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수(婁宿) 루수는 28수 가운데 열여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두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3개로 상징 동물은 개[狗]이다. 루수의 속성(屬性)은 금(金)으로 한데 모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희생(犧牲)에 쓰일 가축을 길러 제사에 사용한다는 의미도 있다. 루수를 의인화하여 서방루금구성군(西方婁金狗星君)이라 하는데 얼굴이 개와 유사하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수화곤(水火棍)01을 들고 있다고 한다.02
후한의 창업공신 임광 임광(任光,?-29)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백경(伯卿)으로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인정이 두터워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임광의 첫 관직은 향(鄕)의 말단 관리였다. 이 시기는 중국사에서도 두드러지는 난세였다. 전한(前漢)-신(新)-후한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의 과정에서 중국 전역은 ‘천하대란’이라고 할 정도의 혼란에 빠졌다.03 신나라 말기였던 당시의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시제를 옹립한 이들의 세력 확장은 순조로웠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경시제에 투항할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시제를 옹립한 주체 세력들은 민심을 얻고 세력이 커졌지만 내부적으로는 도둑 집단에 가까웠다. 그 무렵 경시제의 병사들이 임광이 있던 완현에 이르렀다. 이들은 임광의 의관(衣冠)이 좋은 것을 보고 탐을 내었다. 그들은 임광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군기가 서지 않은 난세의 군사들은 폭력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임광이 이에 불응하자 병사들은 그를 죽여서라도 옷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임광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광록훈(光祿勳)04 유사(劉賜, ?-52)05가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 유사는 임광에게 장자(長子)의 풍모가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칼을 든 병사들이 옷을 요구할 때 선선히 내주지 않는 임광을 보고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임광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생명의 은인인 유사를 쫓아 안집연(安集掾)06이 되었다. 이후 임광은 다시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어 유수와 함께 곤양대전에 참전하게 된다.07 한편, 임광의 목숨을 구해준 유사는 후한 건국의 첫 단계에서 크게 기여하게 된다. 경시제에게는 중국 전역을 평정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특히 하북(河北) 평정을 위해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때 유사는 유수를 천거했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없지 않았지만 경시제는 유수를 하북에 파견하였다. 유수의 하북 파견은 후한 건국의 기초가 세워지게 되는 일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유사는 후한 건국의 첫 문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유수로서는 경시제의 감시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수가 하북을 평정해 가는 과정에서 왕랑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전한의 6대 황제인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주장했다. 왕망 치하의 장안에서 자신을 유자여라고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왕랑은 그때 죽은 유자여는 가짜이고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경시제는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으로 이에 실망한 민심은 왕랑을 진짜 ‘유자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랑은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그는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이렇게 해서 유수는 왕랑에 의해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임광은 곤양대전 이후 경시제의 명으로 신도(信都)태수에 임명되었다. 하북의 모든 군현이 왕랑을 천자로 받들었지만 신도태수 임광과 화성(和成)태수 비융(邳肜)만은 예외였다. 임광은 도위(都尉) 이충(李忠), 군령(郡令) 만수(萬脩), 공조(功曹) 완황(阮況), 오관연(五官掾) 곽당(郭唐)과 함께 신도군을 굳게 지켰다. 이때 부유현(扶柳縣)의 정연(廷掾: 현에 속한 관리)08이 왕랑의 격문을 들고 관서로 출두하였다. 임광은 그를 저자거리에서 참수하여 술렁이는 민심을 잠재웠다. 또한, 정예병 4천여 명을 뽑아 성을 수비하였다. 24년 봄, 유수는 계[薊,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부터 왕랑의 추적을 피해 신도로 도망쳐 왔다. 임광은 홀로 성을 지키다가 유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면서 유수를 맞이했다. 임광의 영접을 받은 유수는 임시 객관에 들어가 그에게 말하였다. “백경! 