든 현상이 각각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모습)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 속에 있다는 것을 주요 사상으로 삼는 것이 법계연기설의 우주론이다. 성기설에 따르면 우리 마음속에 그려진 존재의 모습들은 부처의 마음으로 볼 때 너와 나의 구분 없이 서로 하나로서 모순이 없는 한결같이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은 대상을 마주하며 그들로부터 좋고 나쁨, 귀하고 천함을 분별하지 않고 그들의 모습에 불성을 투영하여 인식하는 것이다.『화엄경』에서 부처의 지혜가 천지만물에 그 빛을 두루 비추고 있으며, 모든 존재가 불성의 현현(顯現)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현상계 밖에 완전하고 모순 없는 존재와 진리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진리의 세계이며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존재가 이미 부처인 것이다. 이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여래성연기(如來性緣起), 줄여서 성기(性起)인 것이다. 이것 또한 체와 용의 합일 즉 실체로서의 이상과 현상으로서의 현실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보는 체용일원의 논리인 것이다.
화엄종에서 체용은 위의 법계연기설과 성기설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 법장은 법계연기설을 체용 개념과 연관 지어 이렇게 설한다. “사(事)는 비록 완연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용이 바로 체가 된다. 이것은 마치 수백 개의 냇물이 모여 하나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리는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항상 저절로 연을 따른다. 그러므로 체가 바로 용이 된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를 들어서 수백 개의 냇물을 밝히는 것과 같다. 리와 사는 상호 융합되어 있으므로, 체와 용이 자재(自在)한다. 상입(相入)은 용이 차별적으로 열려지는 것이고, 상즉(相卽)은 체가 항상 일미를 유지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체이고, 항상 다르게 되는 것이 용이다.”14 이것은 현상은 수많은 상대성과 차별의 모습으로 인식되지만, 그것의 근거인 본체와의 합일로서 인식할 때 그들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지엄(智嚴, 600~668: 화엄종의 제2祖)과 법장(法藏, 643~712: 화엄종의 제 3祖)은 성기설에서 체용 개념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엄은 “여래는 여실한 도로 정각을 이룬다. 성(性)은 체이고, 일어난 것이 마음에 현재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일어난 상(相)을 만나 실(實)로 들어가는 것이다.”15라고 했다. 여기에서 성이 체라고 한 것은 인간이 대상을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는 근원적인 마음이 있지만 그것이 파편처럼 떨어져 나오는 과정에서 분별심이 생기고 그것이 현실 감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체와 용이 동시에 작용하여 즉 우리의 인식이 체로서의 성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분별심은 사라지고 만물 속에서 불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법장은 “바뀌지 않는 것(不改)을 성(性)이라고 하고, 용(用)을 나타내는 것을 기(起)라고 하고 래(來)라고 부른다. 즉 여래가 성기이다.”16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완전무결하며 불변하는 것은 성(性)인 체(體)이며, 이것이 드러나는 것이 기(起)이자 용(用)인데 성과 기 이 둘이 하나로 작용하여 완전한 일체를 이룰 때 여래(如來: 부처)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4) 선종17(禪宗)
선종의 특징은 학문적 이론보다는 참선과 수행을 지향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복잡한 교리적 논리를 거치는 수행보다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18이므로 스스로에게 내재한 본성을 찾는 데 수행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취지가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 혜능(慧能, 638~713: 중국선종의 제6祖)의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으로부터인데 체용의 개념은 여기에서 언급된다.
『육조대사법보단경』에서는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 근본을 삼는다. 어리석게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일체이고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체(體)이고, 혜는 정의 용(用)이다. 혜가 발휘되고 있을 때 정의 혜 속에 있고, 정에 들어 있을 때 혜는 정 속에 있다.”19라고 했다. 본 구절은 육조 혜능이 마음 수행의 원리를 설하는 부분으로 정(定: 마음을 집중하여 전혀 동요가 없는 상태)과 혜(慧: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인식 작용)의 일체성을 말한다. 이것을 체용에 대입하였는데, 혜능은 정을 체에 두고 혜를 용에 둔다. 정은 마음의 본체로서 용인 혜의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정의 발현이 곧 혜이며 혜의 가능성의 근원은 정인 것이다. 따라서 혜능은 이 둘은 나누어져 작용하는 각각의 대상이 아닌 일체로서 작용하는 한 몸이므로 이 둘의 작용이 완전한 조화와 운동성에 이르도록 하는 마음 수행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만약 심(心)의 요체를 알려면, 일체의 선악을 분별하여 사랑하지 말라. 그러면 자연히 청정한 심체(心體)로 들어가게 된다. 그 담연(淡然: 욕심 없이 깨끗함)한 심체는 항상 고요하지만, 그 묘용(妙用: 신묘한 작용)은 갠지즈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20라는 구절은 즉 체인 마음의 본체와 그 본체로부터 스펙트럼처럼 뻗어가는 마음의 작용인 용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심체의 고요란 용으로 작용할 내부의 모든 잠재적 가능성을 말한다. 그래서 심체 내부에서는 발현되기 전의 의식 상태이므로 선악의 분별이 없이 고요하다. 심체가 발현하게 되면 이것이 신묘한 작용으로 갠지즈강의 모래알처럼 다채로운 의식의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마음의 모든 현상은 결국 하나의 심체로부터 뻗어 나온 것이므로 심체라는 마음의 본체를 구하게 되면 마음의 근원자리를 찾는 것이고 그로써 인간은 마음의 실체를 자각하게 되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선종은 세계의 존재와 그 의미가 마음에서 비롯됨을 이야기하고 그 마음이 부처에 이르면 세계의 존재와 의미도 부처의 마음에 담겨져 부처의 세계가 된다고 본다. 그러한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심체와 묘용 그리고 정과 혜에 체와 용을 대입하여 마음의 원리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5) 법상종21(法相宗)
