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도주님 탄강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간지로는 1895년 을미년으로부터 60갑자가 두 번 돌았기 때문에 역시 같은 을미년이 되었다. 60년이 흘러야만 다시 맞이할 수 있는 을미년이라는 점에서, 『전경』 다시 읽기는 도주님과 관련된 교운 2장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 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 (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ㆍ창녕ㆍ남지에 이르러 천계산ㆍ안국산ㆍ여항산ㆍ삼족산ㆍ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ㆍ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교운 2장 1절)
을미년(乙未年) 一
도주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시기에 상제님의 천지공사기인 『전경』은 하나의 장을 통째로 도주님의 일생에 할애하고 있을까?
입도를 하게 되면 대개 ‘구천상제’님에 대한 교화를 시작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물론 각자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도주님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교화를 듣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화를 듣는 중에도 현실적으로 도주님에 대한 기술이 상제님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적기 때문에 도주님에 대해 많은 궁금함을 느끼지만, 또한 그만큼 관심이 줄어들 소지가 생기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도(道)의 주인(主人)이신 도주(道主)님을 모르고서는 결코 도에 다가갈 수가 없다. 도전님께서는 “우리가 상제님 한 분 만을 믿는 곳이라면 진리는 없다. … 도주님을 모르는 곳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진리가 없는 것이다. 도주님을 모르면 상제님을 옛날에 훌륭했던 분이라고 그냥 믿는데 그친다.”01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상제님을 따르던 많은 종도들이 있었고 또 각자가 많은 교단을 세웠으나, 현재 지리멸렬되고 앞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이유를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재세 시에 직접 근거리에서 상제님을 모셨음에도 상제님을 ‘선생’, ‘천사’로 호칭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전혀 상제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이와 반대로 도주님께서는 상제님과 아예 만나신 적이 없으셨지만, 상제님으로부터 계시로써 종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라고 밝힐 수 있으셨던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또한 “상제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다. 도주님이 오셔야 한다. 상제님·도주님 두 분 법이라야 한다.”02라고 훈시하셨다. 우리가 대순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에 대해 반드시 알고 믿어야만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상제님께서도 재세 시에 종도들에게 당신께서 모든 일을 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라고 하신 것이다.03 이 말씀은 당신의 뒤를 이어 이 땅에 도를 펼치고 도통의 진법을 완성하는 종통 계승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일은 판밖에 있다.’고 하셔서 그 종통 계승자가 당시 종도들 중 한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암시해 주시기도 하셨다. 이를 당시의 종도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상제님께서 예시하신 진인(眞人), 즉 종통 계승자는 을미생(1895년생)이셨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직접 밝히신 것이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은 1903년에 있었던 다음의 일화인데 『전경』에는 없지만 1979년 초판이 발행된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는 수록되어 있다. 『전경』에 빠진 내용이 『증산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보강된 것이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은 도전님께서 “상제님의 강세와 화천까지의 행록 및 사상이 밝게 수록되었으니 『전경』과 동일하게 중요시 되는 바 의무적으로 보존토록 하라.”04고 하신 책이다.
계묘(1903)년 어느 날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하고 한숨을 쉬시자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종도 김보경이 그 연유를 여쭈었다. 상제님께서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셨고, 이에 김보경은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는 모두 무용지물 같습니다. 지금까지 따른 것이 모두 헛된 일입니다.”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사건이 있었다.
종도들은 자신들이 지금 당장 도통을 받고 진인이 되며 후천을 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제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박탈감과 상실감이 컸던 것이다. 이를 두고 상제님께서는 성급한 마음을 갖지 말도록 타이르시며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其時 人有其人: 때에도 그 때라는 게 있고 사람도 그 사람이란 게 있다)’이라는 글을 써 주셨다고 한다.05 상제님의 뒤를 이을 진인이 1903년에 아홉 살이라면, 진인은 1895년 을미년에 태어나야 한다. 몇몇 종도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진 이 일화는 진인이 을미생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일화는 소설가 정현웅이 종도들의 구전을 모아 상제님의 전기로 구성한 『小說 강증산』에도 수록되어 있다.06 비록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전을 근거로 한 평전에 가까운 소설임을 감안한다면 이 일화는 우리만 알고 있는 진실은 아닌 것이다.