지금은 세력이 허약하니 성두자로(城頭子路), 역자도(力子都)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임광이 말했다. “불가(不可)합니다.” 유수가 다시 물었다. “백경의 군대는 적은데 왜 그러시오?” 임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명령을 내리시어 병사를 모집하시고 이웃 현을 공격하여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대로 사로잡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탐낸다면 이 또한 얼마든지 모을 수 있습니다.” 왕랑에게 쫓기던 신세였던 유수로서는 모처럼 듣는 속시원한 대답이었다. 임광의 말은 ‘병력이 없으면 징발하면 되고 재물이 없으면 모으면 되지 다른 세력의 밑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유수는 그의 말을 따랐다. 유수가 언급한 성두자로와 역자도는 당시 세력이 왕성했던 반란집단이었다. 성두자로는 노현(盧縣)의 성두(城頭) 즉 성곽 위에서 기병(起兵)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자로는 이 무리를 이끈 원증(爰曾)의 자(字)였다. 이 무리는 한때 20만에 육박할 정도로 강력했다. 또한 역자도의 무리도 한때 10만에 이를 정도로 강력했다. 이들은 모두 경시제에 투항의 사절을 보내어 그 우두머리가 각각 동래(東萊)태수와 서주목(徐州牧)에 임명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도적의 무리에 불과했다. 임광으로선 세력이 작다고 해서 혼란한 시대를 틈타 일어난 도적의 무리와 연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수는 임광을 좌대장군(左大將軍) 무성후(武成侯)에 봉하고는 남양(南陽)사람 종광(宗廣)더러 남아서 신도태수의 일을 맡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임광은 군사를 이끌고 유수를 따라 왕망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임광이 다음과 같은 격문을 각지에 알렸다. “대사마 유공이 성두자로(城頭子路)와 역자도(力子都)의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동쪽에서부터 와서 반란의 무리를 치노라.” 임광은 기병(旗兵)을 보내 거록(鉅鹿)까지 격문을 전파하게 했다. 임광의 격문은 이 지역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유수는 임광과 함께 밤을 틈타 당양(堂陽)까지 진군했다. 임광이 기병들에게 각자 횃불을 들게 하여 못 가운데에 가득하게 하니 불빛이 천지를 밝혔다. 성안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그날 밤으로 항복하였다. 이때 유수군이 밤에 횃불을 사용한 것은 탁월한 계책이었다. 사실 유수군의 군세는 그리 크지 않았다. 성두자로와 역자도의 병사 백만도 허풍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밤에는 숫자를 파악할 수 없고 더구나 횃불의 숫자가 많으면 이를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격문대로 백만의 군사들이 집결한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10여 일 사이에 도처에서 투항하는 군현이 늘게 되었고 유수군은 병력을 크게 증강시킬 수 있었다. 유수는 이 병력을 기반으로 하북의 성읍을 공략하였다. 마침내 유수군은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을 평정했고, 임무를 완수한 임광은 신도군으로 귀환했다. 이 해에 임광은 다시 아릉후(阿陵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이 만호(萬戶)에 이르렀다. 29(건무 5)년 임광이 봉조청(奉朝請)09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임외(任隗)가 뒤를 이었다. (임광 끝)
01 수화곤은 중국 고대 관아 아전들이 사용하던 몽둥이이다. 몽둥이의 반은 붉은색이고 나머지 반은 검은색으로 일체의 사정을 보아주지 않고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02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31. 03 당시 정세와 경시제 관련하여 「각(角)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신명(1)」, 《대순회보》 154호(2014년 3월호), pp.66-67 참조. 04 한나라 때 제사ㆍ조회(朝會)ㆍ연향(宴饗) 따위를 맡아보던 벼슬. 05 자(字)는 자금(子琴). 남양(南陽) 채양(蔡陽, 현재 湖北省 棗陽 西南) 사람. 광무제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이 왕망에 반기를 들었을 때 함께 했다. 경시제(更始帝)가 즉위하여 광록훈(光祿勳)에 임명되었고 광한후(廣漢侯)에 봉해졌다. 유연이 죽임을 당하자 그를 대신하여 대사도가 되었다. 이 당시 경시제는 하북(河北) 평정을 위해 파견할 장수로 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가 유연의 동생인 것이 걸렸다. 유수의 하북행은 유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후한 건국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경시제가 장안에 도읍한 이후 완왕(宛王)에 봉해지고 관동(關東) 진무(鎭撫)를 맡았지만 광무제가 즉위한 이후 경시제의 처자(妻子)를 대동하고 항복했다. 26(건무 2)년에 신후(愼侯)에 봉해졌고, 37(건무 13)년 안성후(安成侯)로 다시 봉해졌다. 06 관명(官名). 연(掾)은 하급관리를 의미한다. 난세에 떠돌던 사람들을 안무(安撫,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함)하고 소집(召集)하는 일을 맡았다. 07 곤양대전에 관한 사항은 「28수(宿) 신명과 광무제 유수-28수 신명 연재를 시작하며-」, 《대순회보》 153호(2014년 2월호), pp.75-76 참조. 08 현(縣)에 속한 관리. 09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