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일반적으로 종통이란 다른 종단과는 구별되는 그 종단만의 독특한 신앙 체계(교리, 의례, 수행법, 조직 등)를 바르게 계승하는 인적 계보를 말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종교 창시자가 세운 가르침이 시간이 흘러 후대로 내려갈수록 문화나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본 모습을 잃고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온 예가 참으로 많습니다. 따라서 종교 창시자의 원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종단의 입장에서 보면, 종통을 확립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근본 자리를 찾고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우리 종단의 종통은 무엇인가요?
답. 우리 종단의 종통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말합니다.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는 종통 속에서 도주님의 진법으로 체계화되고 도전님에 의해 그대로 받들어져 왔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다음의 종통을 정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종통은 도전님까지이며 그 이후의 종통은 없습니다. 이 종통을 지켜나가는 것이 현재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문. 종통을 지켜나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답. 종통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믿고 ‘그 속에서 전하여 온 진리와 진법’을 지키고 닦아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이 모두의 소망인 도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종통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도통을 받기 위한 대순진리회 수도의 핵심입니다.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는 오직 도주님에 의해 밝혀지고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도주님을 모르고서는 상제님이 어떤 분이신지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도주님의 유법은 유명(遺命)으로 도전님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도전님을 통해서 만이 상제님의 진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통을 지켜나간다면 안심(安心)ㆍ안신(安身)의 경지에 이르러 그 어떤 사술(詐術)에도 흔들리지 않고 도통의 길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통을 지키지 못한다면 바른 수도의 길로 갈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가 난법난도자(亂法亂道者)로 전락하여 자멸하게 됩니다.
문. 연원(淵源)이라는 말도 있는데, 연원과 종통은 같은 것인가요?
답. 대체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연원(淵源)이라는 말은 ‘근원’이라는 뜻인데, 이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본도의 연원은 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내려 왔다.”(『대순지침』, 14쪽), “상제님의 계시로 득도하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연원의 맥이 이어지고, 도주님 화천 당시 유명으로 또 연원의 맥이 이어져 내려왔다.”(『대순회보』 10호, 2쪽), “강증산 상제의 대순하신 유의(遺意)의 종통을 계승한 조정산 도주의 연원이라 한다.”(『도헌』 제13조)라고 밝혀주셨습니다. 즉 우리 종단의 연원은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시작되어 도전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상제님의 진리가 도주님과 도전님을 통하여 차례로 정립ㆍ전수되고 실현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연원은 종통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상제님을 전 우주를 총할하시는 하느님으로 모셨던 분은 도주님이 처음이신가요?
답. 그렇습니다. 상제님께서 구천의 주인이신 최고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도주님께서 밝혀주시기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계신 동안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지만, 상제님을 따랐던 많은 종도들은 상제님께서 누구이신지 몰라 그냥 천사(天師)나 선생(先生), 당신이라고만 불렀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간행된 경전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차경석의 최측근이었던 보천교인 이상호가 상제님의 종도들을 찾아다니면서 상제님의 행적에 대한 증언을 듣고 1926년에 『증산천사공사기』라는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서는 상제님을 천사(天師)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또 1929년에는 『대순전경』 초판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선생(先生)으로, 1933년 간행된 『대순전경』 2판에서는 당신으로, 해방 후인 1947년 간행된 『대순전경』 3판에서는 다시 천사(天師)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제님의 종도들 중에서 박공우 등 극히 일부 사람들은 상제님을 옥황상제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구천의 주인이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상제님께서 구천의 주인이신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이시라고 밝혀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하신 분이 도주님이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문. 도주님은 상제님의 종도가 아니셨다고 하는데, 그럼 상제님과 도주님은 한 번도 만나신 적이 없으셨나요?
답. 도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받으셨고, 인세(人世)에서는 한 번도 상제님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도주님을 찾아보셨던 사실이 종도들 사이에서 구전(口傳)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도주님께서 9세가 되시던 해인 1903년, 김보경(金甫京, 1860~1934) 등 몇 종도들이 상제님을 시좌하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 하고 한숨을 쉬신 일이 있었습니다. 김보경이 상제님께 그 연고를 여쭈어 물었더니, 상제님께서는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時有其時 人有其人(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 중에도 그 사람이 있노라)’이라는 글을 쓰셨습니다.(『증산의 생애와 사상』, 104∼105쪽)
또 도주님께서는 15세가 되시던 해인 1909년 4월 28일 창원역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전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길에 오르셨습니다. 바로 이날 상제님께서는 이치복(李致福, 1860∼1944)과 김보경을 비롯한 몇 종도를 앞세우시고 대전 신탄진(新灘津) 들판에 나가셨습니다. 한참을 서성이시면서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라고 하시다가, 마침 도주님께서 타신 기차가 오는 것을 보시고 “이제 나의 일을 다 이루었도다. 남아(男兒)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는 도주님의 종통을 부정하는 다른 종단의 경전에까지도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문. 『전경』에 보면 둔궤(遁櫃)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도주님의 종통계승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도주님께서는 1919년 정월 보름에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으로부터 봉서(封書)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선돌부인은 도주님께 둔궤(遁櫃)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이를 찾아와야 한다고 간곡한 청을 하였습니다.