법상종은 현장이 중국에 전한 유식학을 그 제자들이 발전시켜 만든 종파로 체용을 활용하는 데 있어 체용일원이 아닌 체용별론의 방식을 적용한다.22 법상종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지혜에 이르는 무루종자(無漏種子: 번뇌가 없는 마음)23에는 절대적 선만 있으며 그 반면 유루종자(有漏種子: 번뇌가 있는 마음)에는 무기성(無記性: 선악의 구분이 없는 상태)과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의 삼성(三性)이라고 하는 선악의 상대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루종자와 유루종자 모두는 의식의 모든 잠재된 가능성을 내포한 아뢰야식24(阿賴耶識)의 일부이다. 무루종자는 의식의 완전한 단계로서 어떠한 분별과 상대성도 없는 부처의 경지이며 유루종자는 선악의 분별과 모호함이라는 상대성이 있는 상태로 일반 사람의 의식이다.
법상종에서 체용은 이러한 ‘아뢰야식과 종자’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과(果: 일어나는 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서 나타난다. “종자와 아뢰야식,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과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체용’과 인과 법칙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25에서 아뢰야식과 종자는 체에 해당하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과는 용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체인 ‘종자와 아뢰야식’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현상인 ‘과’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은 체와 용을 구분한다는 것에 가깝다.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체가 용의 근원의 속성을 가지며, 용은 그 근원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체용별론에서는 체와 용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상태를 유지하므로 같다고도 볼 수 없으며 체와 용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며 독립적으로 있으면서 서로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적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아뢰야식과 종자는 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가진 그대로 있고 용으로서의 과는 현상의 영역에서 갖가지 사건의 형태로 전개될 뿐이다. 그래서 법상종은 체용별론의 입장에서 체와 용이 서로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듯 ‘26아뢰야식과 종자’와 ‘과’는 서로 인과관계 없이 독자적인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체용별론의 논리에서는 체의 고유한 영역이 확보된다. 체와 용이 서로 매개되지 않으므로 본체는 본체 그대로의 위치와 지위를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3. 중국 유학의 체용
(1) 송대 유학(성리학의 체용)
불교는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번뇌가 발생한다고 하며 그 집착의 대상은 공(空)한 것이므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관념론(존재는 인간의 의식 속 관념이라고 보는 이론)적 특성에 반해 유학인 성리학은 실재론(존재는 인간의 관념 바깥에서 실재한다고 보는 이론)적 입장으로 불교와 같이 존재를 마음속의 공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의식 밖의 대상 세계가 실재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륜을 밝히려는 점이 불교와 다른 점이다. 하지만 본체와 현상, 즉 체와 용의 원리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데, 특히 중국불교의 체용일여(체용일원)의 원리와 동일하다. 정이(程頤)가 설한 우주의 근본으로서의 이(理)와 그 발로(發露)로서의 사상(事象), 장재(張載)의 태극(太極)과 기(氣), 주자(朱子)가 말하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갖추어진 성(性)과 그것이 외면(外面)에 나타난 정(情)이라는 개념 이 모두가 체용의 원리 하에 있다.27
성리학의 체용 개념은 정이(程頥, 1033~1107)가 그 뼈대를 잡았다. 그는 “깊이 숨어있는 것은 리(理)이고,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은 상(象)이다. 체와 용은 근원을 같이 하고,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은 간격이 없다.”28라고 하였으며 주자(朱熹, 1130~1200)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체용일원’이란 체가 비록 흔적이 없지만 그 안에 이미 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현미무간(顯微無間)’29이란 드러난 상 가운데 숨겨진 리가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다.”30 정이와 주자 모두 존재와 본체로서의 체와 그 드러난 모습으로서의 현상인 용이 한 몸으로 동시에 공존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본체는 존재의 모든 가능성으로서 어떠한 것으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이므로 구체적이지 않으며 아득한 것이다. 반면 용은 체의 드러난 구체적인 모습이므로 다양하며 명확한 색을 가진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특성을 가진 체와 용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체와 용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인 것이다.
