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께서 갑진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 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상제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 도삼을 불러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弔無人)”이니라. (권지 1장 28절)
엄자릉(嚴子陵, 기원전 37-서기 43년)의 본성(本姓)은 장(莊) 씨이며, 후한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으로 자는 자릉(子陵)이고 명(名)은 광(光) 또는 준(遵)이다. 젊어서부터 명성이 높았으며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기원전 6-서기 57년) 유수(劉秀)와도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즉위하자 자신의 성을 엄(嚴)으로 개성(改姓)01하여 은거하였다. 광무제는 그를 현자(賢者)라고 생각하였기에 전국 방방곡곡을 수소문하여 찾았다. 어느 날 제국(齊國)에서 한 남자가 양가죽 옷을 걸친 채 연못에서 낚시질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광무제는 그가 바로 엄자릉이라 생각하고 수레와 귀한 예물을 보내 궁으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엄자릉은 세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응하였다. 엄자릉이 도성에 도착하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도(司徒) 후패(侯覇, ?-서기 37)가 자신의 처소에서 그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이에 엄자릉은 “천자가 나를 부를 때도 세 번 만에야 갔었소. 군주조차도 나를 만나지 못하거늘 나더러 신하를 만나란 말이오?”라고 말하며 답장도 쓰지 않고 입으로 불러 주었다. 심부름 온 신하가 내용이 적다며 더 보태라고 하자 “채소 사러 왔소? 더 달라고 하게?”라고 하며 보냈다. 이에 후패가 그 서찰을 보고 광무제에게 보여드렸다. 광무제는 웃으며 “미친놈이 예전 그대로구먼!”이라고 하고는 바로 수레를 타고 엄자릉의 처소로 출행하였다. 광무제는 누워 있는 엄자릉에게 옛 친구처럼 배를 어루만지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엄자릉은 “옛날에 요(堯) 임금은 그렇듯 덕행이 있었지만 소부(巢父)02는 요가 자기에게 자리를 선양하려 한다는 말을 듣자 즉시 냇가에 가서 귀를 씻었습니다. 선비에게는 자고로 지조가 있으니 어찌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거절하였다. 광무제는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을 탄식하며 다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광무제는 엄자릉을 불러들여 옛날 일을 언급하며 며칠 동안 함께 누워 자기도 하였다. 여전히 옛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냈으나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려 하자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다시 은거하였다. 건무(建武) 17(서기 41)년에 다시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기 43년 80세에 집에서 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낚시하던 곳을 엄릉뢰(嚴陵瀨) 또는 엄릉조대(嚴陵釣臺)라 한다.03
▲ 엄능조대(출처: Wikiwand)
▲ 엄자릉 낚시터(엄릉뢰) (출처: 바이두)
엄자릉은 주로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후한서(後漢書)』, 『고사전(高士傳)』,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는 이야기나, ‘엄자릉 묘기’를 통해 그에 대해 알 수 있다. ‘엄자릉 묘기’는 『고문진보』04 후집에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엄주(嚴州)의 태수였을 때 엄자릉의 사당을 짓고 그 후손을 불러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지은 글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광무제의 친구였다. 둘이는 서로 도의(道義)로써 존경하였다. 황제의 적부(赤符)를 장악하고 여섯 마리의 용을 타고 성인(聖人)으로서의 때를 얻어 억조창생을 다스렸으니, 천하에 고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선생만은 절개로써 스스로를 높였다. 별자리의 모양을 움직이고서 강호로 돌아와, 성인의 맑음을 얻어 대관(大官)의 수레나 면류관을 진흙처럼 여겼으니, 천하에 이보다 더 고고한 것이 있겠는가? 오직 광무제만은 예의로써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다. 『역경』 고괘(蠱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뜻있는 일을 하고 있으나 홀로 ‘왕후(王侯)에게 종사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고결하게 한다.’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그 말을 실천하셨다. 『역경』 둔괘(屯卦) 초구(初九)의 효사에는 밝은 덕이 마침 통달되어, ‘귀한 몸으로 비천한 곳까지 자기 스스로를 낮출 수 있으면 크게 민심을 얻는다.’ 하였는데 광무제는 그 말을 실천하셨다. 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보다도 높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바깥까지도 감싸 안을 만하구나! 선생이 아니라면 광무제의 위대함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광무제가 아니라면 어찌 선생의 고결함이 이룩되었겠는가? 탐욕스러운 사람을 결렴(潔廉)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니, 명분과 교화에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다. 나 주엄이 이곳 엄주(嚴州)의 태수로 와서, 이제야 비로소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노라. 그리고 선생의 후예인 네 집안의 조세를 면제해 주어 선생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구름 위에 솟은 산 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네. 선생의 덕풍(德風)은 산같이 높고 물처럼 영원하네.”05
이처럼 엄자릉 묘기는 범중엄이 그의 고결한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06 이로 보았을 때 상제님께서 묘기(廟記)를 제문(祭文)이라 하신 이유가 제문이 천지신명(天地神明)이나 죽은 사람을 제사지낼 때 쓰는 글로써 죽은 사람을 추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07 범중엄 외에도 엄자릉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송나라 시인 마존(馬存, ?~1096)이 지은 ‘호호가(浩浩歌)’에서는 어느 날 밤 엄자릉이 황제와 같이 잠을 자다가 황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간밤에 천상(天像)을 보았는데 객성(客星)이 북극성을 범하였다며 걱정하였다. 이에 황제는 웃으며 친구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 내용이다. 작자는 이 시를 통해 엄자릉과 같이 외물(外物)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호연(浩然)히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원나라 산곡(散曲)08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원나라 산곡은 주로 세상을 개탄하면서 은거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 이유는 원나라 때 과거 제도가 없어져 하급 관료로 전락해서 불우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문인들이 제왕의 덧없는 교체와 벼슬길의 험난함을 체험하고는 정치에 대해 혐오하며 도피하는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곡의 작가들은 엄자릉과 도연명(陶淵明, 365~427)처럼 부귀를 탐내지 않는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찬탄하였다.09 이러한 영향이 조선시대에도 미쳤으며, 자연스런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엄자릉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조선 후기 박인로(朴仁老, 1561~1642)가 지은 노계가(蘆溪歌)나 독락당(獨樂堂), 조선 후기 작자미상의 사친가(思親歌), 작자·연대 미상의 창랑곡(滄浪曲) 등이 있다.10 특히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엄자릉이 지향하는 세계와 광무제가 주도하는 현실이 서로 대립하였기에 함께할 수 없었으며, 그러한 엄자릉을 성인의 도를 추구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