둔궤란 상제님께서 1907년 4월 동곡약방을 여실 때 만드신 궤로서, 천지 도수의 조화둔궤(造化遁櫃)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난 뒤에 이 궤는 김수부(金首婦, 1890∼1911)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김수부란 김형렬의 셋째 딸로서 차경석의 이종매(姨從妹)인 고수부(高首婦, 1880∼1935)와 함께 상제님의 수많은 공사 중 하나인 수부공사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수부는 1911년 김수부가 죽을 때 이 궤를 가져갔고 다시 이 궤가 보천교 교주 차경석에게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1919년 9월에 도주님께서는 보천교 본부에 직접 가셔서 병풍으로 가려놓은 둔궤를 찾아오시고는, 통사동(通士洞) 재실에 둔궤를 모시고 밤낮으로 도수를 보셨습니다. 그러자 1920년 2월 17일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서 둔궤가 저절로 열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났습니다. 둔궤 안에는 호피 문양의 담요 1장이 들어 있었고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으며, 양피 24점이 찍혀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상제님께서 천지도수 조화를 담으신 궤가 도주님에 의해 열렸던 일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하신 진주(眞主)이심을 증명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공사 후 둔궤는 함안 반구정(伴鷗亭)으로 옮겨졌는데, 얼마 후 한 도적이 둔궤에 욕심을 내고 훔쳐가 버렸습니다. 도인들이 이를 알고 안타까워하니 도주님께서는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 자는 도망 둔(遁) 자이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난 1984년 3월 25일(양력 4월 25일)에 둔궤를 다시 찾아 도장에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도장 주변에는 벽력이 일고 바람이 크게 일어나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도전님께서는 “둔궤가 도망 둔(遁) 자여서 도망을 가니 이제부터 성궤(聖櫃)로 부르라.”고 말씀하시며, 이로부터 3년간 성궤 치성을 모시도록 하명하셨습니다. 그때 3년간 성궤가 놓여있었던 자리가 옥황상제님의 왼편 자리였습니다.
문. 도주님께서는 계시를 받으신 이후에 상제님을 찾지 않으셨나요? 상제님의 성묘(聖墓)라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답. 도주님께서는 1921년 9월 5일 상제님의 모친이신 대사모님, 선돌부인, 강순임과 함께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찾으셨습니다. 1909년에 상제님께서 갑작스럽게 화천하시자 많은 종도들은 믿음이 약해져 흩어져 버렸고, 김형렬ㆍ차경석ㆍ박공우ㆍ김자현ㆍ김갑칠ㆍ김덕찬 등 단지 여섯 종도만이 남아 상제님의 인신(人身)을 동곡 뒷산 솔개봉 기슭인 장탯날에 초빈(草殯)하여 두었습니다. 초빈이란 정식의 묘가 아니고 시신을 묻지 않고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이엉 등으로 덮어 두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초빈은 2∼3년 뒤에 이장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상제님의 성골이 정식으로 묘에 안치되지 못한 채 임시로 땅 위에 이엉으로 덮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상제님의 성골을 정식으로 모셔야 할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해야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당시 상제님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거주할 곳조차 없어 상제님께서 마련해 두신 선돌부인의 좁은 방에 모여 겨우 살고 있던 참혹한 형편이었습니다.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 중 상제님의 가족들을 보살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상제님의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하신 분이 바로 도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가족들과 같이 상제님의 성골을 통사동 재실로 모셔와 정식으로 치성을 올리셨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도주님과 상제님 가족들에 의해 정식으로 상제님의 치성이 치러지는 데 걸린 기간은 13년이었습니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실 때에는 열석 달이 소요되었고, 화천하신 뒤 정식으로 치성으로 모셔지기까지는 13년이 소요되었던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강일순호남서신사명(姜一淳湖南西神司命)’(행록 5장 33절)이라 하셨고,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재제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예시 30절)고 하셨습니다. 사명(司命)이란 운명을 주관하고 다스린다는 뜻이고, 서쪽은 개벽의 후천 세계를 상징하며, 서신(西神)이란 곧 후천세계의 주인인 상제님을 말합니다. 동양학에서 서쪽은 오행으로 금(金)이고 수리로 4ㆍ9에 해당합니다. 4와 9를 합치면 13이 되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고 화천하시는 데 13이라는 수리가 나타난 것은 상제님께서 서신(西神)사명하심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주님께서 상제님 화천 후 13년 만에 정식으로 치성을 모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 종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다 정해두는 것이 아닌가요? 도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종통을 받으셨다는데, 그것도 다 하늘에서 정해놓은 일이었나요? 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도전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이 주고받는 상속이 아니라 하늘에서 천부적으로 이어져 오는 신성성이며 연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부적인 연속성을 종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대순회보』 10호, 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천부적 신성성’이라 함은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늘에서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 도주님 9세 때 상제님께서 진인(眞人)이 9세라고 하셨던 사실,
* 도주님 15세 시에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가실 때 상제님께서 그 기차를 보시고 남아 15세이니 이제 나의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사실,
*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상제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셨던 사실,
* 정월 보름 찾아올 을미생에게 봉서를 전하라는 상제님의 안배에 따라 선돌 부인이 도주님께 봉서를 전해드린 사실,
* 상제님께서 천지도수의 조화를 담으셨던 둔궤가 도주님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도주님께서 하늘이 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실들이 더 있습니다.
