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상생의 핵심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요람』에 “남을 잘 되게 함은 상생대도의 기본원리요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이라.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성사에는 타인과의 힘을 합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가져 협동생활에 일치협력이 되게 하라.”01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상생대도(相生大道)’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대립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돕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마음이다. 상부상조는 여주본부도장 정각원 2층의 실내벽화처럼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논에 모를 심듯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서로 돕고 화합하여 이뤄나가는 것이다. 혁신(革新)은 자기를 반성하며 새롭게 해나가는 것이다. 이때 자기 반성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잘못한 것은 버리거나 바꾸고 잘한 것은 발전시켜 새롭게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몰라서, 혹은 잘못 배워서 행한 과오(過誤)가 있으면 깊은 반성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전경』 에 상제님께서 “망하려는 세간살이를 아낌없이 버리고 새로운 배포를 차리라. 만일 애석히 여겨 붙들고 놓지 않으면 따라서 몸마저 망하게 되리니 잘 깨달아라.”02라고 하셨다. 이 말씀처럼 혁신은 망하려는 세간살이에 미련을 두지 않듯이 과오를 과감히 버린 채 새로운 배포를 가지는 것이다. 21세기는 모든 분야에서 자기 혁신을 요구하지만, 양극화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지식사회, 정보사회, 창조사회, 그리고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직장인은 스스로 변화 혁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기 계발을 통한 자기 혁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개인의 성과창출(成果創出)과 나아가 조직의 이윤(利潤)을 위한 것일 뿐, 도덕적인 자기 반성과 남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자기 계발·자기 혁신과 같은 기치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로 서로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서로가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싸우다 보니 전체가 손해를 보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남을 잘 되게 하는 해원상생에 의한 자기 혁신이다. 해원상생에 의한 자기 혁신은 지극한 공심(公心)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도전님께서는 “해원상생으로 혁신하여 척을 짓지 말자!”라고 하셨다. 이는 척을 짓지 않으려면 해원상생에 의한 자기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남을 잘 되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혁신하면 척을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종단사업을 행할 때 선후각의 연운, 개인과 방면, 개인과 종단 관계에서 개인의 성과를 위한 사심(私心)보다는 상대방과 방면 그리고 전체를 위한 이타(利他)적인 지극한 공심(公心)에 의할 때에는 척은 발동할 수 없다. 그래서 『대순지침』에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道心)이니,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私心)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03고 했다. 이때의 ‘공심(公心)은 곧 도심(道心)’인 것이다. 따라서 지극한 공심은 해원상생의 마음이라 할 수 있고 그 공심으로 자기를 혁신할 때 척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원상생에 의한 자기 혁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자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자기와 상호 존중, 화합이다. 첫째, 무자기는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도통을 이루는 바탕이다. 무자기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달리 표현하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하늘의 품성인 양심(良心)을 간직하는 것이다. 양심은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양심이 있으면 사욕은 발동하지 않기 때문에, 편벽(偏僻)됨이나 사사(私邪)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자기(無自欺)는 인간과 사회를 정화(淨化)하여 개혁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또한, 무자기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소원인 도통(道通)을 이루게 해주는 원천(源泉)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부터 실천하는 자기 혁신을 통하여 사회가 변하고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상호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경하여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 소중함을 인식했을 때 거기에 맞는 예(禮)를 다 할 수 있다. 예(禮)라는 것이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起居動靜)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04이기 때문에 상호존중에는 예법과 도리에 합당하게 처신 처세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이든 가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의견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 상제님께서도 공사를 처결하실 때 반드시 종도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셨고, 의사(意思)를 물어보시고 행하셨으며,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물어보셨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평화사상은 전 천하(全天下)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화목(和睦)하고, 화합(和合)해야 하며, 그 속에서 단결(團結)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도인뿐만 아닌, 전 사회와 화합하고 조화하라는 것이다. 과거 도인(道人)이라 하면 흔히 사회와는 유리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수도는 내면세계의 완성과 더불어 밖으로 개인과 사회와의 조화로운 공존도 포함하는 것이다. 도인들이 사회와 화합하고 조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해원상생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해원상생은 인간과 인간을 넘어 인간과 신명과의 불통까지도 해결하려는 우주적 평화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도를 통한 인격완성으로 사회, 국가, 세계를 향해 전 우주적 평화사상을 펼쳐야 한다. 우리는 단절이 아닌 조화(調和)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개벽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모두에게 해원상생에 의한 자기 혁신(革新)이 요구되는 때이다. 해원상생의 원리는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종교·정치·사회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副應)하기 위한 선결(先決)과제가 해원상생의 원리에 의한 자기 혁신이다. 이러한 자기혁신은 반드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지극한 공심(公心)을 유지하는 데 있다. 과거의 구태의연했던 수도생활이 있었다면 그것을 깊이 자성(自省)하고 진정(眞正)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마음을 가져 일상의 모든 곳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실천 자세가 앞에서 언급한 무자기, 상호 존중, 화합이다. 이것이 해원상생의 원리이고 그 속에 각자는 자기 혁신을 통해 진정으로 바라는 바의 ‘소망(所望)’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