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箕宿)는 28수 가운데 일곱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마지막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표범이다.01 기란 명칭은 이 별의 주성인 4개 별의 배열이 기(箕, 삼태기)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옛사람들은 기수를 동방 청룡의 꼬리가 움직여서 일으킨 바람 또는 용의 배설물로 인식했다. 이렇게 각항저방심미기의 명칭 가운데 기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용의 형상에서 별자리의 이름이 유래한다.
기수를 의인화하여 동방기수표미성군(東方箕水豹尾星君)이라 부르는데 바람을 관장한다고 여겨져 손에는 바람을 일으키는 풍륜(風輪)을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경감
기(箕) 별을 관장하는 경감(耿弇, 3-58)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경감의 자(字)는 백소(伯昭)02로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섬서성 興平 동북) 사람이다. 그의 조상들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BCE 142-87)년간에 거록(鉅鹿)에서 무릉으로 이주했다. 무릉은 무제의 능을 의미한다. 또한 능 주변에 조성된 신도시인 능읍(陵邑)을 뜻하기도 한다. 무릉은 한나라 때 조성된 제왕의 능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무제는 관리로서 2천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이들과 부호들을 이곳에 옮겨 살게 했는데 그 규모는 일만 호였다. 이를 볼 때 경감의 가문은 대대로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耿況)의 자는 협유(俠游)로 경서에 밝아 랑(郞)이 되었으며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신(新)나라를 건설한 왕망(王莽, BCE 45-CE 23)의 종제(從弟) 왕급(王伋)과 함께 안구선생(安丘先生)에게서 노자(老子)를 배웠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삭조(朔調)의 군수가 되었다. 경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詩)와 예(禮)를 익혔고 명석했다. 또한 아버지 경황이 군수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군대의 일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군수는 해당 지역의 총사령관이기도 했으므로 연말이면 산하 병졸들의 무예 수련 정도와 훈련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를 위해 교외에서 훈련의 하나로 사냥이 행해졌는데 어린 경감에게 이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또한, 군위(郡尉)가 훈련을 위해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말 타고 화살 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군대의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왕망이 패하고 경시제(更始帝)가 즉위하였을 때 그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각 구역을 관할하면서 위세와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 군수나 현령들을 걸핏하면 갈아치웠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도 왕망에 의해 군수가 되었기에 심기가 편할 수 없었다. 이때 경감의 나이가 스물하나였는데, 경시제에게 주서(奏書)를 올리고 재물을 바쳐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친에게 얘기했다. 경황은 아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경감이 부친의 상주문을 받들고 장안에 가게 하였다.
경감 일행이 송자(宋子, 하북성 趙縣)에 이르렀을 때 한단(邯鄲)에서 점을 치던 왕랑(王郞)이 혼란한 시국을 틈타 자신이 전한 성제(成帝)의 아들 자여(子輿)라고 사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경감을 따르던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그에게 말했다.
“유자여는 성제의 정통인데 그에게로 귀부(歸附)하지 않고, 멀리 어디로 갈 것입니까?”
경감이 칼을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자여는 피폐해진 도적이니 마침내는 항복한 포로가 될 뿐이오. 나는 장안으로 가서 제후들과 함께 어양(漁陽), 상곡(上谷)의 병마로 진영을 가다듬게 하고 다시 태원(太原), 대군(代郡)으로 나와 수십 일이 걸려서라도 돌격기병대(突擊騎兵隊)들을 징집하여 오합지졸들을 깔아뭉개기를 마른 나뭇가지 꺾고, 썩은 고기 잘라내듯 해버릴 것이오. 그대들이 거취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건대 전 가족이 멸망할 날이 머지 않았소.”
경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손창과 위포는 끝내 왕랑에게 투항했다. 오합지졸이란 까마귀 떼처럼 어중이떠중이 모여 있는 형편없는 군대를 일컫는 것으로 경감의 명쾌한 사태 판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혼란한 시국에서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포함한 일가족의 운명 또한 좌우하게 된다. 『전경』에도 “知天下之勢者 有天下之生氣(천하의 형세를 아는 자는 천하의 生氣가 있고), 暗天下之勢者 有天下之死氣(천하의 형세에 어두운 자는 천하의 死氣가 있게 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경감은 천하의 형세를 알았다고 할 수 있고 손창과 위포는 천하의 형세에 어두웠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감이 장안으로 가는 도중에 유수가 노노(盧奴, 하북성 趙縣)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북으로 말머리를 돌려 그를 만났다. 유수는 경감을 머물게 하면서 문하리(門下吏)로 삼았다. 경감이 호군(護軍)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군대를 징발하여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邯鄲)을 평정해보겠다고 했다. 유수가 경감의 말을 전해 듣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아이가 큰 뜻을 품고 있구먼.”