첫째는 상제님께서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교법3장 41절)이라 하여 상제님의 공사를 이어 맡으실 분이 12월 4일에 오실 것이라고 예시하셨던 사실입니다. 12월 26일이 완전한 1년이 되려면 ‘26+4=30’이니 12월의 4일이 더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일을 만도수(萬度數)로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12월 4일에 오실 상제님의 계승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도주님께서는 12월 4일에 탄강하셨으니, 그 날짜는 우연이 아니라 천부적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도주님께서 15세 진주(眞主)로 봉천(奉天)에 가시어 천명(天命)을 받드신 사실입니다. 약 4,000년 전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령스러운 동물인 신구(神龜)의 등에 낙서(洛書)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수리를 보면 중앙(5)을 중심으로 좌우(3과 7), 상하(9와 1), 양 대각선(4와 6, 2와 8)의 합은 각각 15가 됩니다. 이것은 만물이 15에 의해 생장염장(生長斂藏)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조석(潮汐)이 15일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만물의 근원인 수(水)는 15를 기준으로 변화합니다. 하늘 360 주천(周天)을 15로 나누면 24가 되고 이것은 시간으로는 24절기, 공간으로는 24방위가 됩니다. 즉 시간과 공간도 15를 기준으로 그 자리를 교체하면서 운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원리로 해서 15는 우주 변화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진법주(眞法呪) 공사를 통해 만들어 놓으신 신위가 15신위(神位)이고 배례 횟수가 총 15배인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15를 우리나라 민간에서는 예로부터 진주(眞主)라 불러 왔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노름의 한 종류인 ‘가구판 노름’에서는 1부터 10까지의 점수를 각각 나타내는 패를 차례로 하나씩 3장 가져가서 그 패들의 합을 계산하는데, 그 합이 15가 되는 사람을 진주(眞主)라고 부르고 진주가 승자가 되어 그 판을 먹습니다. 만약 15를 맞춘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15를 넘은 사람은 탈락하고 남은 사람들 중에서 합이 14·13·12·11의 순서로써 승부를 결정합니다. 점수가 같을 경우에는 노름꾼들 중 가장 늦게 패를 가져간 말수(末手)가 승자가 됩니다. 이와 같이 15는 진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도주님께서 천명을 받으신 때가 ‘15’세셨다는 것은 도주님께서 ‘참 주인’ 즉 진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도주님께서 23세 시에 상제님께서 삼계를 대순하신 진리를 감오ㆍ득도하시어 태을주로 본령합리(本領合理: 본래의 특성이 진리에 부합됨)를 이루신 사실입니다. 도주님께서 득도하신 1917년 2월 10일은 도주님께서 23세가 되시는 해이고, 23은 태을주 글자 수 23과 서로 상응이 됩니다. 상제님께서는 최제우가 1860년에 계시로써 받은 시천주는 1909년까지 50년이 된다고 하시고, 그 시천주는 이미 쓰였으므로 이제 태을주를 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교운 1장 20절) 그러므로 1909년 이후는 태을주의 법이 펼쳐지게 되는데, 상제님의 뒤를 잇는 도주님께서도 이에 따라 태을주 23수(數)에 상응하여 23세 시에 대순진리를 감오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는 전북 김제 금산사의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이 상징하는 사실입니다. 1,200년 전 삼국 통일 직후에 망국 백제의 유민이었던 승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미륵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깊은 물웅덩이[용추(龍湫)]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은 뒤에 미륵상을 봉안하여 미륵신앙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그 미륵상은 높이가 11.8m이고 좌우에 8.8m의 협시상(夾侍像)이 2개 더 서 있어 모양이 뫼 산(山)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그 상들 양 옆으로 두 개의 작은 보살상이 추가로 더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날 출(出)의 형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증산(甑山)과 정산(鼎山)의 양산(兩山)을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놓은 것으로, 도주님의 종통 계승이 천부적인 것임을 나타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상제님께서는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고 하시어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는 종통 계승에 대해 예시를 하여 놓으셨습니다.(교운 1장 41절)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할 분은 대두목으로서 상제님의 종도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한 종도들은 상제님께 불만을 가지기도 했으나 이는 천부적으로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천부적 종통 계승자가 도통줄을 열어줄 터이니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분명히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문. 도전님께서는 종통을 받으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던 분이셨나요?
