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虛宿)는 28수 가운데 열한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네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2개로 동물은 쥐[鼠]이다.01 허수의 속성(屬性)은 일(日)로 별자리의 이름[虛]은 천상의 폐허(廢墟)를 취한 것이다. 허수를 의인화하여 북방허일서성군(北方虛日鼠星君)이라 하는데 쥐의 머리에 사람의 몸, 허리에는 장검을 찬 모습으로 표현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잠팽
잠팽(岑彭, ?-35)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잠팽의 자(字)는 군연(君然)으로 남양(南陽) 극양[棘陽, 현재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남쪽] 사람이다. 잠팽은 왕망(王莽)의 신(新, 8-23)나라 때에 극양현의 장이었다. 그런데 선양(禪讓)이라는 궁정쿠데타를 통해 전한(前漢)을 타도한 왕망의 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국의 혼란은 왕망의 급진적이고 복고적인 개혁정책이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촉발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의 후예들인 남양(南陽)의 유씨(劉氏)들이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이에 가세했다. 23년 반란 세력들 가운데 일단의 세력들이 남양 유씨들과 결합하여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을 옹립하였다. 이때 후한의 창업자 유수는 그의 형인 유연(劉縯)과 함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경시제의 군사들이 극양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잠팽은 가족을 이끌고 전대(前隊)의 대부(大夫)인 견부(甄阜)에게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견부는 잠팽이 극양현을 굳건히 지키지 못한 것에 분노하였다. 그는 잠팽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었다. 그 후 견부는 잠팽이 공훈을 세우지 못하면 그의 가족들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자신의 가족이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잠팽은 그를 따르는 빈객(賓客)들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서 견부는 전사하고 잠팽은 부상을 당한 채 완(宛) 땅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에서 잠팽은 전대 견부의 부장인 엄열(嚴說)과 함께 성을 지켰다. 그러나 완성 또한 공격당한지 수개월이 지나자 성안의 곡식이 바닥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 내부가 최악의 상황에서 다다르자 잠팽은 엄열과 함께 항복했다.
경시제의 여러 장수들은 잠팽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팽의 필사적인 저항에 경시제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사도(大司徒)인 유연이 이 의견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잠팽은 군(郡)의 고위 관리로서 온 마음을 다해 성을 견고히 지킨 것이니 이는 그의 절개입니다. 지금 큰일을 하시려면 마땅히 의로운 선비들을 표창하셔야 합니다. 그에게 작위를 주어 후인(後人)들이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시제는 유연의 간언을 받아들여 잠팽을 귀덕후(歸德侯)에 봉하고 유연의 휘하에 배속시켰다. 그런데 잠팽이 유연의 휘하로 배속된 이후에 유연이 처형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유현이 경시제가 된 것은 당시의 복잡한 정세가 작동한 결과였다. 왕망의 실정으로 촉발된 혼란으로 당시의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다. 일단의 반란 세력이 남양의 유씨들과 연합하여 유현을 경시제로 옹립하게 된 것은 당시의 민심으로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유현은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돌파할 만한 역량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경시제를 옹립한 이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인물을 황제로 선택한 것이다.
유수의 친형 유연은 그런 경시제에게는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다. 경시제가 유연을 처형한 것은 그가 특별한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라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수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것도 소용없었다. 곤양대전은 중국 전쟁사에서도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2만 대군을 물리친다. 왕망 패망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수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하지만 유연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경시제는 이 또한 탐탁치 않았다. 유연도 껄끄러운데 그의 동생 유수까지 상상도 못할 역사적인 대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경시제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경시제는 유연의 휘하 장수의 작은 과실을 빌미로 그를 처단했다. 유연의 처단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평소 사소한 일도 결정을 미루는 일이 잦았던 경시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유연에 대한 경시제의 두려움이 컸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된다.