유수는 경감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나이차가 크지 않았다. 유수는 경감을 격려하며 자주 의견을 교환했다. 이로 인해 경감은 유수를 따르게 되었다. 경감은 경황에게 이 사실과 함께 유수의 공덕을 알려 그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다.
경감이 유수를 따라 북행하여 계(薊, 현재 北京 西南)에 이르렀을 때 한단으로부터 온 군대가 당도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수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세력을 팽창하고 있던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성제의 적통으로 인식하면서 사태는 결코 유수에게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유수는 남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여 관속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의 세력 분포에서 보면 후퇴는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경감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우리의 군대가 남쪽으로부터 올라왔는데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29)03은 공(公, 유수)과 동향(同鄕)인 분이고 상곡태수(上谷太守)는 저의 아버지입니다. 이 두 군(郡)에서 활 잘 쏘는 병사 만 기(騎)만 징발하면 한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수의 관속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오히려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적들의 포대기 속으로 들어간다 말인가?”
유수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유수가 경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우리의 북행(北行)을 주도할 것이다.”
이리하여 유수군의 북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유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모든 이들이 왕랑을 따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薊)의 사람들이 왕랑을 따르기로 하면서 유수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관속들도 각기 흩어졌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경감은 상곡군의 창평으로 가 아버지 경황을 찾아뵈었다. 그는 구순[寇恂, 우(牛) 별을 관장]을 팽총에게 보내 약조를 맺게 하여 돌격 기병(騎兵) 2천 기와 보병 1,000명을 거느리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 경감 자신은 경단[景丹, 필(畢) 별을 관장]과 구순을 비롯한 어양의 군대를 합군하여 남행을 개시했다.
여기서 경감은 큰 전과를 거두게 된다. 왕랑 휘하의 대장과 구경(九卿), 교위(校尉) 이하 4백여 명을 붙잡았고, 관리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수(印綬) 125개, 부절(符節) 2개를 획득하고 3만여 명을 처단했다. 이리하여 탁군(涿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한(河閒) 등의 군에 딸린 22현(縣)을 평정시키고 유수가 있던 광아(廣阿)로 향했다. 유수가 경감 일행을 맞이하고 말했다.
“어양, 상곡의 사대부들과 함께 대공(大功)을 이루어주길 바라오.”
유수는 찾아온 장수들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돌아가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했다. 또 유수는 경감의 아버지 경황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흥의후(興義侯)에 봉하면서 그 스스로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을 둘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이들은 유수를 수행하여 마침내 한단을 함락시켰다.
유수로서는 후한 창업 초기에 큰 산을 하나 넘은 것이었다. 유수에게 하북 평정을 명령했던 경시제는 유수의 세력 확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시제는 곧장 대군태수(代郡太守) 조영(趙永)을 소환했다. 경시제는 유수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이때, 경황이 조영에게 경시제의 부름에 응하지 말도록 권고하면서 그를 유수에게로 보냈다. 조영을 접견한 유수는 그에게 군의 태수직을 다시 맡도록 했다. 그러나 조영이 대군을 비운 사이 대군에서는 장엽(張曄)이 성을 장악하고 모반하였다. 게다가 흉노(匈奴), 오환(烏桓)을 불러들여 그들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무는 경감의 아우 경서(耿舒)를 복호장군(復胡將軍)에 임명하여 장엽을 공격케 했다. 이에 경서가 장엽을 격파하니 조영은 다시 태수가 되었다. 이때 오교(五校) 20만이 북쪽에서 상곡을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경황과 경서 부자가 연병하여 공격하였다. 도적들은 패하여 경계 밖으로 달아났다.
