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풍헌(崔風憲, ?∼?)은 조선 중기의 전라남도 고흥(高興) 사람으로서, 역사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또한 풍헌(風憲)은 본명이 아니라 직무를 맡던 관명이어서,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였는지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는 몇몇 일화에 그가 고흥 지리산[地理山, 두방산 혹은 지래산(地來山)이라고도 한다]에서 수도를 하였고, 이적(異蹟)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최풍헌에 대한 민담 중 일부분에 『典經』의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옛 이야기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두방산에서 바라 본 전경 (멀리 다도해 사이로 남해 앞바다가 펼쳐져 있다.)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가 재위할 당시 남해안 지방에는 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침략을 일삼았다. 조정은 비변사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빈번한 외침에 대비했으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는 조정 대소신료들이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에 여념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치가 이러하니 지방 행정 또한 올바르게 돌아갈 일이 만무했다. 지방 관원(官員)조차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떤 형편인지도 살피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는데 급급했다. 그 무렵 전남 흥양현(興陽縣, 고흥군의 옛 명칭)에 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고을의 풍헌을 맡고 있었다. 그 자리는 고을의 풍기(風氣)와 관원의 부정부패를 감찰하는 직분으로서 남다른 재능과 분별력, 그리고 바른 품행을 요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도무지 그 직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주정꾼에다가 언행이 거칠기로 마을에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마을사람들 모두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풍헌 자리에 올랐는지 몰라?”, “저런 이를 어찌 믿고 중재를 요청 하겠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러한 풍문이 나돌자 여러 관원들도 정상적인 업무까지 차질을 빚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현령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관원이라는 작자가 허구한 날 술에 절어 녹봉을 주막거리에 모두 소진하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던 참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파면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고매한 인품과 덕망으로 존경받던 류(柳)훈장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어 당장에 내칠 수만은 없었다. 답은 풍헌 스스로가 나가는 것뿐이었다. 문득 현령은 3년마다 돌아오는 호구(戶口)조사를 떠올렸다. 당시 조선은 왜적의 잦은 침입과 과중한 조세 및 군역이 극에 달해 일부 백성들이 야반도주하는 경우가 많아 실태 조사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현령은 그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했다. 다음날 현령은 주막거리에 있는 그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이 자리에 천거 되었소. 그러니 이번 기회에 호구조사를 도맡아 그대의 능력을 발휘해보시오. 그리고 다른 이가 맡으면 몇 개월이 걸릴 일이나, 그대의 능력이라면 보름 안으로 충분히 할 것이오.” 풍헌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자, “왜 시일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 것이오.”라고 재차 현령이 물었다. 그래도 풍헌은 한마디의 답변도 없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이 잠시 흐른 뒤 풍헌은 “네, 알겠습니다.”라는 짧은 답변만을 남긴 채 자리를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령은 내심 ‘아무리 재간이 좋은 이도 몇 개월이 걸릴 일인데, 술주정뱅이인 풍헌이 어찌하겠어? 아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와 용서를 구하겠지.’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풍헌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바심을 느낀 현령은 병졸을 보내 꼼꼼히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풍헌은 예전과 변함없이 연일 술에 취해 있었으며 특별한 동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술이 깨면 양손에 술병을 챙겨 마을주변을 쏘다니다, 술이 떨어질 때쯤 주막으로 돌아와 다시금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라는 병졸의 보고를 받았다. 현령은 이제야 고을의 애물단지를 멀리 내쫓을 수 있게 되었다며 흡족해 했다. 