유수는 곧장 형의 잘못을 사죄했다. 전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던 간에 실권을 쥔 쪽은 경시제였기 때문이다. 경시제의 입장에서 만약 유수가 형의 죽음이 잘못된 일이라고 반발했다면 그것을 구실로 유수를 처단하면 되었다. 하지만 도리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는 데에 경시제는 유수를 책망할 수 없었다. 경시제는 유수를 행대사마(行大司馬)에 임명하고 작은 병력을 붙여 하북(河北)을 평정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수는 작지만 자신만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유수의 하북 파견은 경시제로서는 실책이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이를 감지한 대사마 주유(朱鮪)02가 유수의 하북 파견에 반대했지만 경시제는 듣지 않았다.
잠팽은 유연이 처형되자 다시 대사마 주유에게 배속되어 교위(校尉)가 되었다. 잠팽은 주유를 수행하여 왕망 휘하의 양주목(楊州牧)인 이성(李聖)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 회양성(淮陽城)을 평정했다. 회양성 평정 이후 잠팽은 주유의 추천으로 회양도위(淮陽都尉)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경시제가 입위왕(立威王) 장앙(張卬)과 장군 요위(徭偉)를 파견하여 회양땅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요위가 반란을 일으켜 장앙을 공격하고 달아나니 잠팽이 병사를 이끌고 요위를 쳐서 격파했다. 그 후에 잠팽은 영천태수(潁川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잠팽은 영천에 부임할 수 없었다. 때마침 용릉(舂陵) 땅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영천 지역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잠팽은 영천태수로 갈 수 없게 되자 휘하 수백 인과 더불어 하내(河內) 태수인 한흠(韓歆)을 좇았다. 이때에 하북 평정의 임무를 띠고 있었던 유수가 하내 지역을 순시하던 중이었다. 유수는 이미 경시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한흠이 이를 알고 성을 고수하고자 논의하였다. 잠팽이 만류했지만 한흠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의 군대가 회 땅에 이르자 한흠은 황급히 달려나가 그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유수는 한흠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받고 크게 노했다. 유수는 한흠을 처형하고자 그를 북 아래 매어 두었다. 당시 진영의 배치를 보면 총사령관이 머무는 중군에 깃발과 북을 설치했다. 군중에서의 처형은 이 깃발과 북 아래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북 아래 매놓았다는 것 자체로 한흠의 처형은 시간 문제였다. 긴박한 순간에 잠팽이 유수에게 말했다.
“오늘날 적미(赤眉)는 관문(關門) 안으로 쳐들어오고, 경시는 위태로우며 권신들은 제멋대로 날뛰며 군웅들은 패권을 다투니 백성들이 목숨을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하북을 평정하사 왕업을 여셨다는 소식을 접하니 이는 진실로 하늘이 한나라를 보살피신 것이며 선비들의 복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도 대사도 백승공에 의해 목숨을 보전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덕을 갚기도 전에 백승께서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저의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대왕의 은덕을 입게 되었으니 저의 목숨을 다 바쳐 대왕을 보필하겠습니다.”
곧 이어서 잠팽은 한흠이 남양에서 세력을 떨치는 집안의 사람으로 등용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니 유수가 한흠을 용서하고 등우(鄧禹)의 군사(軍師)로 삼았다.
이때 경시의 대장군인 여식(呂植)이 군대를 거느리고 기원(淇園)에 주둔해 있었는데 잠팽이 유세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이후 잠팽은 자간(刺姦)대장군에 임명되어 군대를 감독하게 되었으며 항상 부절을 지니고 유수를 수행하여 하북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광무제의 즉위와 잠팽의 맹활약
하북을 평정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 유수는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유수가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세력면에서 보면 여느 유력 집단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광무제가 즉위한 뒤 잠팽을 정위(廷尉)에 임명하고 예전처럼 귀덕후로 대장군의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잠팽은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 대사공(大司空) 왕양(王梁), 건의(建義)대장군 주우(朱祐), 우장군(右將軍) 만수(萬脩), 집금오(集金吾) 가복(賈復), 효기(驍騎)장군 유식(劉植), 양화(揚化)장군 견담(堅鐔), 적야(積射)장군 후진(侯進),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 좨준(祭遵), 왕패(王覇) 등과 함께 낙양을 포위하여 수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주유가 낙양성을 굳게 지킨 채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광무제는 일찍이 잠팽이 주유의 교위(校尉)였던 까닭에 그에게 주유를 설득하도록 했다.