경시제는 유수에게 사신을 보내 그를 소왕(蕭王)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병력을 해산하고 공이 있는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한편으로 묘증(苗曾)을 유주목(幽州牧), 위순(韋順)을 상곡태수, 채충(蔡充)을 어양태수에 임명하여 북부지방을 통합하도록 시켰다. 이때 유수는 한단에서 머물고 있었다. 경감이 유수의 거실로 들어가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금에 경시가 실정하여 군신들은 음란하고 장수들은 기내(畿內)에서 날뛰며 귀척(貴戚)들은 도성 안에서 휘저으며 다니고 있습니다. 천자의 명이 성문을 나설 수 없을 정도가 되니 각 지역의 목(牧)이며 태수(太守)들이 제멋대로 하여 백성들은 좇을 바를 알지 못하고 벼슬아치들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도적들이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재물을 가진 자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마음으로 다시금 왕망의 신나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동마(銅馬), 적미(赤眉) 같은 도적들도 그 무리가 수십만에 달하지만, 성공(聖公, 유수)께서는 그 정도의 군사도 이르지 못하시니 파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공께서는 앞서 남양에서 거사하여 백만 대군을 깨뜨리셨으니 이제 하북을 평정하신다면 천부의 땅을 수중에 넣는 셈입니다. 의로써 평정하는 것임에 외침이 있으면 응하는 소리가 있을 터, 천하라도 능히 격문을 돌려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는 지중(至重)하므로 유씨가 아닌 타성(他姓)으로 하여 얻게 해서는 안됩니다. 듣자하니 사신이 서방(西方)으로부터 와 병사를 해산하도록 한 것 같은데 따르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은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어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제가 유주로 돌아가 정병을 크게 징발한 뒤에 대계(大計)를 논의했으면 합니다.”
경감의 주장은 경시제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시제의 요구대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은 허사가 된다. 그러나, 소환 요구에 불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의 아군 모두를 잠재적인 적군으로 돌리게 된다. 유수에게 선택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경감의 말에 유수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대장군으로 삼아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과 함께 유주 산하 10군의 병력을 징발토록 하였다. 반면에 경시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아직 ‘하북 평정’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유수는 이로써 독자 세력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유수의 명으로 경감이 상곡에 당도하여 위순과 채충을 처단하고 오한은 묘증을 처단했다. 이리하여 유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병력을 모두 징발할 수 있었다. 경감과 오한은 징발된 병력을 이끌고 유수를 도와 동마, 고호(高湖), 적미, 청독(靑犢)을 격파하고 또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을 추격하였다. 이때 경감은 항상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군의 선봉이 되어 적들을 퇴각시키곤 했다. 유수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근처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사지(死地)에 몰린 도적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되니 승부는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유수의 군사들은 계속된 싸움과 추격전으로 매우 지쳐 있었으므로 마침내 유수군은 대패하였다. 전세는 역전되어 도적들에게 유수군이 몰리게 되었다. 후퇴하던 유수군은 범양(范陽)에 보루를 쌓고 휴식을 취하였다. 며칠이 지나 휴식을 취한 군대의 사기가 진작되었는데 도적들이 때마침 퇴각하고 있어 다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유수군은 용성(容城), 소광양(小廣陽), 안차(安次)에 이르러 연일 싸운 끝에 마침내 도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유수가 계(薊)로 돌아온 후에 다시 경감과 오한, 경단, 합연(蓋延), 주우(朱祐), 비융(邳肜),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좨준(祭遵), 견담(堅鐔), 왕패(王覇), 진준(陳俊), 마무(馬武) 등 13장군을 보내 도적들을 로수(潞水, 山西省을 흐르는 濁漳水의 옛이름)의 동쪽까지 추격하도록 했는데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싸워 1만 3천을 처단했다. 최종적으로는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현(無終縣)과 토은현(土垠縣) 사이에 이르러 추격을 종료했다. 이렇게 해서 도적들의 주력은 괴멸되었고 나머지 잔당들은 흩어져 요서(遼西), 요동(遼東), 심지어는 오환(烏桓)이나 맥(貊)04까지 들어갔는데 그 지방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02 남자가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할만한 나이가 되면 성인식이라 할 관례(冠禮)를 치름과 함께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얻게 된다. 자는 이름의 대용물로서 가까운 친구 간이나 이웃에서 허물없이 부르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어른 아닌 사람들이 이 자를 불렀다. 그리고 자를 보면 형제간의 서열을 알 수 있다. 백중숙계(伯仲叔季)가 그것인데 백(伯)은 맏이를 의미한다. 경감은 경황의 장자였다.
03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년(건무2)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