또 다른 일화는 상제님께서 기유(1909)년 4월 28일에 김보경 등의 종도들을 데리고 대전 신탄진으로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들판에 놓인 철로 주변을 한참 서성이시다가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하시니, 종도들이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시는지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으시다가 얼마 후 남쪽으로부터 기차 한 대가 힘차게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이제 나의 일을 다 이루었도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라고 말씀하셨다.
호패(號牌/戶牌)란 조선시대에 인구와 호수를 파악하고 직업과 계급 같은 신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관청에서 지급해주던 패인데, 당시 민간에는 ‘사내 나이 열다섯이면 호패를 찬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왔다. 상제님께서는 바로 이 속담을 인용하시며 15세를 맞이한 어떤 한 인물이 그 기차에 타고 있으며 그가 당신의 종통을 이으실 것을 암시하셨다. 기차에는 을미생으로서 15세이셨던 도주님이 타고 계셨다. 당시 도주님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이 위험에 처함에 따라 가솔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시던 길이었다.
이 일화는 앞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상제님의 뒤를 계승하실 종통 계승자가 을미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종도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 사실을 기록으로는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증산교단의 한 일파가 이 구전 일화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자신들의 경전에 실었다가 나중에 삭제했던 일을 통해 우리는 진실이 감추어질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07
또 상제님께서는 화천(化天) 직전, 누이였던 선돌부인에게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올 것을 예언하시고 봉서(封書) 하나를 맡기시며 꼭 전하도록 당부하신 일화도 있다. 선돌부인을 통해 밝혀진 후 구전되어 『전경』에까지 수록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상제님께서 을미생의 진주(眞主)가 정월 보름에 상제님의 봉서를 전해 받을 것임을 예시하셨음을 알 수 있다. 봉서는 진주(眞主)에게 꼭 전해져야 하는 최중(最重)의 것이었기에 선돌부인에게만 말씀하셨다. 따라서 선돌부인의 증언 외에 이와 관련된 문헌 자료는 없다. 하지만 선돌부인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줄 정황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상제님 화천 후 상제님을 믿는 무리가 여기저기 들불처럼 일어나자 어떤 이들이 선돌부인에게서 상제님이 남기신 징표를 얻고자 했던 일이다. 이들은 상제님께서 재세 시 직접 선돌부인에게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거처를 따로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과 선돌부인이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소문에 선돌부인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하신 바가 계셨다. “정읍 마동(馬洞)에서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받으실 때, 후에 소태산(少太山)[박중빈(朴重彬):1891∼1943 원불교 교조]의 제자가 된 이가 먼저 와 있었다. 종통의 봉서를 받으려고 했으나 주인이 아니므로 받지 못했다. 마동(馬洞)의 마(馬)는 조씨(趙氏)를 말함이다.”08 이와 관련해서는 관련 구절에서 더욱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고 귀국하신 도주님께서는 기미(1919)년 정월 보름에 선돌부인을 찾아가셨고, 선돌부인은 10년의 기다림 끝에 상제님께서 전해주도록 하셨던 봉서를 을미생인 도주님께 무사히 올리게 되었다. 이처럼 상제님께서는 향후 종통을 세우실 진인이 을미생임을 누차 암시하고 예시하셨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01 도전님 훈시(1984.12.16)
02 도전님 훈시(1989.4.12)
03 『전경』 교운 1장 41절
04 도전님 훈시(1979.1.29)
05 『증산의 생애와 사상』,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79, pp.103-104. 이 일화는 종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06 정현웅, 『小說 강증산』, 서울: 문학출판공사, 1986, p.84 참조.
07 『증산도 도전』 2쇄,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1996, pp.505-506 참조. 『증산도 도전』 3쇄판에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