주유는 낙양성 위에서 있고 잠팽은 아래에서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평소처럼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서로의 말이 오고가던 중에 잠팽이 항복을 권하며 말했다.
“저는 이전에 장군을 모시다가 장군의 추천으로 발탁되었으므로 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정세를 보면 적미(赤眉)가 이미 장안을 점거했고 경시는 삼왕(三王)의 반란을 만났는데 이제 광무제께서 천명을 받으셔서 연(燕) 땅과 조(趙) 땅을 평정하시고 유(幽)와 기(冀)의 땅을 차지하시니, 백성들이 마음으로 귀의하고 천하의 준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께서 대군을 이끌고 친히 낙양에 오신 것입니다. 앞으로 천하의 일은 이 형세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공께서 비록 성을 굳게 지키시나 장차 무엇을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유가 대답했다.
“대사도 백승(伯升, 광무제의 친형 유연)이 해를 당할 때 내가 그 모의에 관여했고 또 경시께도 소왕(蕭王, 광무제)을 북벌하러 보내지 마시라고 간언했었으니 진실로 나의 죄가 깊음을 스스로 알고 있소.”
잠팽이 돌아와서 광무제에게 주유의 고민을 소상히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루려는 자는 작은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소. 주유가 만일 지금 항복해 온다면 벼슬과 작위를 내려 보호해 줄 것이거늘 하물며 벌을 내리겠는가. 하수(河水)가 여기에 있으니 네 하수를 두고 맹세하오. 나는 식언(食言)을 하지 않소.”
주유는 스스로 밝힌 대로 광무제와 악연이 있다. 그 하나는 유수의 친형 유연이 처형될 때에 그 모의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9세에 부모를 잃고 숙부인 유량(劉良)의 슬하에서 자란 유수에게 친형 유연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또한 경시제가 유수에게 병력을 붙여 하북 평정을 보내려고 할 때 주유는 그 위험을 감지하고 반대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만약 이때 경시제가 주유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수가 하북에 파견되지 못했다면 후한 건국의 첫 번째 과정부터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주유에게는 항복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광무제는 이 모두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했다. 황하를 두고 맹세한다고까지 한 것이다. 잠팽이 다시 주유에게 가서 광무제의 말을 전하니 주유가 성 위에서 밧줄을 내려 보내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정녕 믿을 만한 것이라면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오시오.”
잠팽이 밧줄 있는 곳으로 지체하지 않고 성벽을 오르려 하니 주유가 그의 성의를 보고 곧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닷새 후 주유는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잠팽에게 항복하였다. 그 전에 주유는 각 부서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제장들은 굳건히 성을 지키면서 나를 기다리라. 내가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환원(轘轅)의 언왕(郾王)에게 가도록 하라.”
주유는 항복의 표시로 손을 뒤로 묶고 잠팽과 함께 광무제의 행재소가 있던 하양(河陽)으로 왔다. 광무제는 주유를 보고 곧바로 포박을 풀게 하고 그를 만났다. 이후 광무제는 그날 밤 즉시 주유를 낙양성으로 돌려보냈다. 이튿날 아침 주유가 낙양성의 전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광무제에 항복하였다. 광무제는 이미 약속한 대로 주유를 평적(平狄)장군에 임명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했다. (다음편에 계속)
02 회양(淮陽, 현재 하남성 회양)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기에 왕광(王匡)과 더불어 녹림산(綠林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22년 군대를 나누어 남양을 공격하면서 신시병(新市兵)이라 칭했다. 경시제가 즉위하고 난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이일(李軼)과 함께 관동(關東)을 진압하고 낙양을 지키며, 당시 경시제와 다른 독자세력화의 길을 걷던 유수에 대항했다. 25년 유수에 항복하여 평적(平狄)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후에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寶貨 · 음식을 관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작위는 후대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