나아가 주자는 이 체용의 원리를 인간의 마음에 적용하여 설명한다. “마음은 하나이지만, 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도 있고 용을 가리켜 말하는 것도 있다.”31
이것은 인간의 마음도 본체와 그 현상의 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본체로서의 체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아득한 것이며 그 현상은 그 가능성의 드러남이므로 구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는 체의 상태를 미발(未發)의 상태를 말하며 마음이 드러나 다양하며 구체적인 상태로 드러난 용의 상태를 이발(已發)의 상태라 말한다.
주자는 이것을 『중용』에 나오는 중(中)과 화(和)에 대입한다.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의 덕(性之德)’과 ‘도의 체(道之體)’를 형용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리(理)는 해당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한다. 화(和)라고 하는 것은 ‘정의 바름(情之正)’과 ‘도의 용(道之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과 사물이 함께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의 보편적 도라고 한다.”32 이처럼 주자는 중과 화를 체와 용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본성과 도 그리고 천하의 근본으로서의 리를 체의 위치에 두고 그것이 곧 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 바름’을 용의 위치에 두고 그것을 화라고 한다. 중은 가운데 있어 치우침이 없으므로 균형이며 창조를 일구어내는 영원한 순환이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모습이며 우주 만물에 깃든 도의 본성인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현상화한 것이 바로 ‘정의 바름’이라는 이미지의 화(和)인 것이다. 그래서 중화는 ‘우주만물의 조화로운 본성’인 체와 ‘그 조화로운 본성의 완전한 발현’인 용을 이르는 말이다.
(2) 명대 유학(양명학의 체용)
주자학과 양명학은 인의예지라는 유학적 이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유학이지만 그들의 논리적 방식은 극명한 대립을 보인다. 주자학에서는 인간에게 본체가 부여되어 있지만 기(氣)에 가려 드러나 있지 않으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앎을 넓히는 것)를 통해 그 본체를 밝혀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반면 양명학에서는 마음이 곧 리(理)이므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의 과정 없이 마음의 내부에서 그 본체인 성(性)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보편적 이치로서의 리(理)인 성(性)과 기(氣)의 특성을 가진 인간의 심(心)을 구분하여 성즉리(性卽理)라고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심즉리(心卽理)라고 하여 심과 성을 동일하게 본다. 주자학에서는 심이 기의 특성을 가져 인간에게 정욕(情慾)이 생긴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되지만 양명학에서는 심이 곧 리이자 성이므로 심으로부터 발동하는 정욕(情慾)도 긍정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양명학이 심을 성으로 오인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양명학에서는 주자학이 심과 성을 분리했다고 비판한다.33
왕양명(王守人, 1472~1528)은 이러한 근본 입장을 체와 용으로써 설명한다. “마음은 정(靜)과 동(動)을 체(體)와 용(用)으로 삼을 수 없다. 동과 정은 시간적 차이이다. 그러나 체에 나아가 말하면, 용은 체에 있다. 용에 나아가 말하면, 체는 용에 있다. 이것이 ‘체용일원’이라는 것이다.”34 체와 용의 일원(一元)적 특성인 체용의 동시적 작용에 대한 이 말은 주자학의 ‘심통성정(心統性情: 성은 마음의 체요, 정은 마음의 용이요, 마음은 이발과 미발의 총명(總名)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성정을 총괄한다.)’설에 대한 비판이다. 양명학의 입장에서 주자의 심통성정설은 마음이 정적인 특성의 성(性: 體)과 동적인 특성의 정(情: 用)을 통합하여 인식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체와 용의 동시성을 무시하고 시간적 차이로 나누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미 성과 정은 체용일원으로서 동시적이므로 심이 나누어진 성과 정을 합일하여 인식한다는 것은 양명학의 입장에서는 주자학이 체용일원의 논리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이다.
양명학은 체가 바로 용이라는 논리로 심(心)·성(性)·정(情)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러한 총체적 앎을 일컫는 양지(良知: 하늘의 이치와 통하는 마음의 본체)를 주장한다. “미발(未發)의 중(中)이 곧 양지(良知)이다. 앞과 뒤, 안과 밖의 구별이 없이 혼연히 일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일의 있음과 없음은 동과 정으로 나눌 수 있지만, 양지는 적연(寂然: 아득하고 고요한 마음 본체의 특성)과 감통(感通: 느낌과 생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현상적 특성)으로 나눌 수 없다. 동과 정은 마음이 현상적으로 외물과 만나는 때이다. 마음의 본체는 동과 정으로 구분되지 않는다.”35 이처럼 양명학은 마음 본체의 앎인 양지를 설명하며 앞과 뒤, 안과 밖 그리고 미발과 이발의 동시성으로써 체용의 일원적 작용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3) 중국 근대유학의 체용
중국 근대유학에서 체용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등장한다. 청 말 외국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이 양무(洋務)운동을 주도했는데, 이 양무운동의 기본 이념이 바로 중체서용론이다. 그 내용은 “전통 사상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정신 문명을 근본(체)으로 하고,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서양 물질 문명을 응용(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중체서용론은 서양의 과학 기술 연구를 권하면서 자유민권론(民權論)의 수용은 반대하는데, 이것은 강유위(康有爲 , 1858~1927) 등의 개혁운동에 대항하여 청왕조의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데 목적이 있다.