이윽고 약속한 당일이 되자 풍헌이 현령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양손에 두툼한 꾸러미를 들고서 말이다. 이내 그는 자신이 조사한 자료들을 현령에게 보여주었다. 현령은 예전 호구대장과 비교하며 꼼꼼하게 읽어내려 가다 그만 아연실색했다. 기본적인 거주지 · 본관 · 직역(職域)은 물론이고 동거하고 있는 가족 수 및 소유하고 있는 노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동거인 혹은 노비들 사이에 잠적이나 도주자까지 조사되어 있어서 현령은 한참이나 책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이래서 류훈장이 풍헌을 그렇게 아낀 것이었나?’라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결과에 망연자실한 푸념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호구조사를 잘 마무리한 풍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손에 술병을 쥐어진 채 주막거리를 서성였다. 그런데 자신의 귀를 쫑긋하게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예전 자신을 추천해 준 쇠재마을01 류훈장의 덕망을 칭찬하는 한 무리의 이야기였다. 풍헌은 주춤거리다 ‘그 사람이면 나하고 충분히 대화가 되겠어!’라며 그 길로 훈장 댁을 찾아 갔다. 갑작스레 관아의 풍헌이 찾아왔다는 기별에 훈장은 난감해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훈장은 그를 불러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그리고 대뜸 한쪽 무릎을 치면서,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라고 감탄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풍헌은 말함에 조금도 걸림이 없고, 경서(經書)는 물론 천문 · 지리 · 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자신 또한 다양한 문헌을 익혔다고 자부했으나 풍헌에게 견줄 바가 못 되었다. 그날 바로 훈장은 자신의 방 하나를 내주며, 앞으로 동고동락 하면서 각자의 의견을 서슴없이 나누자고 다짐했다. 풍헌 역시 쾌히 승낙했다. 특히나 민심이 흉흉해져 마을 사람들끼리 툭하면 분쟁이 발생했던 터였는데, 이마저도 풍헌이 직접 챙기겠다고 응해주니 훈장으로서는 너무나 고마웠다. 다음날부터 풍헌은 약속대로 골치 아픈 일련의 분쟁들을 해결해 주기 시작했다. 또한 어렵고 난해해서 모두 엄두를 못내는 일을 선뜻 시켜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풍헌은 또다시 하루, 이틀 그러다가 며칠씩 어디론가 조용히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관아에 머물면서도 그랬다고는 하지만 막상 훈장 자신이 겪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훈장은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는 것일까?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한 터라 설마 풍헌도 살 길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하는 등 수많은 번잡한 선입견들이 자신의 뇌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학동이 숨이 넘어가는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님! 마을 앞 바닷가에 왜군이 출몰했답니다.”라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얘야, 놀랄 것 없다. 한두 번도 아니고 우리 마을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단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거라.”며 학동을 다독거렸다. 그랬다, 지금껏 잦은 출몰은 있었으나 내륙에 가까운 쇠재마을까지 닥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 다음날 또 다음날에도 풍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는 이의 소식은 온데간데없고 왜군의 출몰만이 부쩍 잦아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훈장 역시 난리를 모면할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오면 올수록 ‘풍헌이었다면 이 난리를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 텐데’라는 막연한 믿음만이 아련히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현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잡생각에 잠긴 채 훈장은 그윽한 매화향기가 어스름한 달빛 속을 떠돌았다. 그때 문 앞에서 허름한 행색의 한 사내가 손에 술병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최풍헌이었다. 훈장은 무작정 그를 사랑채에 이끌고 들어가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무엇했는지를 물었다. “여기서 70리 떨어진 지리산(地理山)의 한 석굴에서 수도에 전념하였습니다.”라고 풍헌은 대답했다. 의외의 말에 놀란 훈장은 “무슨 수도, 혹시 선술 말이요? 지금 이 난리 통에 수도가 웬 말입니까? 참, 아니지. 그것보다 난리를 모면할 길이 없겠소?”라며, 일방적인 대화를 이끌어갔다. 풍헌은 태연스럽게 “네, 선술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닥칠 것입니다. 저로서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라는 대답만을 남길 뿐이었다. 그의 대답에 한동안 망연자실한 훈장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수차례 거듭 풍헌에게 매달렸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그저 침묵이었다. 