답. 도전님께서 종통을 받으시기 이전의 일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일부분만 전해집니다. 도전님께서는 수안보 보통학교를 졸업하신 뒤 잠깐 동안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한국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을 강요하자 교직을 그만두셨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100만 명이 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끌려 나갔는데, 1943년에는 도전님의 동생이 징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동생의 고난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동생 대신 일본 북부 지방인 아오모리현[ ]으로 징용을 가셨습니다. 해방이 되자 도전님께서는 고국에 돌아오기 위하여 우키시마호[浮島丸]를 타셨는데 이 배가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만[舞鶴灣]에서 의문의 폭발로 침몰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도전님께서도 바다에 빠지셨는데 홀연히 거북이가 나타나 도전님을 태워드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화는 도전님께서 보통 사람이 아니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대순회보』 90호, 94∼115쪽 참고)
문. 도전님께서 종통을 받으시던 당시 상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 지방 포덕 사업에 열중하시던 도전님께서 도주님을 모시게 된 시기는 1954년 무렵이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1956년에는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이 ‘도인 대표 박경호[朴景浩: 도전님의 원명(原名)]’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도전님께서는 종통을 계승하시기 이전 이미 이 무렵에 수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1957년 섣달이 되자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도전 오치국을 교체하려 하니 적임자를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도주님 재세 시에는 육원제도(六院制度)라는 것이 있었으니 곧 시봉원(侍奉院), 포정원(布正院), 호정원(護正院), 전학원(典學院), 사정원(司正院), 보정원(補正院)을 말했습니다. 그중 시봉원의 책임자가 도전(都典)이었고, 도전을 보좌하는 직책이 부전(副典)이었습니다. 당시 도전은 오치국, 부전은 이인호가 맡고 있던 터였습니다. 도전님께서 후보자로 몇 사람을 아뢰었으나 도주님께서는 “마땅치 않다.”고 하시더니, 다음 해인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 시봉원의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도주님 말씀대로 도전님께서 받으신 ‘도전’ 직책이 과거 오치국이 맡았던 ‘도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시봉원은 도주님을 시봉(侍奉)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봉원 책임자로서의 도전은 일종의 비서실장과 같이 도주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하는 직책입니다. 그러나 도전님께서 새로 받으신 ‘도전’ 직책은 종래의 도전과는 달리 도주님의 뒤를 이어 도를 이끌어나가는 ‘최고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문. 도주님께서 화천하시던 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도주님께서 도적놈이라고 세 번 외치셨다는데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답. 종통을 부정하는 몇몇 사람들은 도주님께서 도전님께 도적놈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전님께 종통을 물려주시는 상황에서 도전님을 도적놈이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도주님께서 정말로 그러하셨다면, 태극도의 수도인들이 도전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도전님을 따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주님 화천 이후 태극도의 전 수도인들은 도전님을 마치 도주님 받들 듯 잘 따랐습니다. 즉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도적놈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도주님께서는 도적놈이라고 세 번 외치셨는데, 과연 누구에게 그렇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당시의 상황을 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주님께서는 1957년 11월 21일부터 1958년 3월 3일까지 불면 불휴하시며 백일도수를 보셨습니다. 이 도수를 끝마치신 후 3월 5일에 몸이 무척 편찮아지시자 도주님께 갖은 약을 다 지어 올렸으나, 도주님께서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 내가 1분 늦게 가면 너희들은 몇 십 년을 고생한다. 나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의사 김재복(金載福)이 주사기를 가지고 오자 그것을 빼앗아 바닥에 깨뜨려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도주님께서는 3월 6일 미시(未時)에 간부 전원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도전님 한 분만 남기고 간부 전원을 방 밖에 나가 시립토록 하셨습니다.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베개와 이불의 겉을 뜯도록 하시니, 그 속에는 도인들이 모신 성금을 모아놓은 통장과 도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도주님께서는 그것을 도전님께 전해주시면서 “서러워 마라. 서러워 마라. 나 없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너는 총도전이니 앞으로 도의 모든 일을 도전령(都典令)에 의해 해 나가면 모든 도인들이 다시 만날 날이 있다. 앞에 있어도 모르고 뒤에 있어도 모르나니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도의 운영 전반을 맡아 이끌어나가도록 명을 내리셨고, 잠시 후 도주님의 목소리가 가늘어 잘 들리지 않게 되자 도주님께서는 도전님 귀를 가까이 하게 하고 근 한 시간 동안 도의 운영 사항 전반에 대해 말씀을 상세히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는,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외치셨습니다.