중체서용론에 있어 체용의 원리는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음과 용에 대한 체의 우월성이다. 이것은 장지동(張之洞, 1837~1909: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학자)이 『권학편』에서 “중학은 내면적 공부이고, 서학은 외면적 공부이다. 중학은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고, 서학은 세상일을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발상은 중학과 서학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켜, 중학은 심신 수련으로, 서학은 기술로만 여기게 했다.
장지동의 중체서용론은 사실상 체용을 존재론적 원리에 입각해 적용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체용의 명칭만 붙인 것이다. 엄복(嚴復, 1854~1921: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번역가·학자)는 이를 “체와 용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소의 몸뚱이(體)가 있으면 무거운 것을 지는 용도(用)가 있고, 말의 몸뚱이가 있으면 멀리까지 가는 용도(用)가 있다. 소로 본체를 삼고 말로 용을 삼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는 말로 비판했다.36
(4) 현대 신유학의 체용론
웅십력(熊十力, 1885~1968: 현대 신유학의 제 1세대)은 체용론을 다루는 본체론을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영역으로 여겼다. 그는 서양 철학의 본체와 현상 개념이 동양 철학의 체와 용에 해당한다고 하며, 그것이 유식 불교에서는 법상(法相: 천지만물의 모양), 법성(法性: 우주 만물의 본체)으로, 유학에서는 형이상(形而上: 초경험적이며 근원적인 영역)과 형이하(形而下: 형체가 있는 물질의 영역)37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래서 웅십력은 체용의 원리가 동서양철학 모두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자 주제라고 역설(力說)했다.38
웅십력의 체용론은 체용불이의 입장에 있으며 본체는 도라고도 부르고 현상은 물질과 우주를 가리키므로, 도(道)와 기(氣)가 둘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 둘이 아니므로, 참 자아와 우주 본체는 결국 하나가 된다. 이것은 커다란 바닷물과 그 바다의 파도가 둘이 아닌 것으로 비유되며 본체는 두 방향으로 흘러 나타나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둘이 되었으니 그 둘은 하나인 것이다.
그는 또한 본체라는 근원에서 볼 때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욕망도 하나이며 본체가 작용하여 생기는 변화는 움직임 속에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 움직임을 담고 있으므로 움직임과 고요함도 결국 하나라고 한다. 또한 본체에 대한 앎과 본체로부터 파생된 현상에 대한 앎도 하나이며 자신과 타인의 삶도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인 것이 된다.
III. ‘신앙의 대상’에 대한 체용(體用)적 이해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은 최고신의 존칭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에 대한 설명이다. 그 설명을 볼 때 우주만물의 본체인 최고신과 그 주재 하에 있는 우주만물의 관계는 체용의 원리로써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본 체용에 대한 이해를 참고로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다루었던 중국불교와 중국유학의 체용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서 공통된 개념만 추상(抽象)39해보면 체는 용으로서의 모든 존재에 대해 본체이며 총체이다. 본체란 모든 존재가 비롯되어 나온 근본 자리이며 그 근본 속에서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총합되기 때문이다. 체는 용에 대해 존재의 최고 위치에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지칭할 수 있다. 체가 가진 본체의 속성을 볼 때 체는 존재의 모든 가능성이 되며 현상 가운데 발현되는 존재의 시작과 끝 모두를 이미 자신 내부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는 용에 대해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주재자라는 의미가 생겨난다. 또한 체는 근원으로서 그로부터 생겨난 존재의 합일점이 되어 여러 갈래로 분화된 존재간의 통합과 조화의 축이기도 하다. 존재가 구심점을 잃으면 존재의 근원을 잃는다는 것과 같으며 근원을 잃은 존재들은 서로를 하나로 연결해줄 축이 없으므로 서로 대립하게 되며 존재가 나아가야할 방향성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체로서의 본체는 만물의 상생과 조화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다. 이상의 정리된 논의로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구천(九天)이라 함은 『전경(典經)』에 “…모든 신성(神聖)·불(佛)·보살(菩薩)들이 회집(會集)하여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교운 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우주(宇宙)를 총할(總轄)하시는 가장 높은 위(位)에 계신 천존(天尊)께 하소연 하였다는 말이니 그 구천(九天)은 바로 상제(上帝)께서 삼계(三界)를 통찰(統察)하사 건곤(乾坤)을 조리(調理)하고 운화(運化)를 조련(調鍊)하시고 계시는 가장 높은 위(位)임을 뜻함이며, 응원(應元)이라 함은 모든 천체(天體)뿐만 아니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천명(天命)에 응(應)하지 않고 생성(生成)됨이 없음을 뜻함이며, 뇌성(雷聲)이라 함은 천령(天令)이며 인성(仁聲)인 것이다. 뇌(雷)는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으로써 성뢰(成雷)된다. 뇌(雷)는 성(聲)의 체(體)요, 성(聲)은 뇌(雷)의 용(用)으로서 천지를 나누고 동정진퇴(動靜進退)의 변화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승강(昇降)케 하며 만물(萬物)을 생장(生長)하게 하고 생성변화(生成變化) 지배자양(支配滋養)함을 뜻함이며, 보화(普化)라 함은 우주(宇宙)의 만유(萬有)가 유형(有形) 무형(無形)으로 화성(化成)됨이 천존(天尊)의 덕화(德化)임을 뜻함이며, 천존(天尊)이라 함은 군생만물(群生萬物)을 뇌성(雷聲)으로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지대지성(至大至聖)한 삼계(三界)의 지존(至尊)임을 뜻함이며, 강성상제(姜聖上帝)라 함은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主宰) 관령(管領)하시며 관감만천(觀鑑萬天)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의 존칭(尊稱)임을 뜻함이다.40
