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와 종도들은 정우면 와룡리(淨雨面 臥龍里)에서 포박되어 상제를 선두로 하여 덕천면 용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돝 한 마리를 잡게 하고 종도들이나 순검들과 함께 잡수시고 고부로 행하셨도다. (행록 3장 56절)
상제님께서 신경수의 집에서 의병의 혐의를 받고 순검과 함께 고부로 가시는 길에 잠시 쉬셨던 곳이 용두(龍頭)마을이다. 정미(1907)년 섣달(음력 12월) 상제님께서는 고부군 벌미면 와룡리(古阜郡 伐米面 臥龍里)01에 계시면서 문공신과 신경수의 두 집을 왕래하셨다. 어느 날 문공신의 집에서 종도들로 하여금 담뱃대를 메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여 전쟁공사를 보셨다. 또한 형렬에게 “문공신의 집에 있으면서 관리가 찾아와 거처를 묻거든 실토하라.” 명하시고, 신경수의 집에 가셔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를 행하셨다.02
이러한 공사의 내용이 와룡리 마을에 퍼지자 이상하게 여긴 면장과 이장은 상제님께서 계신 신경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때마침 상제님께서 들어오는 이들을 보시고 “천지공사로 천하를 바로 잡으려는데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느냐.”고 하셨다. 이것을 듣고 놀란 면장은 관부에 고발하였다. 섣달 25일 밤, 문공신의 집에 무장한 순검들이 들이닥쳐 상제님의 거처를 물어 알아내고 신경수의 집으로 향하였다. 형렬에게 명하신 상제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상제님과 종도들은 이렇게 순검들에게 포박되었다.03 1907년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때였다. 당시 무력항쟁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의병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한 지역의 촌락들을 불태워 그 마을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행록 3장 55절 참조) 이렇게 어수선한 시기에 공사를 행하시던 상제님과 그 공사에 참여한 종도들은 의병이란 혐의로 순검들에게 포박당한 것이다. 상제님과 종도들은 고부 경무청(현재 고부초등학교 있는 자리)으로 가게 되었다. 와룡리에서 경무청으로 이송되는 길에 상제님께서는 지금의 정읍천(井邑川)을 건너 용두마을에 이르셨다. 그곳에 잠시 머무르시며 돝[돼지] 한 마리를 잡게 하여 종도들, 순검들과 잡수셨다. 그 후 고부에 도달한 상제님과 종도들은 경무청에서 혹독한 고문[고부화액]을 당하게 된다.(행록 3장 56절 참조)
상제님의 발자취가 있는 용두마을로
여주에서 출발하여 정읍시 덕천면 덕천사거리를 거처 용두마을에 이르기까지 세 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 내내 상제님의 행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찾아간다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덕천사거리에서 동쪽(701번 지방도로 정우·태인)방향으로 가면 용두마을을 만날 수 있다.
▲ 산우마을과 용두마을
용두마을이 속한 달천리는 본래 고부군 달천면(古阜君 達川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군 덕천면에 편입되었다.04달천리의 ‘달천(達川)’은 ‘다내’의 한자 표기이며 ‘다’ 자에는 ‘많다’는 의미가 있다. 용두마을 앞 넓은 논 가까이에 물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때문에 옛 고부군 시절에는 살기 좋은 세 마을이 있었다. 첫째 피내(정읍시 북면 남산리 이문마을), 둘째 다내(덕천면 달천리), 셋째 수금(정우면 수금리)이라 하여 다내가 두 번째로 잘 사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용두, 산우 마을 주민은 일이 있어 다른 마을로 갔을 때에 그곳 사람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 오면 용두나 산우가 아니라 “다내에서 왔다.”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고 한다.05다내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달천리에는 용곡, 제야, 산우, 용두 마을이 있으며, 이 마을 중 고부로 가시던 상제님께서 잠시 쉬신 곳이 용두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뒷산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라 불렸다.06 이 마을은 이웃 마을과는 달리 ‘양반촌’이라 주막이 없었고, 주막은 정읍천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달천리와 관련된 상제님의 일화가 있다. 오동팔이 운영하던 객망리 앞 달천리의 주막에서 몇 달 동안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그동안 종도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오동팔은 돈을 모으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상제님께서 비용이 떨어진 것을 알고 배척하는 무례한 행동을 범했다.07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신 오동팔의 주막집은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번화가로서 달천리의 중심마을인 산우마을08로 추정된다.
▲ 용두마을과 기름들 (출처: 다음지도)
상제님께서 지나가신 정읍천
용두마을에서 바라보는 넓은 평야가 기름들이다. 이곳은 덕천면 달천리, 우덕리, 정우면 대산리 등 세 개 리(里)가 합쳐 이루어졌다. 기름들을 가로질러 정읍천이 있는데, 옛날에는 들앞[기름들]이 바다여서 용두마을 앞까지 배가 내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09 비슷한 이야기를 용두마을과 이웃하는 산우마을 주민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정읍천이 옛날에는 제방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장마철이면 용두, 산우 마을 앞 기름들까지 물이 찼으며 연봉(蓮峯)마을10에 나루터가 있어 배로 천(川)을 건넜다고 한다. 장마철이 지나 물이 빠지면 다리를 놓아 건너갔다고도 한다. 용두마을과 연봉마을은 정읍천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에 있는 마을인 점으로 보아 정읍천대교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태인과 고부를 왕래할 때에 이곳을 이용했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추운 겨울 일행과 함께 회룡리에서 고부로 압송 당하실 때, 연봉마을를 지나 정읍천을 건너 용두마을에 도착했을 것이다. 용두마을에서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펼쳐진 저 들을 바라보며 종도들이 화액[고부화액]을 당할 것을 걱정하시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용두마을 앞 기름들을 바라보며
고부군 시절, 정읍천은 기름들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넉넉한 삶을 누리게 해주었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범람하거나 가뭄이 들 때는 물이 부족하여 그 피해가 너무나 컸다. 정읍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도 이 같은 자연재해를 피할 수 없었다. 민생의 고통을 걱정하신 상제님께서는 ‘운암강(雲岩江)의 물로 전북 칠읍의 흉년을 없애’는 공사를 보셨다.11이 결과 운암강에 다목적댐으로 생긴 옥정호(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에서 6Km 터널을 뚫어 섬진강수력발전소12로 물이 보내지고 다시 폭이 4m인 인공수로를 따라 호남지역의 농업용수로 공급되고 있다.13 가뭄에도 물 걱정 없이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대한불갈(大旱不渴)인 것 같다. 상제님의 덕화가 호남평야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