그럼에도 훈장의 정성과 성의에 풍헌은 다음과 같은 다짐을 요구하며 입을 열었다. “여명이 밝아 오거든 모든 가산을 팔고, 그 돈 전부를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사안임에도 훈장은 선뜻 승낙했다. 다음날 훈장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돈을 풍헌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살길이 생겼다는 생각에 훈장은 경제적인 불편함은 충분히 인내하며 보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풍헌은 그 돈을 쥔 후로는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황한 훈장이 수소문 해보니 저잣거리에서 매일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남들 같으면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쳤을 것이다. 훈장은 ‘그 사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막이 있어 그러는 것인 게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오히려 보채는 쪽은 이를 가만히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훈장의 식솔들이었다. 가산을 넘기다보니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참다못한 식솔들이 훈장에게 볼멘소리를 내자 그는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큰 아들이 자신과 풍헌을 믿고 있는 터라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훈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공허함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아닌 척, 밝은 척 애를 써보지만 그 한 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훈장의 집안사정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풍헌은 원래 그렇다지만 덕망 있는 훈장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시다니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술주정뱅이의 말을 무작정 믿고 가산을 탕진할 수 있지?”라며 훈장을 조롱거리로 삼았다. 아니 그런데 매일 술에 찌들려 살던 풍헌이 죽었다는 뜻밖의 부고를 듣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낙담한 훈장은 상가를 직접 찾아 그의 죽음을 애도한 후, 풍헌의 아들에게 혹시 남긴 유언이 없었는지 물어 보았다. 아들은 “류훈장에게 기별하여 상복을 입은 후, 상여를 메고 지리산02 아무 곳에 장사지내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 훈장은 ‘참으로 기이한 유언이구나. 행여 풍헌이 나에게 어떤 족적을 남긴 것이 아닐까!’라며 서둘러 이 소식을 식솔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큰아들을 제외한 식솔들이 “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며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낸 것도 모자라 무작정 그의 상여를 뒤따라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라며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훈장은 큰아들만을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로 운상(運喪)을 하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훈장 일행들은 지리산 입구에 당도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른 후 마지막 남은 지리산 협곡으로 향했다. 굽이굽이 치는 험로에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상황에 상여까지 지고 가려니 모두들 입안에 침이 마르면서 단내가 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겉보기와 다르게 험준한 산세와 협곡으로 인해 좀처럼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칠 지경에 이르자 어디 선가 “상여를 버리고 빨리 이곳으로 오시오!”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바로 최풍헌이었다. 일행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장(神將)처럼 우뚝 선 기암괴석이 보이고 두 개의 석굴 사이에 풍헌이 서 있었다. 일행은 정말이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상여를 그 자리에 내팽개치고 서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풍헌은 반갑게 반기기보다는 숨 돌릴 새 없이 훈장을 이끌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 저 멀리 보이는 여러 마을과 바닷가를 가리켰다. 훈장은 그쪽을 보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을 곳곳이 불길에 휩싸여 있고, 해무(海霧) 사이로 어렴풋이 헤아릴 수 없는 군선(軍船)이 보이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민심은 흉흉했으나 일정한 평온을 유지한 터였기에 훈장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남은 가족과 지인들의 신변이 걱정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올 때 좀 더 이해를 시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때늦은 후회를 뒤로 한 채 훈장은 기암괴석이 있는 곳으로 묵묵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풍헌과 조우한 그 자리에 당도한 훈장은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허랑방탕하게 살던 그가 어느 세월에 조그마한 암자와 풍부한 식량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 석굴에는 바위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석간수(石間水)가 맑은 샘을 이루고 있어서, 그야말로 의식주를 고루 갖춘 최적의 보금자리였다. 