먼저, ‘…모든 신성(神聖)·불(佛)·보살(菩薩)들이 회집(會集)하여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교운 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우주(宇宙)를 총할(總轄)하시는 가장 높은 위(位)에 계신 천존(天尊)께 하소연 하였다는 말이니 그 구천(九天)은 바로 상제(上帝)께서 삼계(三界)를 통찰(統察)하사 건곤(乾坤)을 조리(調理)하고 운화(運化)를 조련(調鍊)하시고 계시는 가장 높은 위(位)임을 뜻함이며’의 이 부분은 우주 만물의 본체인 최고신41으로서 존재하시는 구천상제님의 위치에 대한 구절이다. ‘우주를 총할하시는 가장 높은 위(位)’라는 말은 현상계의 공간적 거리가 아닌 현상계와는 다른 차원에 계심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상제님과 군생만물(群生萬物)의 위치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두 차원 사이에는 절대적인 위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구천은 천상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인데, 바로 그 곳에서 구천상제님은 본체로서 우주를 주재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그 아래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곧 그 분의 존재가 본체로서의 체이며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주재 아래에 있는 용인 것이다. 이것은 비록 체와 용이 한 몸이지만 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위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본체이신 상제님으로부터 용으로서의 군생만물이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상제님과 군생만물이 동격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 고유한 위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본 구절에서는 그러한 상제님과 만물 사이의 위계가 명확히 밝혀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천상제님과 만물은 그 위계에 의해 불이일원이 아닌 불일불이42의 관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부분은 ‘응원(應元)이라 함은 모든 천체(天體)뿐만 아니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천명(天命)에 응(應)하지 않고 생성(生成)됨이 없음을 뜻함이며’인데, 이 부분은 우주 만물의 본체로서의 구천상제님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본체란 모든 현상이 비롯되는 곳이다. 시간과 공간의 전개, 물리적 현상의 발현, 역사의 흐름 등 모든 자연계와 인간계는 이미 본체로서의 구천상제님의 작용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말이다. 체를 잊고 단지 물리적인 자연 현상 또는 인간만의 역사로서 세계사를 바라보면 그것은 근원이라는 중심을 잃고 해체되어 인류의 역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뇌성(雷聲)이라 함은 천령(天令)이며 인성(仁聲)인 것이다. 뇌(雷)는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으로써 성뢰(成雷)된다. 뇌(雷)는 성(聲)의 체(體)요, 성(聲)은 뇌(雷)의 용(用)으로서 천지를 나누고 동정진퇴(動靜進退)의 변화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승강(昇降)케 하며 만물(萬物)을 생장(生長)하게 하고 생성변화(生成變化) 지배자양(支配滋養)함을 뜻함이며’의 이 부분은 구천상제님의 존칭 가운데 뇌성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체와 용이 직접 언급되는 부분이자 체용개념이 물리적인 자연에 적용된 경우이다.43 뇌는 번개이며 성은 천둥소리인데, 번개는 천둥소리라는 현상이 비롯되는 실체이며 천둥소리는 번개라는 실체가 소리라는 현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그러한 뇌의 작용으로 천지자연은 다양한 모습으로의 변화와 그 생명력을 얻고 천지자연은 다양한 색채로 현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물리적 자연현상과 생명의 지속이 뇌성에 의한 것이며 이 뇌성을 다스리시는 분이 구천상제님이심을 밝히는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보화(普化)라 함은 우주(宇宙)의 만유(萬有)가 유형(有形) 무형(無形)으로 화성(化成)됨이 천존(天尊)의 덕화(德化)임을 뜻함이며, 천존(天尊)이라 함은 군생만물(群生萬物)을 뇌성(雷聲)으로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지대지성(至大至聖)한 삼계(三界)의 지존(至尊)임을 뜻함이며’에서도 우주 만물의 본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과 위치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우주의 만유가 천존의 덕화에 의해 화성된다.’는 것은 구천상제님의 덕이 모든 존재에 미치고 있다는 것으로 본체가 현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영향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삼계의 지존’은 구천상제님께서 존재의 가장 근원자리에 위치하고 계심을 드러낸 말로 시공을 초월한 본체의 존재방식을 표현한 말이다.