따라서 도주님께 도적놈이라는 꾸지람을 들은 사람들은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방 안에는 도전님만 계셨고 방 밖에는 도주님의 가족들과 태극도의 간부 전원이 서 있었습니다. 밖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훗날 도주님의 유명을 거역하고 종통을 부정하는 쪽에 섰기 때문에 도주님으로부터 도적놈이라는 꾸지람을 들을 이유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 속에 섞여 있던 협동상회 대표 세 사람은 도의 재산을 훔치고 있었으므로 도적 소리를 들을 만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전국이 전쟁터였던 우리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 거의 모두가 굶주렸습니다. 1955년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시기 위하여 쌀을 직접 들여와서 싸게 파는 싸전을 내어주셨는데, 싸전의 영업이 잘 되어 점점 커지자 도주님께서는 양곡위탁판매업체인 ‘협동상회’와 도정업체인 ‘대원산업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하셨습니다. 도주님께서는 그 책임자로 세 사람을 정해 주셨는데, 협동상회가 다른 가게보다 쌀을 더 싸게 팔다보니 발전을 거듭하여 부산시내 전체 쌀 도매상에 쌀을 댈 만큼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천과 아미동에도 협동상회의 분점을 각각 하나씩 더 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주님께서 내어주신 가게이고 또 도의 재산이니까 한 푼이라도 개인적으로 유용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쌀가게를 하다 보니 흙바닥에 쌀ㆍ콩ㆍ팥ㆍ보리 등 잡곡이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고, 흘린 것도 곡식이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어 흙 범벅 그대로 모아다가 가마니에 담아두었더니 그 분량이 매우 많았습니다. 인근 자갈치 시장의 밥장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가마니들을 싸게 사가서 흙을 골라내고 잡곡밥을 지어 지게꾼 노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세 사람은 이 가마니가 원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곡식을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니까 이것을 팔아 자신들이 임의로 사용하여도 아무런 죄가 없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한 푼 두 푼 돈을 챙기다 보니 점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급기야 협동상회의 쌀을 1말, 2말 몰래 빼내다가 팔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도의 재산에 임의로 손을 댄 사실을 알게 되신 도주님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이들을 불러 크게 꾸중을 하셨다고 합니다.
도주님께서 화천하시자 이들은 작당하여 1959년에 도의 재산인 협동상회를 ‘협화산업주식회사’로 명의를 변경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얼마 안가서 협화산업은 도의 재산으로 환원되었고 세 사람은 모두 출도 처분되었습니다.
방 밖을 보고 도적놈이라 세 번 외치신 도주님께서는 인수(人壽) 64세로 화천하시니, 이 사실과 도주님의 유명(遺命)에 의한 도전님의 종통 계승은 ‘명령전달’과 ‘공포사항’으로 전 도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명령전달
오십년공부종필이며 지기금지사월래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공포사항
지존(도주님)께옵서 무술 삼월 초육일 을미시(오후 한시 삼십칠분)에 화천하시다.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 모든 도인들은 조금도 낙심 말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에 전심할 것. 지존께서도 항상 크게 의심날 일이 있고 땀 뺄 일이 있다 하셨음.
당시에는 인쇄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줄판(속칭 가리방)이라고 하는 철판에 철필로 글을 새기고 잉크를 묻혀 찍어내었고, 이렇게 만든 문서를 도인들에게 직접 일일이 돌렸습니다. 이를 전달받은 도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도주님과 똑같이 도전님을 모시면서 도전님의 명을 받들어 나갔습니다. 이때 배포된 ‘공포사항’은 도전님의 종통 계승을 직접적으로 입증해주는 물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