더구나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지형적 특징과 산 외부에서는 내부를 식별할 수 없는 산세를 갖추고 있었다. 훈장은 이 모든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일궈내기 힘든 풍헌의 안배임에 다시 한 번 탄복했다. 풍헌은 훈장과 재회의 기쁨도 잠시 이내 석굴 속 큰 너럭바위에 앉아 다시 수도에 들어갔다. 그는 며칠간 불면불식을 거듭하며 수도에 정진하다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둠이 내려앉은 이른 아침이었고 하늘에선 맑고 투명한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일행들이 전쟁의 화염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어서였는지 단꿈에 젖어 있었다. 풍헌은 조용히 류훈장을 깨워 밖으로 나오게 했다. 저 멀리 바닷가를 바라보던 풍헌이 류훈장에게 “저는 다시 떠나려 합니다. 멀지 않은 앞날에 왜적들이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갈 것이니, 그동안은 이곳에서 머물고 계십시오.”라는 당부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훈장은 분명 어떤 확신이 있기에 떠나려 한 것임을 알고, 애써 그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저 홀연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한걸음 한걸음씩 멀어지는 그의 뒤로 운무(雲霧)가 변화무쌍하게 피어오르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신이(神異)한 광경에 말을 잊은 훈장은 ‘풍헌은 뭇사람과는 다른 세계의 존재였구나. 내가 그런 존재와 만났다니 믿을 수 없구나.’라며 그를 향한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국난은 풍헌이 알려준 대로 종지부를 찍었다. 피폐해진 마을도 봄에 새싹이 돋아나듯 다시금 삼삼오오 주민들이 모여 재건이 이루어졌다. 훈장 역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미약한 힘이나마 일손을 도왔다. 점차 안정을 되찾을 무렵 마을주민들이 훈장 댁에 모여 그동안 전란기간에 겪었던 사연들에 대한 담소를 갖게 되었다. 피난과 이별 그리고 슬픔 등을 나누는 가운데 한 사람이 최풍헌을 들먹였다. 훈장은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자세히 말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는 자신도 봇짐장사를 하며 방방곡곡을 돌다 우연히 들었다고 하였다. “국난이 닥쳐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播遷)했을 무렵, 한 흥양현 말단 관원이 임금 만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임금을 뵙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거듭 간청하자 어렵사리 그 자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대뜸 임금을 알현해서 올린다는 말이 ‘나에게 병권을 주십시오. 그러면 사흘 만에03 이 전란을 끝내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대소신료들이 ‘일개 말단 관원이 주제넘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것도 사흘이면 된다니, 제 정신이 아니구나!’라며 핍박을 주었고, 임금 또한 단호히 거절하고서 그를 내쫓았다는 것이다. 쫓겨난 풍헌은 그 이후 세상을 구하려던 자신의 포부를 받아주지 않는 것에 괴로워하면서 돌연 금강산으로 들어가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라는 이야기였다. 훈장은 크게 낙담했을 풍헌을 씁쓸히 되새기며, 밤새도록 처량한 달빛에 젖어 지난 풍헌과의 만남을 되새겨 보았다.
참고문헌
• 박병각, 『우리의 뿌리사상과 그 문화』, 학문사, 2000, p.138.
• 『고흥지명유래』, 재경고흥군강서회, 1982.
• 『두원면지』, 고흥 두원면사무소, 2002.
• 『조선일보 - 조용헌 살롱 : 도가(道家)의 최풍헌』, 조선일보, 2008년 6월 30일.
• 조용헌, 『나는 산으로 간다』, 푸른숲, 1999, p.252.
• 조용헌,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인사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 이우성, 『이조한문 단편집 (상)』, 일조각, 1978.
• 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p.336.
• 조희웅, 『영남 구전자료집』, 박이정, 2003, p.160.
01 現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용반리 금성마을.
02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에 있는 산. 지금은 두방산(斗傍山)이라고 불리나 예전에는 지래산(地來山) 혹은 지리산(地理山)으로도 불렸다.
03 “… 지나간 임진란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이 당하였으면 석 달이 넘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불·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예시 7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