끝으로 ‘강성상제(姜聖上帝)라 함은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主宰) 관령(管領)하시며 관감만천(觀鑑萬天)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의 존칭(尊稱)임을 뜻함이다.’에서도 또한 우주 만물의 본체에 위치한 하느님에 대한 속성에 대한 설명인데 좀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절 가운데 ‘강성상제’는 인세에 강세하신 하느님을 일컫는다. 그것은 곧 하느님이 구천이라는 본체계와 인세라는 현상계에 동시에 존재하시면서 지존(至尊)으로서의 위계도 가지신다는 뜻이다. 앞선 부분에서는 상제님과 만물이 존재하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 체와 용은 각기 분리된 것이지만 강성상제로 인세에 강세하시어 천지공사를 펴심은 곧 체와 용을 합일케 하신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본체로서의 최고신이신 상제님께서 현상계에 내려오심으로 해서 천상과 지상의 합일인 지상천국, 인간과 신의 조화인 신인합일과 같은 후천개벽의 세계와 인간완성을 향한 큰 길을 열어 놓으신 전우주적인 사건을 알리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대순사상은 성리학의 이기론과 같은 본체론의 개념을 어느 정도는 수용하지만 그것을 개념적인 데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천상제님은 본체론적 개념으로서는 무극과 태극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우주의 절대자를 설명하는 표현방법이며 대순사상만의 종교적 철학적 의도를 모두 담지는 못한다. 대순사상에서 본체의 명칭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는 우주적 근원이자 이치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나아가 본체인 최고신으로서 우주 변화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4 또한 체용일원과 체용별론의 논리에 있어서도 대순사상은 그 양자 모두를 포괄한다. 체인 최고신과 만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위계가 있다는 점에서 체용별론이며 최고신이 친히 인세에 강세하시면서 현상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펼치심으로써 만물과 먼 하늘에서 간접적으로 소통하신 것이 아닌 직접 소통하신 점에서 체용일원이라 할 수 있다. 체의 위치에 최고신이 위치하는 것과 체용일원과 체용별론의 논리가 동시에 적용된다는 이 두 관점이 체용의 원리가 적용된 양상에 있어 대순사상과 다른 사상과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IV. 결론
이상으로 체용의 원리를 통해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을 이해해보았다. 앞선 논의를 정리하자면, 체용은 존재의 본체와 그 본체의 작용 혹은 드러남의 원리에 대한 개념이다. 중국불교와 중국유학은 이러한 체용의 원리를 근간으로 인간의 마음과 우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우주의 본체와 현상 그리고 마음의 본체와 드러남의 원리에 대한 기본적 개념이 각기 표현방식과 논리의 차이를 두고 다양한 학설로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불교와 중국유학이 여러 갈래로 분파되었지만 체용의 기본 원리는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각 사상들을 통해 정리한 체용의 원리를 『대순진리회요람』의 ‘신앙의 대상’에 적용해 보았다. 구천상제님과 그 주재 아래 놓인 군생만물의 관계 그리고 구천상제님의 위치와 권능 그리고 만물의 조화와 상생에 대해서 체용의 원리를 적용해 보는 가운데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한 가지 특수한 점이 있다면, 대순사상에서 체용은 체용별론과 체용일원의 논리 모두가 나타나므로 하늘의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구천상제님의 위치는 체용별론에서 설명되며 그와 함께 인세에 강세하신 상제님은 본체와 현상의 합일인 체용일원으로 설명된다는 점이다. 구천상제님의 초월성은 시공간의 모든 차원 즉 삼계의 지존으로서 전 영역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시므로 절대자로서의 위계와 현상계에서의 인격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인세에 강세하신 구천상제님의 위계는 그대로 보존된 상태의 인격이므로 체용일원의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군생만물과 동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체용의 원리는 동서양의 사상사 전반에서 개념의 명칭은 달랐지만, 그 원리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다루어져 올 만큼 거대하고 심오하다. 그 원리의 핵심만 정리하면 간단하지만 체용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리이므로 그것이 적용되어 표현되는 양상은 복잡하며 풍부하다. 그래서 짧고 명료한 학술적 정의는 있겠지만 그 정의는 체용을 이해하는 데 최소한의 도움이 될 뿐이며 끊임없는 사유와 수행의 깊이에 의한 깨달음으로 진정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
체와 용의 원리를 통해서 무엇보다 우리 수도인들은 ‘상생과 조화’의 이치를 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 우주 만물의 본체이신 상제님 아래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 아래 놓이게 된다. 그 근원 아래에서 인류와 만물은 서로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진다. 체용의 원리를 일상 속에 적용해서 상제님이라는 동일한 근원 하에 서로가 함께 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타인과 이웃 그리고 만물을 대하는 마음과 행동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실재하시는 상제님의 존재, 만물의 본체이신 상제님을 모르고 서로가 하나로 상생할 구심점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인세의 역사 가운데 강세하신 구천상제님이라는 본체를 인식의 중심에 두고 존재하는 모든 인류와 만물을 바라보면 우리는 서로 같은 근원 속에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현상계는 늘 모든 것이 나누어져 너와 나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본체이신 구천상제님을 축으로 연결된 군생만물은 하나의 유기적 몸체가 된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 원리인 체용의 개념이 최고신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수도인에게 줄 수 있는 유용한 정신적 가치가 될 것이다.
