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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종교에 관한 톨스토이의 생각

좋은 글

by 벼리맘1 2023. 3. 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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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나는 톨스토이의 《참회록My Confession》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에 대해 느낀 바를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약간은 감성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삶의 어느 시점에 도달한 톨스토이는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 다음은?' '왜?'와 같은 질문을 만나게 된다.

 

내게는 사마라에 6천 헥타르가 넘는 땅이 있고 3천 마리의 말이 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게다가 나는 고골리Gogol 푸슈킨Pushkin

셰익스피어Shakespeare 몰리에르Molie're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은?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자 톨스토이는 화가 났다.

 

그것도 매우.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는 삶은 부질없다.'

 

그는 이런 자각을 우화로 설명했다.

 

동방을 여행하던 한 나그네가 '성난 야수'를 피해 우물 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우물 바닥에는 용이 있었다.

 

야수와 용 사이에 낀 나그네는

벽 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더한 일이 벌어졌다.

 

흰색과 검은색의 두 마리 쥐가 나타나 나뭇가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곧 나뭇가지는 부러질 것이고

그러면 나그네는 바닥에 떨어져 용의 밥이 될 운명이었다.

 

나그네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게 절망 속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잎사귀 위로 꿀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본다.

 

나그네는 혀를 내밀어 잎사귀에 묻은 꿀을 핥아먹는다.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용이 기다리는 가운데

삶이라는 유한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인간을 말한 것이다.

 

한때는 달았던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지 않은 꿀을 핥으려 애쓰는 것이 삶이다.

 

그리고 희고 검은 쥐는 각각 나그네가

매달린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 낮과 밤이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우화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이 진실되고 모두가 아는 진리'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앎을 기반으로

일련의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종의 깨달음인 것 같다.

 

톨스토이의 깨달음 중 하나는 최소한 그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에 가서 그가 만나게 될 추상적인 가능성도 아니요

이성이 아닌 처절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엄준한 현실이다.

 

그래서 꿀은 이제 더 이상 달지 않은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

 

톨스토이를 번뇌하게 한 것은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다.

 

가족도 결국 병들고 시간이 가면 죽을 것이며

'썩고 냄새나는' 시신만 남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비생물학적 유산인 일에 대한 질문도 있다.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들은 '영원의 관점으로 응시하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실제로 영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충분히 장기적인 시각이면 된다.

 

영원의 관점 혹은 충분히 장기적인 시각으로 응시하면

톨스토이가 존재했던 모든 흔적은 지워질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그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과

그의 업적도 긴 잠 속으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예술적 유산으로 말하자면 그는 위대한 대문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몇 백 년이 더 흐른 후에 어떻게 될지는 어찌 알 것인가?

 

몇 천 년이 지나면 더더욱 모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 해도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눈 깜짝할 사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소멸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고 톨스토이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사람이 자신의 업적을 통해

살아남는 '객관적 불멸'의 개념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객관적 미룸'이 어쩌면 더 나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저 불가피한 것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다음은? 왜?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이다.

 

그는 내세를 약속하는 신앙에서 위안을 구했다.

 

신앙은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고 영원한 것과 연결시킨다.

 

'믿음이 내게 주는 대답이 무엇이든 모든 대답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에게

고통 박탈 죽음으로 파괴될 수 없는 무한이라는 개념을 준다.

따라서 신앙 속에서만 우리는 삶의 의미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삶을 바라보는 종교적 표현 중 하나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다 이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인 가르침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현세의 가치는 내세의 좋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현세는 도구적 가치만 있다.

 

현세는 내세에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자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해 줄 때에만 가치가 있다.

 

 

톨스토이가 깨달음을 얻고 설명한 우화는 정말 인상 깊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용이 기다리는 가운데 삶이라는 유한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인간.

 

그 와중에도 잎사귀의 꿀을 핥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이라니...

 

톨스토이는 인간의 유한함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위안을 내세를 약속하는 신앙에서 찾고자 했다.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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