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의 대기가 뺨에 와 닿는다. 여기 저기 서서히 시작되는 계절의 변화는 나지막하지만 선연하게 가을을 우리에게 알린다. 나무 잎사귀도 머지않아 그 빛깔 곱게 물들어 갈 테고 하늘은 고색창연한 얼굴에 높고도 깊게 구름을 머금을 테다. 가을은 분명 숙성의 계절이고 결실의 계절이다. 이렇게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 삶의 신비로운 이치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안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지금의 우리는 마치 눈뜬장님 마냥 삶의 본질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대로 잘 산다는 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고 환한 햇살이 반짝이기도 하는 일상들이 늘 반복되는 만큼 순간순간의 시간이 내겐 더욱더 소중해지고 절실해진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하는 진실이 목말라하는 답을 도문에 입도하면서 찾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수도 생활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은 미로와도 같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마치 판타지 영화 속에 마법에 걸린 작은 주인공 여자아이와도 같이 어서 빨리 이 신비롭지만 쉽지 않은 모험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법을 풀어내기 위해 주인공은 많은 고난에 부딪히지만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듯이 나도 과연 이런 행운을 맞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전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구절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그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내 가슴속 깊은 내면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 최풍헌과 류훈장의 이야기인데, 입도하기 전에도 알고 있던 낯익은 내용이었다. 처음에 입도하고 나서 가장 먼저 선각에게 들은 이야기였고, 숱하게 『전경』을 접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구절이었기에 그리 눈여겨보지 않던 부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수도를 해나가면서 반복해서 읽히는 류훈장의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알고 있던 그 류훈장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류훈장이란 사람이 최풍헌이란 이인을 따라 목숨을 부지하기까지의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했던 내용에서 류훈장의 마음이 보이게 된 것이다. 류훈장이 최풍헌을 믿고 따라가는 와중에 가졌던 복잡한 심경은 마치 수도를 하다 보며 겁액을 풀어내느라 전전긍긍하며 고뇌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는 듯하다. 나 자신 또한 수도생활에서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던 막막함을 맛보았던 적이 있었으며, 지금도 한계의 마디는 늘 곁을 맴도는 화두가 된다. 상제님께서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고 하신 말씀을 류훈장이란 인물의 사람됨을 통해 마음 깊이 인식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뇌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을 게을리 먹지 않았기에 류훈장은 쉽지 않은 의혹과 불신을 떨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끝까지 믿는 마음을 간직하며 진실을 지켜낸 류훈장은 어쩌면 최풍헌이란 인물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류훈장이 믿은 건 최풍헌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흔들리지 않고 바른 의지로 지키고 믿어 얻어낸 것은 본인이 만들어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세상은 천지가 성공하는 때를 맞이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고 한다. 그 어려움을 잘 헤치고 나아가 천지가 필요로 할 때 쓰이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떤 각오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류훈장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최풍헌이 주는 시험을 끝까지 통과해 낼 수 있는 고귀하고 참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의 세계는 결코 남에게 보여줄 수 없다. 남이 모르는 공부인 것이다. 류훈장이 담담히 짊어졌을 마음고생들이 『전경』을 통해 내 마음에 투영되면서 마음 한구석이 환히 밝아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장애에 부딪혀 수도가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류훈장과도 같이 힘겹지만 진실 된 참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잘하고 있으니 힘내라고 자신에게 뜨거운 격려를 던져주자. 여러 가지 실타래가 엉킨듯한 내 모습들이 더 이상 문제로만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서 단순해 보이던 이 이야기가 이처럼 깊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상식의 세계를 초월할 때 비로소 깨달아진다. 뜻한 바를 이루어 낼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던 류훈장의 남모를 진심이 깊어 가는듯한 이 가을, 새삼 나에게 전해져 오는 건 그만큼의 값진 시간과 수고가 열매로 보답 되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인내의 기다림을 잘 견디어내고 매 순간 진실의 열매를 낳으려는 성실한 노력 속에 나의 수도도 이제는 맑고 밝게 꽃이 피고 더한층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먼저 나의 마음을 참답게 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참되게 하고, 먼저 내 몸을 공경함으로써 남의 몸을 공경하게 되며, 먼저 나의 일을 신의로써 하면 남들이 신의를 본받게 된다.”라는 구절이 잘 어울리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