수행이 결여된 지식은 의식의 표면을 겉도는 문자이며 자각의 모호함일 뿐이다. 한 편의 글이 깨달음의 계기는 될 수는 있지만 깨달음을 그대로 가져다 줄 수는 없는 이치이다. 더군다나 이 글에서 다룬 체용은, 수도인이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상제님께 다가서듯 일상의 수행과 끝임 없는 사유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본래의 뜻에 가까워지기 힘든 깊고 큰 원리이다. 그래서 본 글이 작으나마 사유의 욕구를 자극하고 수행의 열정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순진리의 진법이 중심이 되고 그 수행이 정성스러워진다면 체로서의 구천상제님과 용으로서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어우러진 상생의 감동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할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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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왕필의『도덕경주(道德經注)』삼십팔장(三十八章)에 “만물은 귀하다고 하지만 무(無)를 용(用)으로 삼고 있으므로, 무를 버리고서 체(體)가 될 수는 없다. 무를 떠나 체가 되면 그 위대함을 잃게 된다.”에서 체와 용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볼 수 있다.
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03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04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8.20.
05 인도의 고승 용수(龍樹)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 삼론을 주요 경전으로 삼아 성립된 종파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때 이 종파가 성립되었으며, 특히 고구려의 승랑(僧朗)은 중국에서 삼론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삼론종의 성립에 원동력이 되었다.
06 진제와 속제를 가리키는 말로 제(諦)는 변치 않는 진리인데, 진제는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된 진리, 분별이 끊어진 후에 확연히 드러나는 진리, 직관으로 체득한 진리를 말하며 속제란 분별과 차별로써 인식한 진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인식 작용으로 알게 된 진리. 대상을 분별하여 언어로 표현한 진리. 세속의 일반적인 진리, 세속에서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진리, 세속의 중생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한다.
07 길장(吉藏), 『이체의(二諦義)』권하(卷下), 대정장(大正藏), 45, 108a.
08 수(隋)나라의 고승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가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독특한 교관(敎觀)을 체계화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지자대사가 천태산에 머물면서 이 교학을 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9)
09 중생의 일념 속에 모든 세계인 삼천제법(三千諸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일념삼천설이다. 이 설을 주장하게 된 까닭은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제법실상을 관찰하고자 할 때 체계적으로 삼천제법의 실상을 관하게 하기 위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다. 즉, 중생심을 통하여 일체의 여시(如是)한 실상을 관찰하게 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을 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일심(一心)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세 가지 측면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인 공가중(空假中) 삼관에서 관찰하는 관법(觀法).
공관은 삼라만상이 모두 공무(空無)하므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으로, 견사(見思)의 혹(惑)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견사의 혹이란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三世)의 도리에 미혹되어 있는 견혹(見惑)과 사상(事象)에 미혹되어 있는 사혹(思惑)을 합한 것으로서, 이 두 가지가 중생 세계의 생사(生死)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가관은 삼라만상의 어느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하게 있는 것을 관하는 것으로, 진사(塵沙)의 혹(惑)을 끊게 된다. 진사의 혹이란 티끌과 같이 많은 무지(無知)를 뜻하는 것으로, 공관에 의하여 공(空)의 이치에 집착한 채 삼라만상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인 모습을 꿰뚫어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공관을 통하여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양상을 관찰하고 보살의 자비를 키워가는 것이다.
중관은 모든 법이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공이면서 유요, 유이면서 공임을 관하는 중도적 입장의 관법으로서, 이 관법에 의하여 무명(無明)의 혹을 끊게 된다. 무명의 혹은 모든 것이 일법계(一法界)임을 알지 못하는 미세한 번뇌이며, 이 번뇌를 끊게 되면 해탈을 할 수 있게 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도 하는 대승불교의 열반의 네 가지 덕. 열반의 세계는 절대 영원하고 즐겁고 자재(自在: 속박이나 장애가 없음)한 참된 자아가 확립되어 있으며 청정함을 이른다.
12 담연(曇延), 『십불이문(十不二門)』, 대정장(大正藏), 46, 703c.
13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로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화엄이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이다.
17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좌선을 통해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불교의 종파로 6세기 초 인도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가 전했다.’(곽철환, 『시공불교사전』, 시공사, 2003.)
18 사람은 번뇌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러워지나 본성은 불성(佛性)이어서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나 마찬가지임을 이르는 말. ≒시심시불ㆍ즉심시불.(『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19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48, 352c.
20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48, 360a.
21 유식종(唯識宗) 또는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하는 법상종은 현장(玄奘, 602~664: 중국 당나라)이 번역한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성유식론(成唯識論)을 토대로 호법(護法, 530~561:인도 대승불교의 승려)의 유식학(마음의 본체로부터 기인하는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계승하여 정립한 학파이다. 현상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석하여 밝히고, 모든 현상은 마음이 지어낸 번뇌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현상은 마음에 내재(內在)한다고 했다.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8.20.)
22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23 유식학파에서는 모든 존재 현상을 낳는 원인의 씨앗을 종자라 하는데, 식물의 종자를 외종자(外種子)라고 하는 데 반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의 종자를 내종자(內種子)라고 한다. 이 내종자란 원인을 통한 결과의 작용을 이르는 말로 일종의 관습처럼 아뢰야식 가운데 훈습되는 것이다. 또한 종자에는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본유종자(本有種子)가 있으며, 후천적으로 경험하고 축적한 신훈종자(新熏種子)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자에는 유루(有漏: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의 여러 현상을 일으키는 유루종자, 보리(菩提: 부처의 지혜)에 이르게 되는 무루(無漏: 번뇌에서 벗어남)종자의 두 가지가 있다.(『두산백과사전』)
24 불교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앞의 다섯 가지를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식(識)을 제6 의식이라고 한다. 전5식은 자체로서 판단·유추·비판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나’라는 주관이 외부의 객관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일 따름이다. 전5식은 제6 의식에 의하여 통괄되며, 자신이 수집한 갖가지의 정보를 이 제6 의식에 보고하는 기능을 가졌다. 제6 의식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은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가 제6 의식, 둘째가 제7 마나스식(Manas識), 셋째가 제8 아뢰야식이다. 현대 심리학에서의 구분방법에 따르면 제6식은 의식의 세계이며, 제7식과 제8식은 무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다. 제7식은 6식과 8식을 매개하는 작용을 하며 제8식은 가장 근원적인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보았다. 아뢰야식이라는 무의식의 바다는 모든 종자(種子)를 갖춘 가능성의 바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5 『성유식론(成唯識論)』 권(卷) 2, 대정장(大正藏), 31, 008a.
26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卷 21 제이지십삼(雜蘊第一中智納息第二之十三), 대정장27, 105b. “모든 인(因)은 작용을 결과로 삼는 것이지, 실체를 결과(果)로 삼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또 모든 결과는 작용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지, 실체를 원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법의 실체가 항상 전변(轉變: 변화)이 없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27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28 『이정집(二程集)』 「역전서(易傳序)」.
29 나타나 있는 것과 희미한 것 사이에는 구별이 없음. 현상계(現象界)와 본체계(本體界) 사이에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이른다.(『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30 『주자어류(朱子語類)』 권(卷)67.
31 『근사록(近思錄)』 「제일 도체(第一道體)」.
32 『중용혹문(中庸或問)』 「(혹문희노애락(或問喜怒哀樂)」.
33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34 『전습록(傳習錄)』 卷 1.
35 『왕양명전집(王陽明全集)』 「어록(語錄)」 2, 「답육원정서(答陸原靜書)」.
36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37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38 김제란, 「중국철학에서의 ‘체용(體用)’ 개념의 변천 과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6. 참조
39 여러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을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40 『대순진리회요람』, P.6.
4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대순진리회와 감천 태극도장의 사상 비교」, 『대순회보(109호)』, “이에 비해 대순사상은 우주의 본체를 최고신으로 놓고, 즉 무극을 ‘무극신(無極神)’으로 규정하고 그 무극신의 조화(造化)로써 우주를 설명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극신 외에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 ‘구천대원조화주신’ 등 대순사상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우주의 절대자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다.”
42 본문 102페이지 참조.
43 체용은 어떤 대상의 고유한 이름이 아닌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원리를 담은 개념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그 적용 대상에 따라 활용의 규모는 달라진다. 체용이 우주만물과 그것의 본체에 대한 경우에는 체가 구천상제님에 대응하며 용이 우주만물에 대응하지만, 이러한 물리적인 자연에 적용하면 자연 현상의 물리적 원인과 그것의 현상이라는 것에 대응한다. 좀 더 축소해서 체용개념을 나 자신에 적용하면, 나 자신이라는 본체가 학교에서는 학생이며,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자녀이며,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것이다. 용으로서의 각기 다른 의미가 결국 나 자신이라는 본체에 합일되는 것이다.
44 대순종교문화연구소,「대순진리회와 감천 태극도장의 사상 비교」, 『대순회보(109호)』, “이상과 같이 대순사상은 이기론과 같은 철학적 차원을 넘어서 종교적 차원 즉 신의 권능을 통해서 우주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극ㆍ태극을 본질로 하는 최고신이 생장염장이라는 우주의 법칙을 주관하며, 음양의 결합인 뇌성으로써 오행과 만물을 생성ㆍ변화ㆍ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